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인생공부 - 천하를 움직인 심리전략 인생공부 시리즈
김태현 지음, 나관중 원작 / PASCAL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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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삼국지를 열 번 읽지 않은 사람이랑은 친구 하지 말라던가, 대화하지 말라던가 하는 말이 있었다. 뭐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어릴 적 삼국지를 꽤 좋아했다. 아니 '삼국지'라는 단어에 자동반사로 살던 시절이었다. 집에 있던 상·중·하 3권 삼국지부터 시작해, 60권짜리 만화 삼국지, 황석영 삼국지, 이문열 삼국지까지. 세상에 삼국지라는 이름이 붙은 책이라면 일단 읽었다. 다 아는 얘기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핀잔을 들어도 나는 재밌었다.


그런 나를 칭찬하며 어른들이 그랬다. "삼국지에는 인생의 지혜가 다 있다" 그 말의 뜻을 알 리 없던 나는 그저 관우의 청룡언월도와 적토마 제갈량의 부채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쌓인 나의 삼국지 지식은 주로 게임에 사용되곤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게임 덕분에 내 안에 삼국지 세계관은 확장되고 단단해졌고 그렇게 하나의 별자리가 되었다. 수백 명의 장수가 능력치와 함께 머릿속에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어지리만 어떤 상황에서도 삼국지의 일화를 가지고 올 수 있었다.(그러고 보니 삼국지를 마블 시리즈처럼 팔아도 꽤 팔릴 것 같은데?)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어른들이 했던 말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삼국지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였다. 유비의 우유부단함, 조조의 냉철함, 제갈량의 고독함, 관우의 자존심. 그들의 모습은 내 주변에도 그리고 내 안에도 있었다. 회사에서 상사 눈치 보며 이리저리 전략을 짜던 나에게서 제갈량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하고, 야근하다가 내적 쌍욕이 튀어나오며 나는 조조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 책을 쉬 집어 든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책은 이렇게 일상을 배경으로 삼국지를 꺼내와 현대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방대한 이야기의 에피소드를 이용해 영웅의 전쟁이 아닌, 인간의 마음과 관계, 선택과 후회의 이야기로 재해석하는 데 시대를 읽는 법, 리더십, 인간관계, 꿈과 의지, 인간의 본성 같은 주제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땐 몰랐던 삼국지'를 새롭게 만나게 된다. 삼국지를 좋아했던 이들이라면 무릎을 치며 읽을 문장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는 문장 앞에서 한참을 멈췄다.

"우리는 삶에서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해 계획을 세우지만, 모든 것이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언젠가부터 나 역시 가장 꽂혀있는 말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노력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운칠기삼이 노력하지 않은 이들의 핑계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노력과 성공의 관계는 비례하지 않더라. 최선을 다해도 고꾸라지는 이들이 있는 반면, 노력한 것에 비해(사실은 그게 아니라 그렇게 보인 거겠지만) 너무 그럴싸하게 자신의 삶을 턱턱 살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랬다. 계획은 내가 세우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온전히 나만의 몫이 아니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잘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오롯이 나의 능력 없음도 아니다. 결국 우리는 노력할 뿐이지만 그것을 이루기까지는 누군가의 말처럼 온 우주가 나서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이 된다고 해서 자만해도 안되고 일이 안된다고 낙심해서도 안된다.


간만에 삼국지의 인물들 사이를 유영하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다시 제갈량의 부채를 떠올렸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고, 세상을 내 뜻대로 돌릴 수 있다고 착각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인생은 모사재인, 성사재천. 사람의 일은 사람이 하지만, 이루어지는 건 하늘에 달렸다.

언젠가 때와 나의 노력이 만날 때 그것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참고 기다리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니 오늘은 조조처럼 천하를 발아래 둘 야망을 품되, 유비처럼 사람을 믿고, 적벽에서 패한 손권처럼 너무 괴로워하지 말자.

인생은 결국 삼국지 한 권이다. 주인공은 바뀌고 전장은 달라지지만 이야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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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메모의 묘미 - 시작은 언제나 메모였다
김중혁 지음 / 유유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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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생존'

첫 직장에 입사하자마자 나를 카페로 불러낸 상사가 이것저것 알려주며 했던 이야기 중에 아직도 마음 판에 새기고 간직하며 나 또한 후배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다. 감히 너의 기억력 따위를 믿지 마라. 적어라. 일단 적고 보고 또 봐라. 말하거나 듣고 흘린 사람은 잊어버리기에 그 기억은 오롯이 적은 사람의 것이다. 그렇게 적어야 실수하지 않는다. 아니 실수를 넘어서라도 회사라는 곳은 쓴 사람의 기록이 역사가 된다.

