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양양 - 가족의 오랜 비밀이던 딸의 이름을 불러내다
양주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0월
평점 :
아빠에게서 어느 날 "네게 고모가 있었다는'"말, “너는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말을 들은 그날부터 주연은 줄곧 고모의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나만 가만히 있으면 그냥 지나갈 일인지 스스로 검열하며, 화목한 분위기에 괜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몇 해를 보낸다.
어떤 여자의 이름은 그렇게 가족의 금기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연은 그 이름을 불러내기로 한다.
<양양>은 그런 문장으로부터 시작되는 책이다. 저자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고모 양지영의 흔적을 따라간다. 가족 안에서 금기시되던 이름을 기어이 다시 불러내며, 그녀의 죽음이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구조적 침묵 속에서 가만히 묻혀 있음을 파헤친다.
"사망 원인을 규명하기보다는 그에 앞서서 우리 가족의 분위기가 좋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됐을까... 할아버지가 일을 이렇게 만든 건 아닐까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지"라는 아버지의 고백은 한 세대의 남성이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고서야 자신의 가부장적 유산을 되돌아보며 후회하는 장면처럼 읽힌다. 파헤쳐 나온 고모의 삶과 죽음을 통해 아버지는 비로소 가정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온 폭력을 마주한다. 딸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존재를 부정당한 그 무덤 앞에서 어쩌면 똑같이 부정당할 뻔했던 자신을 발견한다.
사실 이 이야기는 양씨 가족의 비밀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알고도 외면해온 여성들의 역사다. 저자는 고모의 죽음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외면해온 질문 '왜 나는 집회에서 성평등을 외치면서 집 안에서는 침묵했을까?'를 마주한다. 이건 단순한 자책이 아니라 '구호를 일상의 언어로 바꾸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옳다. 가족의 구조를 바꾸는 일은 광화문에서 외치는 거창한 세상의 혁명보다 어렵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는 불평등을 의심하는 일, 그 안에서도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또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일. 이 책은 그 불편함을 정면으로 통과하며 비로소 묻어둔 과거와 현재의 우리가 마주하는 대화의 자리를 회복시킨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불편함을 견디는 데 있다.
치밀하게 파헤치는 고모와 조카,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는 서로 교차하며 한 여성의 발화가 어떻게 가족 서사의 균열을 만든 뒤 다시 치유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드러나고, 수치로 덮여 있던 죽음이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기억으로 바뀔 때 비로소 화해가 시작된다. 이 화해는 세대와 세대 사이에서, 여성과 남성, 딸과 아버지 사이에서 조금씩 번져간다.
말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숨겨졌던 존재들은 우리곁에 다시 그 모양을 비추고 이 기억은 우리 각자가 덧붙일 수 있는 이야기의 자리가 된다.
그렇게 다시 가족은 가족이 된다.
책의 에필로그에, 주연은 양씨 가문의 여성들을 불러낸다.
"1932년 태어난 할머니 정삼례는 첫째로 딸인 고모를 낳았다는 이유로 아들인 아빠를 낳을 때까지 죄인처럼 숨죽여 지냈다.
1959년 태어난 엄마 최혜선은 공부를 잘해 수학 선생님이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부부 교사였지만, 퇴근 후에 홀로 저녁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은 엄마였다.
1975년 세상을 떠난 고모 양지영은 남자친구 집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가족 안에서 지워져야 했다.
1988년생인 나는 결혼을 할 때, 아이를 가질까 고민할 때 행복만큼이나 잃게 될 것들을 떠올렸다.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이 내 이름을 뺏어가지 않을지 두려운 마음이었다.
각기 다른 네 사람의 삶이지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고모, 그리고 사라졌던 여성들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나는 가족 안에서부터 기꺼이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로부터 '터져 버린' 미래를 상상하고 싶었다.”
나의 고모, 나의 엄마, 나의 할머니. 그들의 삶은 어땠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뮤리엘 루카이저의 말처럼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하게 털어놓은 그 그 터져버린 세상의 이야기를 나도 들어보고 싶었다.
책은 그 잔해 속에서 다시 피어난 이야기다.
불편함을 견디며 말하기 시작한 사람의 용기, 그 이야기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이제 우리도 가만히, 그 이름을 불러볼 수 있기를.
* 다큐멘터리로 먼저 나온 것 같은데 한번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