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박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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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코로나19로 인해 대구에 갇혔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동대구역에서 KTX에 오르자 벌레보던 눈으로 나를 보고 창가 쪽 자리로 바짝 앉던 사람, 텅 빈 16차선 달구벌 대로에 오직 앰뷸런스만 다니던 풍경, 매일 구호물품을 실어 나르며 매일 코로나 검사를 받던 동료들.. 생각해 보면 그 거짓말 같던 시간을 지나 오늘을 살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는 여전히 어떤 형태의 격리 안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표정을 읽는 일에 서툴고, 누군가의 말보다 스크린 속 알고리즘에 더 반응하며, 관계가 아니라 연결을 관리하는 시대.

이 책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은 그런 우리를 자꾸 떠올렸다.


주인공 우식은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이다. 가전 수리센터에서 일하고, 반년에 한 번 치아 스케일링을 받으며, 공과금을 제때 내는 걸 목표로 삼는 생활. 그런 그의 세상에 파라노이드 바이러스가 찾아온다. 외부 접촉이 잦은 업무인 그는 그로 인해 세 번의 자가 격리를 당한다(?) 세 번째 자가 격리 중 문득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해진 그는 남들의 브이로그를 찾아보게 되고 '휴먼북'이라는 사람의 생을 구독하는 서비스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격리 전문가'라는 희한한 타이틀을 단 조기준이라는 인물을 만난다.


조기준은 1983년에 살던 소년이다. 조기준이 살던 동네에 갑자기 전쟁의 소문이 돌고 이 소년은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이유로 목에 밧줄이 묶인 채 벽장 속에 갇혀 10년을 보냈다. 그의 곁에는 안나라는 이름의 (여배우였다고도 하고 불쌍한 여자라고도 사람들이 수군대는) 여자가 함께 있는데 소년에게 그녀는 세상의 어떤 인물보다 빛나는 존재다. 소년은 안나가 엄마의 자리를 채워주기를 원하지만 그녀는 죽음과 더 가까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의 기록을 보며 우식은 이 오래된 기록 속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외로움이 자신이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소설은 현재의 우식과 과거의 소년 조기준을 교차시키며, 진짜 감염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1983년의 전쟁 바이러스나 오늘의 파라노이드 바이러스는 실제 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것은 어떤 이유로 인간 사이에 퍼지는 의심과 낙인, 그리고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감염자로 규정하고 그를 배제하고 벽장 속에 가두는 것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쉬운 길이다. 조기준의 10년, 소년으로서의 전부였던 시간은 서로를 믿지 못한 세월이고 우식의 세 번의 격리는 그 불신의 시대를 언제고 반복적으로 체험하는 우리 시대의 초상이다.


또 마태공이라는 인물이 있다. 우식과 함께 '디지털 세탁소'를 운영하던 선배. 온라인상의 흔적을 지워주는 일을 하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사과 트럭을 몰고 다니며 '사과합니다'를 외친다. 이 뜬금없는 사과 퍼포먼스가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그에 관한 온갖 이야기들을 실어 나른다. 호기심이 저주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손가락질한다. 대체 무얼 사과하는가 당신이 사과를 받겠다는 건 아닌가, 아니면 당신은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말하는 사이비 종교인건가.

지금도 잘 이해되지 않는 이 황당한 행동의 의도를 우식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학교폭력의 가해자였던 딸과 그 피해자와 가족에 대한 죄책감, 자신도 미처 몰랐던 악함을 딸에게 물려주었다는 뿌리 깊은 죄의식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거라고. 하지만 어두운 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행동을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간주했고 결국 그를 더 깊은 벽장에 가두어 버렸다.


<저주받은 사람들 중에 가장 축복받은>이라는 제목의 이야기 속 저주는 타인과의 단절이며 그 단절을 가져오는 우리 안의 두려움이다.

