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20 러닝 훈련법 - 더 천천히 달리면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다
맷 피츠제럴드 지음, 최보배 옮김 / 빌리버튼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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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나도 러너다. 나이키 앱 기록을 보니 2018년부터 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꾸준히(라고 하긴 좀 부끄럽지만) 달리고 있다. 처음 10km 대회에서 받은 기록이 56분인가 그랬다. 워낙 운동에는 젬병인지라 그것만으로도 내겐 기적과 같은 일이었고 이렇게 열심히 하면 금방 50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가장 젊었을 때 받았던 그 기록이 내 인생 최고의 기록이고 지금은 한 시간을 훌쩍(까진 아니지만 암튼) 넘어 이제는 기록이 무의미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 하면 빠르게 달릴 수 있을까. 누구는 전력 스퍼트와 천천히 달리기를 번갈아가면서 하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전문 러닝코치에서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책은 내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빠르게 달리고 싶으면 더 천천히 달려라. 이상한 위로 같으면서도 어쩐지 설득력이 있었다. 요즘은 슬로우 러닝 같은 것들도 유행이지 않은가! 그리고 책장을 덮을 즈음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천천히 달리는 일은 단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버티게 하는 리듬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느리게 달리는 사람이 오래 달린다


아 뭐 책이 삶이 어쩌고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책은 기본적으로 러닝에 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하면 잘 뛸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저자가 강조하는 건 기초체력 그리고 저강도의 힘이다. 리디아드의 말처럼 빨리 달리는 건 한계가 있지만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천천히 달리기만 하면 다시 달릴 수 있다. 그는 고강도 훈련의 필요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 아래 쌓여야 하는 건 결국 느린 속도로 쌓은 긴 시간의 러닝이었다.

러닝도 러닝이지만 요즘 내가 좀 그렇다. 뭔가 잘해보려고 하다가도 번아웃이 오고 다시 시작해야 할 때는 시작이 더 두렵다. 그런데 책은 이렇게 말한다.


지구력이 열쇠다. 속도는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봐야 한다.


사실 우리게 부족한 건 재능이나 스피드가 아니라 그걸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책은 말한다. 더 많이 달리고 또 달리고 또 더 많이 달리라고.

우리가 지쳐 있는 건 못해서가 아니라 버티지 못해서이고, 버티지 못하는 건 자주 쉬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초에 너무 빨리 달려서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80대20 파레토 법칙


고강도와 저강도 훈련을 하는 그룹을 AB테스트 한 잘츠부르크 연구의 결론은 명확하다. 고강도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적을수록 좋다. 오히려 대부분의 시간을 저강도에 쓰는 그룹이 가장 큰 향상을 이룬다.

이 실험 결과는 이상하리만치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우리는 늘 고강도로 살아간다. 눈을 뜬 순간부터 닫는 순간까지 전력 질주. 거기다 동기부여는 또 얼마나 많은지. 그러니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책은 완전히 반대되는 법칙을 보여준다.


고강도 20% + 저강도 80% = 장기적 성과


러닝 훈련의 법칙이지만 이 공식은 우리 삶에도 유효하다, 성장이라는 단어에 미쳐 일분일초를 매진해서 살아갈 때는 늘 나만 뒤처진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삶에서 의외의 성과를 낸 것들을 톺아보자면 대단한 준비가 아니라 긴 시간 꾸준히 해온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느리고 반복적이고 비슷한 일상. 그러나 이상하게 그렇게 저강도로 해왔던 시간들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러닝에서 80%의 천천히가 지구력을 키우듯 오늘 하루에서 쌓이는 느린 순간의 루틴들이 결국 마음의 근력을 기른다.

조금 느리고 조금 서툴고 조금 멈추는 그 시간들이야말로 오래가는 원동력이라는 걸 여전히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당신의 오늘이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게 할 것인가


오늘날 마라톤에서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는 케냐 러너들이 성적을 내는 이유는 특별한 훈련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학교를 오갈 때 수십 킬로를 걷거나 뛰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발도상국의 슬픈 현실이겠지만 그 삶이 그들을 비범하게 만들었다.

