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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기록
존 버거.장 모르 지음, 민지현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1월
평점 :
1.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눈
<급류>의 작가 정대건은 창작자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결국 매일 보던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눈,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 앞에서 다시 멈춰 설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이 책<세상 끝의 기록>을 권한다. 세상을 분석하거나 해석하기 이전의 시선, 설명보다 경탄이 먼저 도착하는 상태 말이다. 이 책을 펼치면 독자는 무언가를 배우기보다, 잊고 있던 어떤 것을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여행이란 결국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는 일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라는 사실을 이 책은 상기시킨다.
2. 이방인의 시선, 그러나 그리움이 스며드는 풍경
다큐작가 장 모르가 세상의 변방을 여행하며 찍은 사진과 존 버거의 글을 함께 엮은 책이다. 장 모르의 사진은 늘 한 걸음 물러나 있다. 대상에 지나치게 다가가지도, 멀찍이 도망치지도 않는다. 그 미묘한 거리는 사진 속 인물과 풍경을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삶으로 남겨둔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는 늘 이방인의 시선이 담겨 있으면서도 따뜻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머물다 떠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리움 같은 감정마저 은근히 배어 나온다. 존 버거의 글은 그 감정을 확대하지 않는다. 읽는 이가 스스로 그 여백을 느끼도록 내버려 둔다.
떠나기 전 사진을 많이 빼앗겼다고도 기록되어있는데 그의 여행지 중에는 북한도 있다. 몇 장 되지 않지만 그가 평양에서 찍은 사진들에는 괜히 마음이 찡해지기도 한다. 가까이 두고도 가지 못하는 나라. 이 사진에 담겨 있는 이들은 지금쯤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3. 여행은 장소가 아니라 기억으로 완성된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자신의 기억으로 미끄러진다. 낯선 도시의 골목을 보다가, 문득 오래전의 여행의 공기와 냄새, 함께 걷던 사람의 얼굴이 겹쳐진다. 책을 읽다보면 이 사진들이 정작 어디서 찍혔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다만 작가의 카메라가 머물던 그 시간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세상 끝의 기록>은 여행기라기보다는 어떤 기억의 기록에 가깝다.
좋은 사진집이 늘 그렇지만 이 책도 한번의 호흡에 다 읽히지는 않는다. 어쩌면 한 장을 보고 덮었다가, 며칠 뒤 다시 펼치게 되는 책이다.
그 느린 리듬 속에서 독자는 그의 발걸음과 겹쳐지는 자신만의 여행과 삶의 여정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4. 책을 덮은 뒤에 시작되는 또 하나의 여정
책을 덮으니 아주 먼 곳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매일 보던 풍경인데도 잠시 낯설게 느껴졌고, 그 낯섦이 이상하게 반가웠다.
세상의 끝의 풍경. 이 책의 제목이다. 당신에게 세상 끝의 풍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구 반대편의 황량한 풍경일 수도, 이미 지나온 삶의 어느 평범한 하루일 수도 있다.
지금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면. 그래서 오늘 당신의 삶을 좀 더 새롭게 보고 싶다면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