나아가 타인과 연결될 수 없다는 감각, 그렇게 나 자신마저 신뢰할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될 때 이 저주는 깊어진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인간을 믿고 누군가에게 계속 말을 걸기 시작할 때 어쩌면 이 저주는 작은 축복의 씨앗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좀 이상한 소설이다. 두 번을 읽었는데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이야기를 읽고, 응답하고, 기억하길 원한다. 그리고 이 연결의 시도가 계속되는 한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격리는 완전한 저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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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 가족의 오랜 비밀이던 딸의 이름을 불러내다
양주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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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에게서 어느 날 "네게 고모가 있었다는'"말, “너는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말을 들은 그날부터 주연은 줄곧 고모의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나만 가만히 있으면 그냥 지나갈 일인지 스스로 검열하며, 화목한 분위기에 괜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몇 해를 보낸다.

어떤 여자의 이름은 그렇게 가족의 금기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연은 그 이름을 불러내기로 한다.


<양양>은 그런 문장으로부터 시작되는 책이다. 저자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고모 양지영의 흔적을 따라간다. 가족 안에서 금기시되던 이름을 기어이 다시 불러내며, 그녀의 죽음이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구조적 침묵 속에서 가만히 묻혀 있음을 파헤친다.

"사망 원인을 규명하기보다는 그에 앞서서 우리 가족의 분위기가 좋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됐을까... 할아버지가 일을 이렇게 만든 건 아닐까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지"라는 아버지의 고백은 한 세대의 남성이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고서야 자신의 가부장적 유산을 되돌아보며 후회하는 장면처럼 읽힌다. 파헤쳐 나온 고모의 삶과 죽음을 통해 아버지는 비로소 가정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온 폭력을 마주한다. 딸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존재를 부정당한 그 무덤 앞에서 어쩌면 똑같이 부정당할 뻔했던 자신을 발견한다.


사실 이 이야기는 양씨 가족의 비밀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알고도 외면해온 여성들의 역사다. 저자는 고모의 죽음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외면해온 질문 '왜 나는 집회에서 성평등을 외치면서 집 안에서는 침묵했을까?'를 마주한다. 이건 단순한 자책이 아니라 '구호를 일상의 언어로 바꾸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옳다. 가족의 구조를 바꾸는 일은 광화문에서 외치는 거창한 세상의 혁명보다 어렵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는 불평등을 의심하는 일, 그 안에서도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또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일. 이 책은 그 불편함을 정면으로 통과하며 비로소 묻어둔 과거와 현재의 우리가 마주하는 대화의 자리를 회복시킨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불편함을 견디는 데 있다.

치밀하게 파헤치는 고모와 조카,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는 서로 교차하며 한 여성의 발화가 어떻게 가족 서사의 균열을 만든 뒤 다시 치유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드러나고, 수치로 덮여 있던 죽음이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기억으로 바뀔 때 비로소 화해가 시작된다. 이 화해는 세대와 세대 사이에서, 여성과 남성, 딸과 아버지 사이에서 조금씩 번져간다.

말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숨겨졌던 존재들은 우리곁에 다시 그 모양을 비추고 이 기억은 우리 각자가 덧붙일 수 있는 이야기의 자리가 된다.

그렇게 다시 가족은 가족이 된다.


책의 에필로그에, 주연은 양씨 가문의 여성들을 불러낸다.


"1932년 태어난 할머니 정삼례는 첫째로 딸인 고모를 낳았다는 이유로 아들인 아빠를 낳을 때까지 죄인처럼 숨죽여 지냈다.

1959년 태어난 엄마 최혜선은 공부를 잘해 수학 선생님이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부부 교사였지만, 퇴근 후에 홀로 저녁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은 엄마였다.

1975년 세상을 떠난 고모 양지영은 남자친구 집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가족 안에서 지워져야 했다.

1988년생인 나는 결혼을 할 때, 아이를 가질까 고민할 때 행복만큼이나 잃게 될 것들을 떠올렸다.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이 내 이름을 뺏어가지 않을지 두려운 마음이었다.

