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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BOX
조유영 지음 / 문학나무 / 2022년 10월
평점 :
스마트 소설? 제목의 글귀를 보고 한참을 생각했다. 이건 뭐냐.. 책의 부제는 이렇다. '언제든지 꺼내 먹지 좋은 박스 안 달콤쌉쌀 스마트 이야기'
책은 5-10페이지 사이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하철 혹은 버스 출퇴근길에 잠깐 스크롤을 올리며 읽을 수 있는 정도? 이 짧지만 간결하고, 뭉툭하지만 예리한 소설을 어떻게 표현할까 싶었는데 추천사에서는 이 소설들을 '수상함'이라고 선언한다. 꽤 적확하다. 어떤 단편은 가볍고 즐거우며 또 어떤 단편은 책을 덮은지 하루가 지나도 계속 곱씹고 있으며 어떤 단편은 두려울 정도로 기괴했다. 수상함? 옳다. 어떻게 정의하기 힘든 이 기분을 수상함 말고 다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저 박스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내겐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것은 오늘 여러 모양으로 변했다. 그냥 박스였는데. 그것에 사랑이 담겼다고 민서는 써놓았다. 내가 버린 사랑은 어떤 모양으로 그 안에 담겨 있을까? 이제 나는 박스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p.61)
책의 제목이기도 한 단편 <박스>의 한 대목이다. 새로 만난 그녀가 씻으러 들어가고 집을 정리하던 찰나 쌓여있던 박스에는 전 여친이 사랑을 담아 보냈다고 적혀있다. 언제부터 있었지? 생각하던 찰나 박스의 한 부분이 빨갛게 물들었고, 그렇게 짓이겨진 박스 안으로 반짝하는 불빛이 비췬다. 그런데 그 박스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아니 이 박스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다. 어지러운 순간 그녀가 나를 부른다.
그랬다. 언제나 내 삶 귀퉁이에 있었지만 미처 발견되지 못했고, 매일 발에 치이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어떤 것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했고, 그전까지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것은 매 순간 다른 모양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즐겁게 하기도 또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과거에 빠져 유영하던 나를 언제나 지금의 누군가가 불러냈다. 아니 깨워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일까?
조유영의 소설을 읽으며 꽤 여러 번 나는 어느 세계로 빠져들었다. 꽤 많은 단편이 있었는데 거의 모든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 사실 잊어버리고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던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잊어버린 줄 알았던 과거의 내가 꽤 많이 되살아났고 그 모든 일들을 곱씹으며 나는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요즘은 모두가 MBTI로 얘기한다는데 NF 계열의 사람들이 읽으면 꽤 좋아할 만한 책이다.(NF 주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