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락모락 - 우리들은 자라서
차홍 지음, 키미앤일이 그림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책은 99개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한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숨을 거두기까지의 한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인간의 일생에 대해 많이 고민해 보지 않았다. 당장 매일 바뀌는 눈앞의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마흔. 딱 인생의 반환점을 돈 듯한 시점에서 지난 삶을 돌아보자면 꽤 많은 기억들이 피어오른다.
1. 사실 기억이 나지도 않는 시절의 이야기지만 난 4살 때부터 거리의 간판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천재라고, 온 집이 떠들썩 걸렸다고 한다.
2. 국민학교 1학년, 엄마는 학교에 가는 길을 등교 날 나와 함께 걸으며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혼자 이 길을 걸어야 한다며. 하필이면 다음날 비가 왔고 난 내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쓰인 노란 우산을 들고 장화를 신고 길을 나섰다. 그날 혼자 나선 길에 처음 보는 사람이 내 이름을 불렀다. 어떻게 알지? 그리고 난 노란 우산 밖으로 써진 내 이름을 확인하고 너무 부끄러워 집으로 달려오다 넘어졌다.
3. 국민학교 2학년, 난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죽기보다 싫었다. 그 노란 피아노 가방은 지금도 문득문득 떠오를 정도로 힘겨웠던 기억이었는데 어렵게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태권도복을 입은 내 친구가 나를 보더니 '풋'하고 웃었다. 그리고 그날 울고불고 난 학원을 그만뒀다.
4. 중학교 1학년, 엄마가 교통사고 났다는 연락이 왔다. 꽤 오래 병원에 있었고, 집에 돌아갔을 때 집의 거의 모든 음식을 내다 버렸다. 음식 뿐 아니라 꽤 많은 것을 버렸다.
5. 중학교 2학년, 서울에서 전학 왔다는 아이는 내게 천사의 다른 이름 같았다. 사춘기 감정이 폭발하던 시절이어서인지 그 아이의 얼굴, 눈, 코, 입 모든 것이 꽤 오래 남아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말도 못 붙여 본 내 첫사랑의 이름으로 그 아이는 남아있다.
6.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내 성적이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만약 떨어지면 그땐 집에서 두어 시간 거리의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데 와 나 그때 처음으로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줄 알았다.
7. 고등학교 3학년, 중3 때의 경험은 조금도 내 인생의 교훈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고2 마지막 수능을 240점으로(당시 400점 만점) 마무리한 나는 고3 마지막 모의고사를 370점으로 끊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역대급 물수능이었단 2001학년도 수학 평가 시험, 우리 학교에서 나만 빼고 모두가 수능 점수가 2-30점씩은 올랐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8. 내 인생에 연애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 그렇게 열심히 대학교 1학년 과제에 찌들어있는데 이제 막 수능을 끝낸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보고 싶다고. 그 제안을 어렵사리 거절하며 내심 속으로 혼자 뿌듯해 했다.
9. 편입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대학 1학년 때 죽도록 했고, 그렇게 난 생전 처음 장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이 결심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란 성경의 이야기에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걸 고민하는데 그거 돈이랑 자랑이더라. 좋은 학교 가서 돈 많이 벌고 싶은 거. 나는 부끄러웠고 이내 그저 그런 사람으로 돌아갔다.
10. 군대 훈련소 시절, 4년제 대학 다니고 키 크다는 이유로 중대장 훈련병이 된 나는 무언가 증명하기 위해 몸이 달아있었다. 4주 뭐 짧은 시간이지만 내도록 최우수 병사가 되었고 한주에 한 번씩 10분간 전화할 기회를 얻었다. 물론 집에는 1번 친구들에게 2번 전화를 걸었다.
11. 취업을 해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나는 마흔 몇군데 원서를 냈고 스물 몇군데 면접을 봤으며 모두 떨어졌다. 꽤 오랜 시간, 아침에 누워 천장을 봤다. '오늘 뭐 하지?'..
12. 일을 하며 처음으로 왕따라는 걸 당했다. 타의인지 자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늘 나를 빼고 모였고 문제가 생기면 나를 제일 먼저 타박했다. 꽤 오랫동안 출근하기 위해 시동 거는 게 무서웠다.
13.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언제나 혼자 들어가던 집에 나를 기다리는 쪼그만 녀석이 생겼고 녀석은 꼭 내 팔을 끌어안고 잠들었다. 지금도 등치는 산만해졌지만 여전히 짱고는 그 자리에서 나를 안고 잔다.
14. 정신과 상담이라는 걸 받았다. 의사는 내게 휴직을 권했는데 그럴 수는 없었고, 그냥 참고 다녔다. 입 닫고 귀 닫고. 꽤 오래 잠을 못 잤고, 사직서는 늘 임시저장 문서에 들어있었다.
15. 결혼을 했다. 결혼이 꽃길이라고 하는 사람들 말 다 뻥이다. 삶은 좋은 부분도 그렇지 않은 부분도 꽤 다이내믹하게 변했다. 난 이전에도 명절을 싫어했지만 이젠 명절 혐오론자가 되었다.
16. 직장 생활하며 처음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그래도 10여 년 직장 생활하며 꽤 집 평수를 넓혀왔는데 다시 반지하 자취방으로 돌아갔고, 여름엔 더위와 겨울엔 추위와 씨름했다. 처음으로 제습기라는 걸 사보기도 했다. 코로나가 터지며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재택근무가 내 삶에 들어오기도 했다.
아마도 앞으로 더 많은 번호의 이야기가 쓰일 것이다. 모락모락. 우리들은 그렇게 자랐다.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며 우리는 앞으로 나아왔다. 그 길이 우리가 선택했던 그렇지 않았던 아마도 시간은 우리를 계속 밀고 갈 것이다.
늘 바라는 건 언제고 우리가 우리 인생의 길에서 뒤를 돌아볼 때 그 시간이 후회와 한탄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점이다. 내 인생을 돌아볼 때 그때는 꼭 세상이 없어질 일 같았지만 조금만 떨어져 바라볼 때 그것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 내 하루를 바라볼 때도 내 하루가 사랑스러웠으면 좋겠다.
꽤 마음이 따뜻해지고, 단단해진다.
#모락모락블라인드서평단 #모락모락 #블라인드서평단 #블라인드북 #키미앤일이 #책 #독서 #서평 #문학동네 #문학동네북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