각기 다른 네 사람의 삶이지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고모, 그리고 사라졌던 여성들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나는 가족 안에서부터 기꺼이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로부터 '터져 버린' 미래를 상상하고 싶었다.”


나의 고모, 나의 엄마, 나의 할머니. 그들의 삶은 어땠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뮤리엘 루카이저의 말처럼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하게 털어놓은 그 그 터져버린 세상의 이야기를 나도 들어보고 싶었다.


책은 그 잔해 속에서 다시 피어난 이야기다.

불편함을 견디며 말하기 시작한 사람의 용기, 그 이야기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이제 우리도 가만히, 그 이름을 불러볼 수 있기를.


* 다큐멘터리로 먼저 나온 것 같은데 한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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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 - 더 이상 불안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키렌 슈나크 지음, 김진주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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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트가 작고 빽빽하다. 저녁 먹고 여유롭게 책이나 읽자고 펴든 책인데, 마치 정신의학 강의 교재를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각 잡고 읽어야 하나(노트와 펜을 준비하고) 고민하다 그냥 책장을 넘기기로 했다. 책은 불안을 설명하거나 치료법을 제시하는 교재이기도 하지만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통찰서이기도 하다. 사실 이렇게 읽는 게 지치지 않고 읽기 쉽다. 어차피 책의 이론들을 하나하나 외우기는 불가능하니.


어쩌면 산업화 이후 인간의 삶은 날이 갈수록 퍽퍽해졌다. 생의 모든 주기에는 불안의 요소가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든 이기며 세상을 살아냈다. 그런데 코로나19를 지나며 이마저 예측 불가능해졌다. 회사의 구조조정, 불안정한 일자리, 금리와 집값의 요동, 기후 위기, 전쟁 뉴스까지. 나의 불안만으로도 벅찬데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의 단면을 마주한다. 그렇게 불안은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 저자는 말한다. "지금의 세상에서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이상한 것"이라고. 불안이 어떠한 결함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내는 인간의 정상적 반응이라는 것이다.


책의 구성은 이론과 사례가 촘촘히 교차한다. 20년 이상의 임상심리 전문가답게 각 챕터마다 실제 환자들의 이야기가 다채로이 등장한다. 공황발작, 징크스, 여행 불안증까지. 그들의 불안은 다르지만, 저자는 공통된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나요?" 그는 불안을 없애려 노력하기보다 그 감정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불안을 다루는 방법으로 심리적 유연성(psychological flexibility) 을 강조한다. 이는 불안을 회피하거나 억누르지 않고, 그 감정을 인정하고 다루는 능력이다.

첫째, 불안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일. 감정을 밀어내지 않고, '지금 나는 불안하다'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 감정은 이미 통제 가능한 형태로 바뀐다.

둘째, 불안을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하는 일. 불안은 나를 괴롭히는 적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방향을 알려주는 신호라는 것.

셋째, 그 감정 속에서도 행동을 선택하는 일. 완벽히 준비되지 않아도, 불안한 채로 한발 내딛는 연습. 저자는 이 과정을 통해 불안은 사라지지 않아도,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갈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책은 불안을 개인의 병리로만 보지 않는다. 끊임없이 비교되고 평가받는 사회, 과잉 연결된 온라인 공간, 성취를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재단하는 구조 속에서 불안은 어쩌면 생존 전략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저자는 말한다. 불안을 없애려 애쓰기보다, 그 불안을 자기 삶의 하나의 이야기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불안을 기록하고, 그 감정을 이해하며, 그 안에서 다시 자신의 인생을 써 내려가는 일.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의 수많은 정보를 검색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고 병원을 찾기엔 아직 망설여지고 누구를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스스로의 불안을 설명하기조차 어려운 이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들에게 이 책은 분명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불안을 없애는 법이 아니라,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법.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삶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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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관계 레볼루션 - 기술 패권 시대, 변화하는 질서와 한국의 생존 전략
이희옥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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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기정학(技政學, 기존의 지정학이 지리가 국제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했다만 기정학은 기술이 국제질서를 결정짓는 시대를 의미)’ 시대로 접어든 지금, 이 책은 단순한 외교 해설서가 아니다. 기술이 곧 무기가 된 시대에 한국이 어디에 서 있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묻는다. 2025년 6월, 중앙일보 조사에서 국민의 65%가 한국의 최대 위협으로 '미중 전략 경쟁'을 꼽았다는 사실은 그 질문이 더 이상 정치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은 계속 발전하지만 트럼프 2기 정부 이후의 세계는 이념보다 생존이 더 절박한 곳이 되었다.


