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미에르 피플 -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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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열자마자 특유의 기시감이 몰려왔다. 그렇지, 장강명은 원래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기괴하고 불편하며 어쩐지 꺼림칙한데 그래서 더 눈을 떼기 힘든 10편의 이야기들이 이어서 펼쳐진다. 책은 뤼미에르라고 이름하는 신촌의 한 빌딩 뤼미에르 빌딩 801호에서 810호까지에 거주하는 사람 혹은 동물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존재들에 관한 연작소설이다. 가출 청소년, 청각장애인, 무당, 여론조작팀 같은 주변부 인물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고양이나 쥐, 반인반서 같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존재들도 등장한다. 맞다. 처음엔 꽤 당혹스럽다.


대체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를 책을 읽다 보면 어쩌면 이 괴상한 이야기가 실제로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한 단면을 대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완전한 인간, 완전한 괴물도 없는 세계. 서울의 한복판에서 마치 실존하는 듯한 판타지적 설정은 왜곡된 거울처럼 우리의 얼굴을 비춘다. 고개를 돌리고 싶으면서도 정직하게 투영된 모습 앞에서 도망칠 수 없다. 이 책이 께름칙한 이유는 단순히 괴기소설 같은 설정이 그 괴물들의 얼굴이 지금의 우리와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직접 "제가 사랑하는 캐릭터는 한 줌인데 전부 <뤼미에르 피플>에 있다" 고 말하는데 기자 출신인 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게 소설이 아니라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치밀하게 취재하여 실제로 그들을 만나 관계한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치밀하고 촘촘하다.


〈801호 박쥐 인간〉은 현재만을 살며 미래를 거부하는 소년의 이야기다. 그는 교통사고로 남자친구를 잃은 임신부를 만나고, 그 사건에 휘말리면서 자신의 공상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묻는다. 〈802호 모기〉에서는 성공만을 좇아 달려온 건설업체 임원이 어느 날 갑자기 전신마비가 되어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803호 명견 패스〉에서는 저신장 여성과 청각장애인 재홍의 관계가 복잡한 삼각 구도로 흘러가며 인간관계의 불가해함을 보여주며 〈807호 피 흘리는 고양이 눈〉은 길고양이들의 세력 다툼을 통해 어느새 계급사회로 둔갑한 인간 사회의 갈등을 비춘다. 〈808호 쥐들의 지하 왕국〉은 주민등록번호도 호적도 없는 반인반서의 삶을 통해 사회적 배제와 계급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분명히 소설인데 이런 이야기들은 왠지 익숙하다. 어쩌면 이 불편함은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정직한 질문일지 모른다. 누가 그랬던가. '사람되기 쉽지 않지만 우리 괴물이 되지는 말자고'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난 이들을 보며 우리는 혐오와 연민 사이를 오가지만 결국 그들이 우리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판타지적 장치 속에서 우리는 부와 가난, 젠더와 계급, 차별과 혐오 같은 현실의 첨예한 문제들을 목격하게 된다. 이 처연한 캐릭터들의 몰골이 이 괴상한 이야기를 꾸역꾸역 읽어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뤼미에르의 주민들의 이야기는 불행과 상실로만 귀결되지 않는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빛(lumière)을 찾으려 분투한다.

그리고 그 빛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 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끝내 붙잡아야 할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말한다.

자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니 당신은 무얼 할 거지? 이 책은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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