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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박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책을 읽다가 코로나19로 인해 대구에 갇혔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동대구역에서 KTX에 오르자 벌레보던 눈으로 나를 보고 창가 쪽 자리로 바짝 앉던 사람, 텅 빈 16차선 달구벌 대로에 오직 앰뷸런스만 다니던 풍경, 매일 구호물품을 실어 나르며 매일 코로나 검사를 받던 동료들.. 생각해 보면 그 거짓말 같던 시간을 지나 오늘을 살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는 여전히 어떤 형태의 격리 안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표정을 읽는 일에 서툴고, 누군가의 말보다 스크린 속 알고리즘에 더 반응하며, 관계가 아니라 연결을 관리하는 시대.
이 책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은 그런 우리를 자꾸 떠올렸다.
주인공 우식은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이다. 가전 수리센터에서 일하고, 반년에 한 번 치아 스케일링을 받으며, 공과금을 제때 내는 걸 목표로 삼는 생활. 그런 그의 세상에 파라노이드 바이러스가 찾아온다. 외부 접촉이 잦은 업무인 그는 그로 인해 세 번의 자가 격리를 당한다(?) 세 번째 자가 격리 중 문득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해진 그는 남들의 브이로그를 찾아보게 되고 '휴먼북'이라는 사람의 생을 구독하는 서비스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격리 전문가'라는 희한한 타이틀을 단 조기준이라는 인물을 만난다.
조기준은 1983년에 살던 소년이다. 조기준이 살던 동네에 갑자기 전쟁의 소문이 돌고 이 소년은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이유로 목에 밧줄이 묶인 채 벽장 속에 갇혀 10년을 보냈다. 그의 곁에는 안나라는 이름의 (여배우였다고도 하고 불쌍한 여자라고도 사람들이 수군대는) 여자가 함께 있는데 소년에게 그녀는 세상의 어떤 인물보다 빛나는 존재다. 소년은 안나가 엄마의 자리를 채워주기를 원하지만 그녀는 죽음과 더 가까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의 기록을 보며 우식은 이 오래된 기록 속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외로움이 자신이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소설은 현재의 우식과 과거의 소년 조기준을 교차시키며, 진짜 감염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1983년의 전쟁 바이러스나 오늘의 파라노이드 바이러스는 실제 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것은 어떤 이유로 인간 사이에 퍼지는 의심과 낙인, 그리고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감염자로 규정하고 그를 배제하고 벽장 속에 가두는 것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쉬운 길이다. 조기준의 10년, 소년으로서의 전부였던 시간은 서로를 믿지 못한 세월이고 우식의 세 번의 격리는 그 불신의 시대를 언제고 반복적으로 체험하는 우리 시대의 초상이다.
또 마태공이라는 인물이 있다. 우식과 함께 '디지털 세탁소'를 운영하던 선배. 온라인상의 흔적을 지워주는 일을 하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사과 트럭을 몰고 다니며 '사과합니다'를 외친다. 이 뜬금없는 사과 퍼포먼스가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그에 관한 온갖 이야기들을 실어 나른다. 호기심이 저주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손가락질한다. 대체 무얼 사과하는가 당신이 사과를 받겠다는 건 아닌가, 아니면 당신은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말하는 사이비 종교인건가.
지금도 잘 이해되지 않는 이 황당한 행동의 의도를 우식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학교폭력의 가해자였던 딸과 그 피해자와 가족에 대한 죄책감, 자신도 미처 몰랐던 악함을 딸에게 물려주었다는 뿌리 깊은 죄의식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거라고. 하지만 어두운 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행동을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간주했고 결국 그를 더 깊은 벽장에 가두어 버렸다.
<저주받은 사람들 중에 가장 축복받은>이라는 제목의 이야기 속 저주는 타인과의 단절이며 그 단절을 가져오는 우리 안의 두려움이다.
나아가 타인과 연결될 수 없다는 감각, 그렇게 나 자신마저 신뢰할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될 때 이 저주는 깊어진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인간을 믿고 누군가에게 계속 말을 걸기 시작할 때 어쩌면 이 저주는 작은 축복의 씨앗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좀 이상한 소설이다. 두 번을 읽었는데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이야기를 읽고, 응답하고, 기억하길 원한다. 그리고 이 연결의 시도가 계속되는 한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격리는 완전한 저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