러닝도, 일도, 관계도, 삶도 어쩌면 다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의 삶이 누군가보다 뒤처진 것 같아 보여도 그게 전부가 아니다. 지금의 그 일상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불평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주어진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천천히 달릴 수 없다면, 더 빠르게 달릴 수 없다.


조금 천천히 가고, 조금 더 오래 버티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몸과 마음의 호흡을 맞추는 것.

다시 러닝화를 고쳐신는다. 오늘은 조금 천천히 뛰어 볼 생각이다.

주변의 풍경도 둘러보고 매일 마주치는 러너가 있다면 가볍게 목례라도 건네야지.


이렇게 하루하루를 쌓아두다 보면 언젠가 우리는 우리의 결승선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빨리 달리기보다 오래 달리는 사람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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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서툴수록 좋다
이정훈 지음 / 책과강연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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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없는 이야기를 먼저 하자면 꽤 많은 서평 요청을 받는 편이다.(이것도 비교 대상이 없으니 뭐 그러려니) 최근에는 거의 다 받는 편인데 (개인적 판단으로) 너무 엉성하거나, 편향적이거나 에세이류는 많이 거절하는 편이다. 사실 이 책도 그랬다. 거절하려 DM 창을 열었는데 뭐랄까 그 메시지에서 오는 온도가 달랐다. 정제된 문장, 그러나 그 안에서 느껴지는 따스함. 그래서 마음을 바꾸었고, 오자마자 책을 풀어 읽었다. 좋았다. 잘 쓴다. 글을 잘 쓴다는 말은 이런 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마도 기계가 아닌 그의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서 그럴 것이다.

책을 왜 읽는가? 지식이나 경험을 얻기 위해서 혹은 재미를 위해서 그것도 아니면 단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사실 첫 번째 이유가 독서의 목적이라면 이 책은 가만히 접어두어도 좋다. 다만 글이 전하는 마음과 위로를 믿는다면 이 책은 꽤 강하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


소개 글에 나와 있는 대로 그는 브랜드 기획자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래서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도 살짝 기대하긴 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는 기획자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꺼내 보인다. 그를 읽다 보면 거창한 언어 대신 마음이 다녀간 흔적이 남는다. 그리고 그 마음은 '사랑할수록, 살아갈수록 감춰야 할 말이 생기고 마는 그런 날이 있다'는 표지의 고백처럼 우리가 매일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삼켜야 하는 수많은 문장들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완벽하지 않기에 더 진실에 가까운 글을 썼다고 말한다. 기획자로의 삶을 권두고 작가로의 삶을 10년째 살아온 그의 글은 그의 말마 따나 정돈되지 못한 삶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실패, 후회, 애정, 고단함,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읽는 내내 편했다. 너무 잘 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는 그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서툴지만 진심으로 다가오는 위로는 그런 것이다. 누군가의 고통에 맞장구치지 않아도 그저 옆에 있어주는 일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가뜩이나 말이 넘치는 시대다. SNS에선 하루에도 수백 개의 위로가 흘러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게시물은 너무 완벽하고, 너무 매끄럽다. 그 완벽함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체온을 느껴본 지가 언제인가. 그에 비해 그의 글에는 뾰족한 결론도 넘치는 인사이트도 없다. 그래서 더 마음에 닿았다. 함부로 건네는 조언보다 잘 모르기에 조심스레 다가서는 문장에서 느껴지는 맨살 같은 진심이 훨씬 더 깊이 닿는다.


한편으로는 마치 오래된 편지 같았다. 종이의 질감과 잉크의 냄새가 느껴질 만큼 따뜻하고 덮은 후에도 그 잔향이 남는다. 문득 위로는 잘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위로는 기술이 아니다. 잘 말하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한 번이라도 깊이 아파본 사람이 건네는 것이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내게도 이따금 서툰 위로를 건네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가족, 친구, 동료들. 그들의 말은 여느 작가처럼 멋지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 말속에는 마음이 있었다. 이 책이 말하는 건 결국 그 마음이다. 이 마음은 언제나 인생을 조금 더 다정하게 바라보게 한다.

새삼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준 작가님께 감사를.

