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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팬덤과 극단의 시대에 꼭 필요한 정치 교양
이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정치에 대해 입을 닫은 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투표는 꼭 해야 하는 거라고 다그치는 이들도 있다.(나 한 번도 투표 건너뛴 적 없는데 ㅠ)
그래서 돌이켜 보았다. 내가 정치에 대해 입꾹닫한지가 언제였는지. 아마도 '나꼼수'가 한창인 시점부터였던 것 같다. 나꼼수를 계기로 정치에 입문한 이들은 차고 넘쳤지만 나는 반대로 나꼼수를 계기로 정치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뭐랄까 나는 좀 싫었다. 그 가벼움이, 조롱이, 그 참을 수 없는 촐싹거림이.
변명? 고백하자면 나는 효순이, 미순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TK에서 보기 힘든 진보좌파였다. 당내 PD와 NL의 치열한 논쟁도 눈으로 목격했고 이후 진보신당, 통합진보당을 지나 녹색당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20년 이상을 당비 내고 당적을 유지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거의 모든 정치적 발언과 손절했고, 지금도 가끔 발견하는 예전에 싸지른 페이스북의 발언들도 보이는 족족 지워가는 중이다.
2000년대, IMF, 글로벌 경제 위기가 먹고사니즘을 직격하던 시기였지만 그래도 그때만 해도 우리 정치에는 낭만이 있었다. 어쩌다 저렇게까지 변해버렸나 싶은 지금의 주류 정치인들의 소장파 시절은 어쩌면 우리도 정치에 희망을 가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괜찮았고 그들의 토론을 지켜보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밤 11시, TV로만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 기억 때문에 지금도 가끔 토론 프로그램을 틀어놓곤 하는데 꼬투리 잡기로 일관하는 이들의 억지에 그냥 TV를 꺼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의아한 것은 이렇게 수준 낮은 토론이 거의 매일 국회방송으로 생중계되고 사람들이 이걸 본다는 점이다.
나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팬덤 정치의 폐해, 나쁜 정치 패키지의 작동
썰전으로 유명해진, 이철희 평론가의 책이다. 책은 우리 정치를 짓누르는 세 가지를 한 묶음으로 짚는다.
포퓰리즘, 정서적 양극화, 팬덤 정치
저자는 이들의 역사와 탄생의 근거들을 차근차근 설명하며 이들이 어떻게 한국 정치를 망치고 있는지 설명한다. 이들은 패키지로 움직인다.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고 자극하고 지원한다. 결과는 상대에 대한 혐오와 배제다. 선거는 돌아가는데 정치는 사라진 듯한 풍경 즉, 선거 민주주의는 작동하지만 정치는 없는 나라라는 진단은 과장이 아니다. 팬덤이 우리의 경계를 세우는 순간, 타협은 배신이 되고 대화는 침묵이 된다. 어떤 이는 열광의 주술로 정치적 성공을 단기간에 가져오지만 의회정치의 장치들은 그 팬덤에 포획된다.
문자 총공, 낙인, 내부 총질이라는 말이 일상이 되면 정치는 사회경제적 의제를 다루는 본래의 기능을 놓쳐버리고 만다. 법과 제도는 뒷전으로 밀리고 갈등만이 무대를 장악한다. 이는 지극한 정치혐오의 출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무조건 죄악시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팬덤정치는 참여 의지를 가진 시민들의 동력이라는 밝은 면도 있다. 그러나 그 에너지가 차이와 이견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순간 정치는 사라진다. 결국 문제는 권력을 위한 팬덤인가, 공동선을 위한 시민성인가의 갈림길이다.
그렇다고 팬덤을 시끄러운 소수로 방치하기만 할 것인가? 그 결과 우리 정치의 팬덤은 더 시끄러운 다수의 혐오가 되었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팬덤을 길들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은 오롯이 정치인의 몫이다. 책임의 좌표를 흐리지 않는다.
정치는 밥 먹여 주는 삶의 언어여야 한다
정치는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책은 단호하게 되묻는다. 보통 사람의 일상, 먹고사는 문제다. 역사적 사례는 간명하다. 국민은 정치가 민생과 경제에 집중할 때 박수를 치고 갈등 이슈에 매몰되면 화를 낸다. 미국 민주당이 약자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꾸지 못한 사이 트럼프가 박탈감의 언어를 선점했듯 우리 정치도 사회경제적 기반을 넓히지 못한 채 프레임 전쟁에 매달릴 때 신뢰를 잃었다.
정치는 비전의 문장과 제도의 설계 그리고 결과로 말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밥을 먹여준다는 말은 구호가 아니라 성적표다. 임금·주거·돌봄·부채·지역의 균형 같은 생활의 좌표들이 매일의 뉴스가 되어야 한다. 여야의 흑백논리가 아니라, 내 월세·내 대출·내 아이의 급식과 통학로, 내 부모의 병상과 요양의 언어가 의사 결정의 중심으로 올라와야 한다. 그때 시민은 정치를 다시 본다. 골대가 보이면 뛰고, 점수가 나면 환호한다.
나는 그 사실을 사회복지 현장에서 수없이 목격했다. 캠페인이 사람의 생활 동사와 닿을 때 참여는 높아지고 관계는 깊어진다. 정치는 더 크고 복잡한 캠페인일 뿐이다. 정파의 승부에서 이기는 것보다, 생활의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더 뚜렷한 승리다. '저 새끼가 그랬어요' 말고 '우리 이렇게 해봅시다'라는 말을 정치인에게 듣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책을 덮고 나니 오래전의 광장의 내가 떠올랐다. 함께 외치며 울고 웃으며 배웠던 것들, 그리고 스스로 실망하고 물러나며 잃어버린 언어들. 팬덤의 소음과 프레임의 전투가 우리를 지치게 했지만 그래도 정치는 여전히 삶을 바꾸는 가장 큰 기술이다.
그러니 좋은 정치는 멋진 말이 아니라 보통 사람을 잘 살게 만들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세상을 내 아이에게 건네고 싶은가.
답은 거창하지 않다. 오늘의 쌀·월세·병원·학교, 그리고 내 일을 조금 덜 불안하게 만드는 결정들이 더 많아지는 것.
그것을 위한 정치라면 나는 다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충분하다.
오늘 우리 동네에서 무엇을 바꾸면 내일이 조금 더 좋아질까? 사실 이 일을 함께 시작하는 것이 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