혹 훗날 불리한 일이 생길지라도 적은 걸 바탕으로 우기면 니가 이긴다. 그러니 적어라. 회의록도, 직원들과의 짧은 미팅도, 순간순간 지나가는 인사이트도 다 적어라. 그렇게 나는 큰 다이어리를 늘 끼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고, 아이패드로, 아이폰으로 그 메모의 방법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여전히 나는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책은 이 메모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을 뿐 아니라 쓰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특히나 아직도 기억력을 운운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어졌다.


저자는 메모를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행위"라고 말한다. '메모를 시작하는 순간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알고 있던 게 새로워진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메모의 정의이자 철학이다. 메모란 거창한 작업이 아니다. 그저 지나가는 생각, 흩어지는 감정, 잠깐의 깨달음을 붙잡아 두는 일이다. 하지만 그 단순한 행위가 우리를 조금 더 예민하고, 섬세하고, 집요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는 말한다. '메모는 부스러기이고 먼지이며 곧 증발하고 마는 물방울 같은 것이다.' 그렇다. 대부분의 메모는 사라지고 버려진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싹이 트고, 또 어떤 것은 썩어 다른 생각의 거름이 된다. 이 생존율 10퍼센트 미만의 메모들이 모여 언젠가 우리의 언어와 생각 그리고 세계를 만든다. 우리는 그렇게 조각들을 모아 큰 그림을 완성해간다. 그래서 메모는 낭비가 아니다.


책을 덮고 나니 내 다이어리 속 수많은 낙서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무 의미 없이 끄적거린 문장들이 어떻게 보면 지금의 나를 만든 흔적이었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생각이 종이에 내려앉는 순간 그것은 형태를 가진다. 그리고 그 형태들이 모여 나라는 사람을 기록한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기록하는 동물이고, 기록을 통해 우리가 누군지 알아 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가끔 스마트폰 메모 앱 대신 다시 종이를 꺼내 쓴다. 손끝의 힘으로 눌러쓴 글자에는 순간의 감정이 남아 있다.

삐뚤어진 글씨 하나에도 그날의 나를 읽을 수 있다. 기록은 그렇게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바쁘게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도 메모 한 줄은 잠시 숨을 고르게 한다. 그리고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기억하게 한다.


책은 '기록은 시간을 확장시키는 마법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도 옳다. 메모는 시간을 붙잡는 일이다. 흘러가는 하루의 한순간을 붙잡아 두는 일. 결국 우리가 메모를 하는 이유는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기억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적는다. 출근길에 떠오른 생각을, 회의 중 들었던 한 문장을, 은우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그렇게 적은 사소한 문장들이 내 삶의 이정표가 되고 언젠가 다시 돌아보았을 때 오늘의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 되리라 믿는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기록은 남는다. 결국 쓰는 사람이 세상을 기억한다.


*책에서 알려주는 각종 메모도구들도 좋은 팁이다. 나는 주로 구글킵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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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피플 -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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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열자마자 특유의 기시감이 몰려왔다. 그렇지, 장강명은 원래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기괴하고 불편하며 어쩐지 꺼림칙한데 그래서 더 눈을 떼기 힘든 10편의 이야기들이 이어서 펼쳐진다. 책은 뤼미에르라고 이름하는 신촌의 한 빌딩 뤼미에르 빌딩 801호에서 810호까지에 거주하는 사람 혹은 동물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존재들에 관한 연작소설이다. 가출 청소년, 청각장애인, 무당, 여론조작팀 같은 주변부 인물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고양이나 쥐, 반인반서 같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존재들도 등장한다. 맞다. 처음엔 꽤 당혹스럽다.