뭔가 세상이 조금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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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팬덤과 극단의 시대에 꼭 필요한 정치 교양
이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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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대해 입을 닫은 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투표는 꼭 해야 하는 거라고 다그치는 이들도 있다.(나 한 번도 투표 건너뛴 적 없는데 ㅠ)

그래서 돌이켜 보았다. 내가 정치에 대해 입꾹닫한지가 언제였는지. 아마도 '나꼼수'가 한창인 시점부터였던 것 같다. 나꼼수를 계기로 정치에 입문한 이들은 차고 넘쳤지만 나는 반대로 나꼼수를 계기로 정치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뭐랄까 나는 좀 싫었다. 그 가벼움이, 조롱이, 그 참을 수 없는 촐싹거림이.


변명? 고백하자면 나는 효순이, 미순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TK에서 보기 힘든 진보좌파였다. 당내 PD와 NL의 치열한 논쟁도 눈으로 목격했고 이후 진보신당, 통합진보당을 지나 녹색당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20년 이상을 당비 내고 당적을 유지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거의 모든 정치적 발언과 손절했고, 지금도 가끔 발견하는 예전에 싸지른 페이스북의 발언들도 보이는 족족 지워가는 중이다.


2000년대, IMF, 글로벌 경제 위기가 먹고사니즘을 직격하던 시기였지만 그래도 그때만 해도 우리 정치에는 낭만이 있었다. 어쩌다 저렇게까지 변해버렸나 싶은 지금의 주류 정치인들의 소장파 시절은 어쩌면 우리도 정치에 희망을 가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괜찮았고 그들의 토론을 지켜보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밤 11시, TV로만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 기억 때문에 지금도 가끔 토론 프로그램을 틀어놓곤 하는데 꼬투리 잡기로 일관하는 이들의 억지에 그냥 TV를 꺼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의아한 것은 이렇게 수준 낮은 토론이 거의 매일 국회방송으로 생중계되고 사람들이 이걸 본다는 점이다.

나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팬덤 정치의 폐해, 나쁜 정치 패키지의 작동


썰전으로 유명해진, 이철희 평론가의 책이다. 책은 우리 정치를 짓누르는 세 가지를 한 묶음으로 짚는다.

포퓰리즘, 정서적 양극화, 팬덤 정치

저자는 이들의 역사와 탄생의 근거들을 차근차근 설명하며 이들이 어떻게 한국 정치를 망치고 있는지 설명한다. 이들은 패키지로 움직인다.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고 자극하고 지원한다. 결과는 상대에 대한 혐오와 배제다. 선거는 돌아가는데 정치는 사라진 듯한 풍경 즉, 선거 민주주의는 작동하지만 정치는 없는 나라라는 진단은 과장이 아니다. 팬덤이 우리의 경계를 세우는 순간, 타협은 배신이 되고 대화는 침묵이 된다. 어떤 이는 열광의 주술로 정치적 성공을 단기간에 가져오지만 의회정치의 장치들은 그 팬덤에 포획된다.

문자 총공, 낙인, 내부 총질이라는 말이 일상이 되면 정치는 사회경제적 의제를 다루는 본래의 기능을 놓쳐버리고 만다. 법과 제도는 뒷전으로 밀리고 갈등만이 무대를 장악한다. 이는 지극한 정치혐오의 출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무조건 죄악시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팬덤정치는 참여 의지를 가진 시민들의 동력이라는 밝은 면도 있다. 그러나 그 에너지가 차이와 이견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순간 정치는 사라진다. 결국 문제는 권력을 위한 팬덤인가, 공동선을 위한 시민성인가의 갈림길이다.

그렇다고 팬덤을 시끄러운 소수로 방치하기만 할 것인가? 그 결과 우리 정치의 팬덤은 더 시끄러운 다수의 혐오가 되었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팬덤을 길들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은 오롯이 정치인의 몫이다. 책임의 좌표를 흐리지 않는다.



정치는 밥 먹여 주는 삶의 언어여야 한다


정치는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책은 단호하게 되묻는다. 보통 사람의 일상, 먹고사는 문제다. 역사적 사례는 간명하다. 국민은 정치가 민생과 경제에 집중할 때 박수를 치고 갈등 이슈에 매몰되면 화를 낸다. 미국 민주당이 약자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꾸지 못한 사이 트럼프가 박탈감의 언어를 선점했듯 우리 정치도 사회경제적 기반을 넓히지 못한 채 프레임 전쟁에 매달릴 때 신뢰를 잃었다.

