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먼지 묻은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들춰봤더니 20대의 일기다. 27살의 일기.

몇 줄 읽지도 않았는데, 머리속에 예의 그 안개가 스멀스멀 끼는 기분이다. 내 20대를 정의하는 키워드인 그 안개 - 이것이 무명(無明)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 안개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는, 갈팡질팡했던, 답답하고 갑갑했던, 사방이 꽉 막힌, 결국에 가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체념과 오기의 시간. 그것이 나의 20대였다.

이 안개는 '사랑문제'에 이르러 그 농도가 절정에 이른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었다. 질척거리고 끈끈하기까지 한 이 안개에 발목이 잡혀 한 발자욱도 내딛기 힘들었다. 흡사 지뢰를 밟은 것과 같았다. 21살의 나는 29살의 내가 될 때까지 바로 그 자리에 발이 묵힌 채였다 -쓰고 보니 10년 동안 한 남자에게 목을 맸다는 뉘앙스군.  

이것이 내 탓일까. 이것이 운명일까. 

눈을 뜨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또 한 개의 하루가 주어져 있다. 매 순간을 내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살았다. 그런데도 어쩐지 뭔가에 조종당하는 느낌, 예정된 길을 걷는 느낌,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느낌, 바로 이런 느낌에 지배당하던 시절의 기록을 지금 나는 손에 들고 있는 것이다.

이 먼지 묻은 노트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나란히 놓고 보자.

내가 안개속을 헤맬 때, 23살의 알랭 드 보통은 그 안개를 자신에게서 멀찍히 떼어놓고 그것에 손끝 하나 젖지않은 채 균형 잡힌 의자에 앉아 안개의 성분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있었다. 제기랄이다!

먼 옛날 중국의 시인은 말했다. '이 생에서 읽는 책은 이미 늦다!'고. 이 시가 단순히 독서의 문제, 전생과 이생의 문제를 말하는 건 아니다. 시인은 한 인간의 자질과 인격을 다른 한 인간의 자질과 인격으로 비교하고 있다. 천재는 전생에 이미 어떠한 단계를 수료한 사람이다. 평범한 자가 이생에서 그와 맞서려해선 안 된다. 그건 무모한 짓이며 다만 그가 이번 생에 해야할 일은 꼬리를 내리고 묵묵히 앉아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시는 바로 그와 같은 교훈을 들려준다.

알랭 드 보통의 분석에 나의 안개를 대입해 보는 순간, 그것들은 밝은 햇빛 아래 증발해버린다. 안개는 걷히고 맑은 시야가 확보된다. 나는 어찌나 개운한지.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의 칭찬은 여기까지다. 그가 이 책으로 칭찬 받아야 할 이유는 그가 이 책을 23살에 썼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같은 책을 30대의 그가 40대의 그가 썼다면, 나는 몇 장 읽어보기도 전에 구토를 일으키고 말았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사랑의 교훈'이 그점을 말하고 있다. 안개의 성분을 분석하는 일은 중요하다. 인간이 사랑에 빠졌을 때의 그 혼란과 갈등과 행복과 쾌락과 질투의 감정들은 어디까지나 사랑에 빠진 그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들끓는 안개다. 그의 연인이라도 그와 똑같은 안개를 공유할 수는 없다. 지금 그의 연인은 또 그만의 안개의 잡탕속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독한 작업인 사랑에 빛을 비춰 그 성분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분류하고 기록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면 사랑을 할 때 사람들은 그 안개와 한 덩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기록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기분을 경험하겠는가.

그러나!

그뿐이다. 이처럼 복잡하고 현학적인 자질구레한 지식을 갖다가 뭘 하겠는가. 이 책의 주인공 '나' 역시 그가 이 사랑에서 얻은 교훈이라고는 다음 사랑을 향해 뛰어들어야 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 안개 속을 헤매고 질척거리는 방법 이외엔 별 수가 없다. 이 지긋지긋한 지식들과 철학자들의 온갖 해석 나부랭이들랑 쓰레기통에 처박은 채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게다예요 2007-11-16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쾌한 리뷰네요. 저도 지금보다 더 어릴 때에 이 책을 읽고 구원받은 느낌이었는데 말이죠.
10년 동안 한 남자에 목을 맸다는 뉘앙스를 저도 얼마나 오랫동안 풍기고 다녔는지, 아주 지긋지긋하고 구린내가 나네요. 안개에 대한 분석은 이제 그만 하고 싶어지는 나이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왠지 알랭드의 다음 그 다음 그그다음 책을 읽어도 전만한 기분은 들지 않네요.
반가워요. ^^

무소유 2007-11-18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다예요님,, 저도 정말 반가워요..^-^ 책을 통해 작은 마음이나마 서로 나눌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한 기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