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한 메모의 묘미 - 시작은 언제나 메모였다
김중혁 지음 / 유유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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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생존'

첫 직장에 입사하자마자 나를 카페로 불러낸 상사가 이것저것 알려주며 했던 이야기 중에 아직도 마음 판에 새기고 간직하며 나 또한 후배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다. 감히 너의 기억력 따위를 믿지 마라. 적어라. 일단 적고 보고 또 봐라. 말하거나 듣고 흘린 사람은 잊어버리기에 그 기억은 오롯이 적은 사람의 것이다. 그렇게 적어야 실수하지 않는다. 아니 실수를 넘어서라도 회사라는 곳은 쓴 사람의 기록이 역사가 된다.

혹 훗날 불리한 일이 생길지라도 적은 걸 바탕으로 우기면 니가 이긴다. 그러니 적어라. 회의록도, 직원들과의 짧은 미팅도, 순간순간 지나가는 인사이트도 다 적어라. 그렇게 나는 큰 다이어리를 늘 끼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고, 아이패드로, 아이폰으로 그 메모의 방법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여전히 나는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책은 이 메모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을 뿐 아니라 쓰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특히나 아직도 기억력을 운운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어졌다.


저자는 메모를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행위"라고 말한다. '메모를 시작하는 순간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알고 있던 게 새로워진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메모의 정의이자 철학이다. 메모란 거창한 작업이 아니다. 그저 지나가는 생각, 흩어지는 감정, 잠깐의 깨달음을 붙잡아 두는 일이다. 하지만 그 단순한 행위가 우리를 조금 더 예민하고, 섬세하고, 집요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는 말한다. '메모는 부스러기이고 먼지이며 곧 증발하고 마는 물방울 같은 것이다.' 그렇다. 대부분의 메모는 사라지고 버려진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싹이 트고, 또 어떤 것은 썩어 다른 생각의 거름이 된다. 이 생존율 10퍼센트 미만의 메모들이 모여 언젠가 우리의 언어와 생각 그리고 세계를 만든다. 우리는 그렇게 조각들을 모아 큰 그림을 완성해간다. 그래서 메모는 낭비가 아니다.


책을 덮고 나니 내 다이어리 속 수많은 낙서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무 의미 없이 끄적거린 문장들이 어떻게 보면 지금의 나를 만든 흔적이었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생각이 종이에 내려앉는 순간 그것은 형태를 가진다. 그리고 그 형태들이 모여 나라는 사람을 기록한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기록하는 동물이고, 기록을 통해 우리가 누군지 알아 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가끔 스마트폰 메모 앱 대신 다시 종이를 꺼내 쓴다. 손끝의 힘으로 눌러쓴 글자에는 순간의 감정이 남아 있다.

삐뚤어진 글씨 하나에도 그날의 나를 읽을 수 있다. 기록은 그렇게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바쁘게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도 메모 한 줄은 잠시 숨을 고르게 한다. 그리고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기억하게 한다.


책은 '기록은 시간을 확장시키는 마법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도 옳다. 메모는 시간을 붙잡는 일이다. 흘러가는 하루의 한순간을 붙잡아 두는 일. 결국 우리가 메모를 하는 이유는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기억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적는다. 출근길에 떠오른 생각을, 회의 중 들었던 한 문장을, 은우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그렇게 적은 사소한 문장들이 내 삶의 이정표가 되고 언젠가 다시 돌아보았을 때 오늘의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 되리라 믿는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기록은 남는다. 결국 쓰는 사람이 세상을 기억한다.


*책에서 알려주는 각종 메모도구들도 좋은 팁이다. 나는 주로 구글킵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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