정치는 비전의 문장과 제도의 설계 그리고 결과로 말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밥을 먹여준다는 말은 구호가 아니라 성적표다. 임금·주거·돌봄·부채·지역의 균형 같은 생활의 좌표들이 매일의 뉴스가 되어야 한다. 여야의 흑백논리가 아니라, 내 월세·내 대출·내 아이의 급식과 통학로, 내 부모의 병상과 요양의 언어가 의사 결정의 중심으로 올라와야 한다. 그때 시민은 정치를 다시 본다. 골대가 보이면 뛰고, 점수가 나면 환호한다.

나는 그 사실을 사회복지 현장에서 수없이 목격했다. 캠페인이 사람의 생활 동사와 닿을 때 참여는 높아지고 관계는 깊어진다. 정치는 더 크고 복잡한 캠페인일 뿐이다. 정파의 승부에서 이기는 것보다, 생활의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더 뚜렷한 승리다. '저 새끼가 그랬어요' 말고 '우리 이렇게 해봅시다'라는 말을 정치인에게 듣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책을 덮고 나니 오래전의 광장의 내가 떠올랐다. 함께 외치며 울고 웃으며 배웠던 것들, 그리고 스스로 실망하고 물러나며 잃어버린 언어들. 팬덤의 소음과 프레임의 전투가 우리를 지치게 했지만 그래도 정치는 여전히 삶을 바꾸는 가장 큰 기술이다.

그러니 좋은 정치는 멋진 말이 아니라 보통 사람을 잘 살게 만들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세상을 내 아이에게 건네고 싶은가.

답은 거창하지 않다. 오늘의 쌀·월세·병원·학교, 그리고 내 일을 조금 덜 불안하게 만드는 결정들이 더 많아지는 것.

그것을 위한 정치라면 나는 다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충분하다.


오늘 우리 동네에서 무엇을 바꾸면 내일이 조금 더 좋아질까? 사실 이 일을 함께 시작하는 것이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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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죽었다
박원재 지음 / 샘터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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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죽었다. 이 문장은 짜라투스트라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처럼 불편하고도 묘하게 매혹적이다. 신은 죽지 않는다. 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그것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이길래 저자는 여전히 그것을 말하고 그리워하는가. 자본과 권력, 제도와 시장에 의해 조각난 예술의 조각들을 다시 삶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시도. 그가 말하는 죽음은 부정이 아니라 재탄생의 시작이다.


예술의 무덤은 어디인가

책은 짜라투스트라의 메아리로 시작한다. 예술은 죽었다. 저자는 예술이 왜 그리고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묻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등장은 예술을 삶에서 미술관으로 옮겨갔다. 미술관은 작품을 전시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고립시킨다. NFT는 향유가 아닌 소유의 새로운 감옥이 되었다. 그는 예술은 사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건이고 말한다. 이런 예술이 삶의 감각을 잃고 소수의 엘리트들의 돈놀이로 의해 정의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이미 예술을 장례식장에 눕혀버린 셈이다.

그러나 그는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죽음을 마주해야만 우리는 부활을 맞이할 수 있다.


예술은 다시 질문하는 것이다

"예술은 강요하지 않으면서 감동을 주고, 판단하지 않으면서 질문을 던진다"

삶과 예술의 경계는 언제나 얇았다. 동굴벽화도, 셰익스피어의 공연도, 거리의 낙서도 결국 사람이 만들었다. 예술은 원래 그런 거다. 무엇을 그렸는가 보다 어떻게 함께 존재했는가의 문제다. 그의 진짜 질문도 이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을 각자의 삶에서 던지는 순간 예술은 다시 살아난다. 지금 당신이 쓰는 글, 그리는 그림. 아이가 내지르는 작은 소리마저도 서로 다른 이들이 그것을 보며 같은 감정의 온도에 닿을 때 그 접점은 곧 예술이 된다. 이것은 언어가 아니라 체험이며 감상이 아니라 공존이다.