책은 성균관대의 공식 유튜브 채널이 기획한 지식 콘텐츠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정치, 경제, 기술 분야 전문가 4인이 나눈 대담을 엮었다. 흥미로운 건 이들이 현실의 현실에는 더이상 낭만이라는 자리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슬프게도 한국 입장에서의 미중 관계의 핵심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종속'이라는 점이다. 한국은 이미 거대한 구조 안에 포섭되어 있으며, 탈출보다는 균형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미국은 여전히 자유무역의 수호자를 자처하지만, 트럼프틑 MAGA라는 자기중심적 신념으로 무장한 채 세계를 향해 관세 폭탄을 던진다. 흥미롭게도 저자들은 트럼프 개인보다 MAGA 현상에 주목한다. 세계화의 그늘, 이민과 불평등, 산업 붕괴 속에서 미국 절반(중산층 이하 백인)의 분노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자라난 결과라는 것이다. 더 이상 미국은 '자비로운 패권국'의 얼굴을 유지할 의지도, 여력도 없다. '글로벌 공공재를 제공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저자들의 진단은 싸늘하다.


반면 중국을 향한 미국의 인식은 '배은망덕 프레임'으로 요약된다. WTO 가입을 도와줬더니 이제 자신들을 위협한다는 서사. 하지만 이 단순한 프레임의 뒤에는 미국 내부의 불안이 숨어 있다. 일자리를 빼앗긴 중산층의 분노가 외부의 적을 필요로 했고 소련이 무너지며 한동안 공석이던 그 표적이 중국이 된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미국의 제재는 중국의 기술 자립을 오히려 가속화시켰다. 딥시크 R1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AI 혁신은 결핍에서 비롯된 생존의 기술이다. 그리고 중국의 기술은 이제는 분야에 따라 미국을 초월해 버리기도 한다.


한국의 현실은 그보다 더 냉정하다. GPU도, AI칩도, 원천 기술도 없다. D램에서조차 중국의 턱밑 추격을 받는다. 책은 "한국은 실존의 위기 앞에 서 있다"고 단언한다. 부정하기 어렵다. 기술 패권이 국가의 존립과 직결된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후발 주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지금이 기회'라고 말한다. 기술이 포화된 시점, 비용과 효율의 전쟁에서 한국이 선택할 길은 '가성비 기술', 즉 실용적 혁신이다.


결국 질문은 여기로 수렴한다. 한국은 어떤 전략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미국의 그늘에 안주할 것인가, 중국의 부상을 묵인할 것인가. 저자들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보다 '어떻게 설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미동맹과 탈중국 사이의 줄타기, 소버린 AI로 상징되는 기술 주권 논의 등은 모두 그 질문의 다른 이름이다. 미국이 요구하는 완전한 탈중국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중국 의존도를 줄이는 건 필수다. 전략적 모호함이 아니라, 전략적 자율성의 시대로 가야 한다.


