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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죽었다
박원재 지음 / 샘터사 / 2025년 10월
평점 :
예술은 죽었다. 이 문장은 짜라투스트라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처럼 불편하고도 묘하게 매혹적이다. 신은 죽지 않는다. 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그것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이길래 저자는 여전히 그것을 말하고 그리워하는가. 자본과 권력, 제도와 시장에 의해 조각난 예술의 조각들을 다시 삶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시도. 그가 말하는 죽음은 부정이 아니라 재탄생의 시작이다.
예술의 무덤은 어디인가
책은 짜라투스트라의 메아리로 시작한다. 예술은 죽었다. 저자는 예술이 왜 그리고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묻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등장은 예술을 삶에서 미술관으로 옮겨갔다. 미술관은 작품을 전시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고립시킨다. NFT는 향유가 아닌 소유의 새로운 감옥이 되었다. 그는 예술은 사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건이고 말한다. 이런 예술이 삶의 감각을 잃고 소수의 엘리트들의 돈놀이로 의해 정의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이미 예술을 장례식장에 눕혀버린 셈이다.
그러나 그는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죽음을 마주해야만 우리는 부활을 맞이할 수 있다.
예술은 다시 질문하는 것이다
"예술은 강요하지 않으면서 감동을 주고, 판단하지 않으면서 질문을 던진다"
삶과 예술의 경계는 언제나 얇았다. 동굴벽화도, 셰익스피어의 공연도, 거리의 낙서도 결국 사람이 만들었다. 예술은 원래 그런 거다. 무엇을 그렸는가 보다 어떻게 함께 존재했는가의 문제다. 그의 진짜 질문도 이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을 각자의 삶에서 던지는 순간 예술은 다시 살아난다. 지금 당신이 쓰는 글, 그리는 그림. 아이가 내지르는 작은 소리마저도 서로 다른 이들이 그것을 보며 같은 감정의 온도에 닿을 때 그 접점은 곧 예술이 된다. 이것은 언어가 아니라 체험이며 감상이 아니라 공존이다.
예술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저자는 예술을 재현이 아닌 발생이라고 정의한다. 감상자가 관찰자가 아닌 참여’가 되는 순간 예술은 다시 숨을 쉰다. 그렇게 예술 시장도 소유에서 체험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때 기술은 대체의 도구가 아니라 확장의 도구가 된다. 전시가 아닌 현장, 거래가 아닌 관계, 감각의 회복을 통해 예술은 다시 인간의 언어로 돌아온다.
그는 말한다. “예술에서 출발한 이 전환은 삶 전반으로 확장될 수 있다.” 정치와 사회, 일상에서도 우리는 너무 자주 타인을 대상화해 왔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반대편이 아니라 함께 존재해야 하는 동반자다. 어쩌면 예술은 인간의 언어를 되살릴 가장 강력한 무기다.
예술은 결국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삶을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깊게 바라보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대상화하지 않은 상대로 서로를 바라보는 일.
예술이 죽었다는 선언은 그래서 희망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디.
오래간만에 깊이 있는 철학책을 한 권 읽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