대체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를 책을 읽다 보면 어쩌면 이 괴상한 이야기가 실제로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한 단면을 대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완전한 인간, 완전한 괴물도 없는 세계. 서울의 한복판에서 마치 실존하는 듯한 판타지적 설정은 왜곡된 거울처럼 우리의 얼굴을 비춘다. 고개를 돌리고 싶으면서도 정직하게 투영된 모습 앞에서 도망칠 수 없다. 이 책이 께름칙한 이유는 단순히 괴기소설 같은 설정이 그 괴물들의 얼굴이 지금의 우리와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직접 "제가 사랑하는 캐릭터는 한 줌인데 전부 <뤼미에르 피플>에 있다" 고 말하는데 기자 출신인 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게 소설이 아니라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치밀하게 취재하여 실제로 그들을 만나 관계한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치밀하고 촘촘하다.


〈801호 박쥐 인간〉은 현재만을 살며 미래를 거부하는 소년의 이야기다. 그는 교통사고로 남자친구를 잃은 임신부를 만나고, 그 사건에 휘말리면서 자신의 공상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묻는다. 〈802호 모기〉에서는 성공만을 좇아 달려온 건설업체 임원이 어느 날 갑자기 전신마비가 되어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803호 명견 패스〉에서는 저신장 여성과 청각장애인 재홍의 관계가 복잡한 삼각 구도로 흘러가며 인간관계의 불가해함을 보여주며 〈807호 피 흘리는 고양이 눈〉은 길고양이들의 세력 다툼을 통해 어느새 계급사회로 둔갑한 인간 사회의 갈등을 비춘다. 〈808호 쥐들의 지하 왕국〉은 주민등록번호도 호적도 없는 반인반서의 삶을 통해 사회적 배제와 계급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분명히 소설인데 이런 이야기들은 왠지 익숙하다. 어쩌면 이 불편함은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정직한 질문일지 모른다. 누가 그랬던가. '사람되기 쉽지 않지만 우리 괴물이 되지는 말자고'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난 이들을 보며 우리는 혐오와 연민 사이를 오가지만 결국 그들이 우리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판타지적 장치 속에서 우리는 부와 가난, 젠더와 계급, 차별과 혐오 같은 현실의 첨예한 문제들을 목격하게 된다. 이 처연한 캐릭터들의 몰골이 이 괴상한 이야기를 꾸역꾸역 읽어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뤼미에르의 주민들의 이야기는 불행과 상실로만 귀결되지 않는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빛(lumière)을 찾으려 분투한다.

그리고 그 빛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 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끝내 붙잡아야 할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말한다.

자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니 당신은 무얼 할 거지? 이 책은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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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몸으로 살기 - 나를 다듬고 타자와 공명하는 어른의 글쓰기
김진해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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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글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하루를 돌아보면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일이 ‘읽기’와 ‘쓰기’다. 그렇다고 글을 잘 쓰느냐 묻는다면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분명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나의 글쓰기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잘 쓰고 싶어 잘 쓰기 위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 대부분이 다독 다작 다상량을 권하는데 이 책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조금 달랐다. 제목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책은 쓰는 몸, 쓰는 루틴에 관해 말한다.


책의 초반은 좋은 글의 조건에 관해 이야기한다. 보통 좋은 글이라면 자기 이야기를 잘 푸는 글을 떠올리지만 그가 말하는 좋은 글은 조금 다르다. 그는 반드시 타인의 자리에 앉아본 사람 그렇게 철저하게 타인이 되어본 사람만이 마음을 움직이는 단단한 문장을 빚어낼 수 있다고 했다. 신선했다. 나는 글을 쓰고 독자는 찾아오는 것이라 믿었는데 그는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책은 이어서 글을 쓰는 몸, 쓰는 루틴에 대해 말한다. 작가 몇 명에게 물었더니 모두 자신만의 기초체력 단련법을 가지고 있었더란다. 아침에 일어나 책상을 정리하고 기도를 드리는 사람, 원고지 10매를 매일 쓰는 사람, 막히면 일부러 자거나 산책을 나서는 사람. 방법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하나였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자신의 방법으로 글을 썼다는 점이다. 글은 그렇게 몸의 습관에서 자라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글을 쓸 수 없거나 도무지 써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할 것이냐?

저자는 일단 쓰라고 말한다. 나는 늘 반대로 믿었다. 생각을 깊이 해야 글이 따라올 거라 여겼다. 그런데 실제로는 마구 쓰기, 즉 밀어붙이는 과정 속에서 문장이 문장을 밀어내고 비로소 뿌연 글감이 선명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쓰면서만 알게 되는 것들 마침표를 찍고 나서야 드러나는 것들. 사실 그랬다. 어떤 글을 써야지 하고 자리에 앉아서도 쓰다 보면 글이 자꾸 새로운 글을 만들어내는 경험이 있다. 산으로 가는 건가 싶은 글은 계속 쓰일 때 제자리를 찾는다. 마침표를 찍고 나서야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게 되었던 순간들을 빚어낸다.