짧은 책인데 이상하게도 묘한 피로감이 남는다. 세계가 우리를 중심으로 돌고 있지 않다는 자각,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 우리가 너무 작은 존재라는 실감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냉정한 현실 인식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생존은 감정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책은 말 그대로 레볼루션, 즉 관점의 혁명을 요구한다. 외교를 정치의 부속품으로, 기술을 산업정책의 일부로만 보던 낡은 시선으로는 더 이상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결국 국가든 개인이든, 스스로의 기술과 판단을 지켜내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이제는 정교함이 곧 생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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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숲속 도서관의 사서입니다 - 치유의 도서관 ‘루차 리브로’ 사서가 건네는 돌봄과 회복의 이야기
아오키 미아코 지음, 이지수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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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면 바람이 들어온다.

낡은 창문이 열리며 먼지와 빛이 함께 흔들린다. 도시의 냄새와는 전혀 다른, 나무와 흙의 냄새가 번져오는 순간, 나는 이미 그 숲속 도서관에 앉아 있는 기분이 된다. 일본 나라현의 깊은 산중, 버스도 닿지 않는 고택 속에 자리한 작은 도서관 <루차 리브로>.


대학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던 저자는 업무와 인간관계의 스트레스, 도시 생활이 주는 위화감으로 정신질환을 얻게 된다. 3개월여의 입원 생활을 거친 후저자는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나라현의 시골로 이주해 자신의 집을 도서관으로 열었다. 가장 내밀한 공간을 세상과 나누는 용기, 그것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함께 고민해달라"는 절박한 초대였다. 그 마음에 응답하듯 사람들은 산을 넘고 버스를 갈아타며 그곳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조용히 서로를 돌보았다. 책과 사람이 맞닿는 자리에서 '치유'는 거창하지 않게 일어났다. 그저 곁에 앉아 함께 읽는 일,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책은 그 이야기를 다룬다.


'모른다'란 이제부터 세상을 알아갈 거라는, 혹은 미지를 미지로 남겨두는 단계의 입구에 서 있다는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른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자리에서 알지 못하는 게 부끄럽다고 느껴졌던 것일까. 회사의 전략, 관계의 방향, 아이의 마음. 가끔이지만 나도 언제부터인가 '모른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이 책은 그런 나를 토닥인다. 모른다는 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 그 말이 내 안의 빛을 살짝 흔들었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상태에도 금세 길들여집니다.

이 문장에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반복되는 업무와 루틴 속에서 '이 정도면 괜찮지'라며 스스로를 달래온 시간들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펼치고 오래된 창문을 열어 일상이란 원래 어떤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책을 그만큼이나 읽어도 이게 어렵다. 오래된 창문을 여는 일, 나를 둘러싼 공기를 다시 느끼는 일. 하긴 이 책을 통해 그걸 알았으니 어쩌면 다행일지도.


단 하나의 삶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다른 풍경을 보여줄 창문이 필요하다.

책이 바로 그 창문이다. 책을 통해 우리는 다른 시간, 다른 사람, 다른 삶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더 잘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저자는 책을 읽는 일을 '숨구멍'이라 표현한다. 꽉 막힌 공간에 작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나도 그랬다. 루차 리브로를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 숲속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책을 덮고 나서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서가 앞에 서서 내 책들을 바라보았다. 읽다 덮은 책, 언젠가 읽겠다고 쌓아둔 책, 다시 펼쳐야 할 책들. 그 사이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마치 도서관의 창문 같았다. 내가 잊고 있던 질문들이 고요히 떠올랐다. 나는 언제 창문을 닫았을까. 나는 얼마나 많은 비정상을 일상이라 부르며 살아왔을까.


이 책은 거창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사서의 목소리로 조용히 말한다. "괜찮아요, 우리 모두 조금씩 모른 채 살아가도" 그 말이 어쩐지 큰 위로로 남았다. 책은 문이자 창문이다. 그리고 그 문을 열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다시 살아난다. 루차 리브로에 직접 가지 않아도 괜찮다. 함께 책에 대해서 그리고 책을 읽는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면 우리도 서로 연결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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