예술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저자는 예술을 재현이 아닌 발생이라고 정의한다. 감상자가 관찰자가 아닌 참여’가 되는 순간 예술은 다시 숨을 쉰다. 그렇게 예술 시장도 소유에서 체험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때 기술은 대체의 도구가 아니라 확장의 도구가 된다. 전시가 아닌 현장, 거래가 아닌 관계, 감각의 회복을 통해 예술은 다시 인간의 언어로 돌아온다.

그는 말한다. “예술에서 출발한 이 전환은 삶 전반으로 확장될 수 있다.” 정치와 사회, 일상에서도 우리는 너무 자주 타인을 대상화해 왔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반대편이 아니라 함께 존재해야 하는 동반자다. 어쩌면 예술은 인간의 언어를 되살릴 가장 강력한 무기다.



예술은 결국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삶을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깊게 바라보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대상화하지 않은 상대로 서로를 바라보는 일.

예술이 죽었다는 선언은 그래서 희망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디.

오래간만에 깊이 있는 철학책을 한 권 읽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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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멋진 일에는 두려움이 따른다 - 이연이 말하는 창작에 대한 이야기
이연 지음 / 한빛라이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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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책을 덮은 후 한참 동안 그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엇을 써야 할까가 아니라 내가 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었다.


글을 쓴다는 건 생각보다 더 솔직한 일이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내미는 고백 같은 것인데 그럼에도 누가 자꾸 본다.

그래서일까. 조회 수가 오를 때마다 댓글이 달릴 때마다 조금씩 쫄리고 그런다.

제목은 모든 멋진 일에는 두려움이 따른다 한다.

사실 이 제목이 나를 집어 들게 만들었다.



1. 사랑받은 것들은 살아남는다


그 물건도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생명은 그 물건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사랑을 줬는 가로 결정된다.


나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

작은 볼펜, 편지 하나도 그렇다. NF 계열의 특징이기도 할진대,

그 물건을 집어 들면 당시의 나의 시간과 마음, 그리고 그 시절의 공기가 되살아 난다.


저자는 말한가 사랑받은 것들은 살아남는다.

사물도, 사람도, 그리고 문장도. 사랑이 깃든 것만이 남는다.

그는 말한다. 창작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라고.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라니...

내가 사랑하는 책에 대해, 고양이에 대해 그리고 이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게 된 아이에 대해 쓴다는 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라고 한다.

어떻게 안 쓸 수 있을까.



2. 재미라는 이름의 불안


진짜 재능은 잘하는데 재미까지 있는 일이다.


저자는 말한다. 재미는 억지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저절로 끌리는 일 속에서 피어난다고.

소가 풀 뜯어 먹듯 스스로 하게 되는 일을 찾으라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자꾸 손이 가는 일.

생각나면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일.

어떤 게 있나 봤는데 내게는 읽고 쓰는 일이 그랬다.

퇴근 후 피곤해도, 아이가 잠들고 나면 책을 펼치고 몇 줄이라도 써 내려갔다.

해야 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으면 불안한 아니 하고 싶은 일.

그건 의무가 아니라 나의 숨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하다.

잘하지 못하는데 좋아하기만 해도 괜찮을까.

재미있다고 계속해도 되는 걸까.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이 불안은 아마도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잘해야 한다는 마음보다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내는 것. 그것이 창작의 첫 번째 용기다.



3. 두려움 속에서도 사랑으로


세상에 실망 좀 줘도 된다. 원래 다들 민폐를 끼치며 살아간다.


속이 다 시원했다.

우리는 늘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산다.

잘해야 하고, 실망시키면 안 되고,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생각으로 정작 나를 괴롭히는 건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고 말한다.


조금 모자라도 괜찮다.

조금 엉성해도 괜찮다.

어차피 남들은 내 삶에 그렇게 관심이 없다.

사랑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삶. 그것이 바로 창작이라고 그는 말한다.

사랑은 완벽보다 오래가고 진심은 기술보다 멀리 간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잘 쓴 문장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문장이니까.



모든 멋진 일에는 두려움이 따른다.

두려움이 있다는 건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두려움은 포기의 신호가 아니라 사랑의 증거다.


나는 여전히 글을 쓰는 일이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쓰려 한다.

저자의 말처럼 사랑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인간답게 존재하는 방식이니까.

괜히 위로가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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