저자는 또 이렇게 묻는다. 왜 글쓰기에만 하나의 잘 정리된 생각을 담아야 하냐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본래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 충돌하며 만들어지는데 글쓰기도 좀 안 그래도 되지 않냐고.

맞다. 모든 글이 정리될 필요도 없고, 모든 글이 윤리적이거나 교훈을 담을 필요도 없다.

단지 매일 손끝으로 문장을 밀어내는 이 시간의 끝에 글이 남을 테고 이 글이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랄 뿐.


괜히 오늘도 마침표까지 밀어붙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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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미술사 - ‘정설’을 깨뜨리고 다시 읽는 그림 이야기
박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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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비틀었을 때 오는 쾌감이 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 그게 아니었다거나 불가피하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그 뒷이야기를 알게 될 때 오는 묘한 짜릿함이 있다. 그래서 야사라든지 비하인드 이야기들은 그렇게도 잘 팔린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그러거나 말았거나 이런 이야기들은 재미있다.


이 책은 미술사에서 우리가 당연히 그랬겠거니 하는 이야기들을 가져와 정말 그럴까?라고 한 번 더 묻고 팩트체크하고 왜 이렇게 오해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그리고 이 과정이 묘하게 재미있다. 이를테면 평생 그림 한 장 팔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다 사후에 뻥 떠버린 고흐가 생전에 그림을 거래하는 사람이었다면? 우리가 잘 아는 뭉크의 절규가 사실은 절규하지 않는 거라면? 같은 내용들이다.

저자도 미리 이야기하지만 이 작업은 기존의 정설을 무너뜨리려는 게 아니라 "왜 우리는 그렇게 믿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함이다


이렇듯 미술사에서 정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에 책은 그 이면을 살피며 오해가 만들어지는 경로를 추적한다. 그리고 당대의 맥락 속에서 이야기를 다시 풀어내며 예술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흥미로웠던 건 2장 ‘예술은 어떻게 브랜드가 되는가’였다. 루벤스의 화실은 이미 집단 창작의 모델이었고 그의 이름은 하나의 상징, 곧 브랜드가 되었다. 렘브란트의 경우 서명이 있어도 진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결국 예술가 개인의 재능만으로는 작품의 운명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 시장과 제도 그리고 사람들의 선택이 예술가의 이름을 브랜드로 키우고 그 브랜드가 다시 작품의 가치를 견인했다.

처음에는 '평범한 농민의 하루'로 여겨졌던 밀레의 <만종>이 프랑스의 '국민 그림'으로 자리 잡은 과정 역시 작품이 어떻게 사회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되고 소비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책은 또 다른 장들에서도 계속해서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타히티에서 고통을 겪은 고갱, 기행과 상업성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달리, 권력과 줄다리기를 벌이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이들은 모두 천재라는 타이틀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카라바조가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그의 천재성만은 아니었다는 구절처럼 예술은 언제나 순수한 영역에 머물지 않았다. 정치적이고 전략적으로 소비되기도 했고 때로는 철저히 권력의 언어 속에서 작동했다.


무엇보다 이 책이 흥미로운 건 과거의 미술이라지만 역시나 지금의 미술과도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NFT 아트, 몰입형 전시, AI가 다시 그려낸 렘브란트까지. 오늘 우리가 겪는 예술의 혼란이 과거에도 변함없이 지나갔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시대는 다르지만 예술은 꽤 많은 부분 시대의 욕망과 시장의 논리, 제도의 압력 속에서 기억되고 소비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붙잡고 있는 명작의 이름도 결국은 누군가의 전략과 해석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일지 모른다. 이는 비단 예술뿐 아니라 우리가 소비하고 있는 명품, 콘텐츠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미술사만으로도 흥미로운데 꽤 생각할 거리가 많아졌다. 이런 고민을 차치하고서라도 예술을 조금 더 다르게, 넓게 보고 싶다면 추천.

사실 미술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의 내용들은 스몰토크용으로도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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