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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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겠다는 건 엄청난 여정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첫 장을 열기 전,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선 화장실을 다녀옵니다. 커피는 큰 컵으로, 과자도 노래방용으로 준비합니다. 빈둥거리는 일요일 오후여도 좋고 여름휴가의 막바지라도 좋습니다. 이제 만사를 잊고 거의 드러눕듯 쿠션에 기대앉읍시다. 이렇게 해서 낯선 눈과 빙하의 세계로 첫발을 내딛는 겁니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추리소설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추리소설입니다. '추리소설이란 이런 것이다!'하고 소리 높여 주장하는 대신 '추리소설이 이럴 수도 있다!'하고 은근히 목소리를 깝니다. 하나의 전형을 제시하는 작품이 아니라 독창성으로 무장한 작품입니다.
그러니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패턴을 기대해선 안 됩니다. 작가가 교묘히 던져주는 정보를 퍼즐 맞추듯 맞춰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전체적인 그림이 드러나겠지, 이런 기대는 금물입니다. 그런 기대는 몇 걸음 내딛지도 못한 우리를 지치게 할 뿐입니다.

이 말을 작가가 정보에 인색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 도리어 그는 끊임없이 정보를 쏟아냅니다.

그 양이 거의 눈사태급입니다. 신기한 것은 그런데도 우리는 정보에 목이 마릅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죠. 차라리 '기묘한 문학작품'을 읽고 있다 생각합시다. 그 편이 우리의 걸음에 힘을 실어줄 테니까요.

스밀라. 이누이트(식민지 정복자들은 이들을 '에스키모'라 불렀죠)의 피가 흐르는 여자. 눈(雪)에 대한 감각을 가진 여자.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란 타이틀을 거머쥔 여자. 이 여자의 매력은 그녀가 서있는 자리에서 기인합니다.

그녀는 경계인입니다. 얼음과 불, 야생과 문명, 냉정과 열정,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 그녀가 서있습니다. 한 아이가 죽었습니다. 아이는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눈에 대한 감각을 가진 스밀라는 발자국에서 뭔가를 예감합니다. 아이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와 의견을 달리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또 다른 경계선에 섭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 위에.

"나는 영웅이 아니다. 한 아이에 대한 애정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손에 내 집념을 맡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이 소설의 매력은 작가가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 우리는 결코 그들의 진심을 알지 못합니다. 입체적이다 못해 난해한 이 인물들은 그 누구 하나 진심을 내보이는 법이 없습니다. 이들은 흑(黑)을 생각하면서 백(白)을 말합니다. 도대체 지금 이 인물의 의도는 뭘까. 이 순간 그는 왜 저런 말을 내뱉는가. 이 순간 그녀는 왜 계단을 내려가는가. 이 순간 그는 왜 돌아서는가.

머리가 지끈거리는 가운데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가를.

"결코 결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입니다. 어쩌면 이것만이 세상의 유일한 진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더불어 이런 통찰을 안겨줄 수 있는 추리소설이란 것이 그리 흔치 않다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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