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를 꼭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오늘 김규항 선생님과의 만남에 128명의 댓글과 참석을 원했으나 참석할 수 없었던 분들에게 자그나마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해서다.








김규항 선생님은 안동 토론회 때 발제자로 첨 뵀었다. 이번이 두 번째다. 더 젊어지셨고 늘 유머가 넘치신다. 평소 모자 쓰신 모습만 봤는데 모자 벗으신 모습이 훨씬 멋지시다.








여기서 다른 내용보다 질문과 답변을 통해 오고갔던 내용들을 쭈욱 적어보려고 한다.



질문자의 내용은 김규항 선생님의 답변 글을 통해 유추가능하리라 보고 주로 선생님의 답변을 조용조용 정리해 보겠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상식은 여러 가지며 먹고살만하고 문화를 향유할 만큼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과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상식은 다르다.(왜 아니겠는가. 있는 사람들이 매일 먹는 식사가 상식이라면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에겐 그 상식이 일 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하는 특식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이건 제 유머..)








더불어 사는 삶을 사는 것과 개인의 꿈과 욕망을 위해 사는 삶은 꼭 다르다고 볼 수는 없다. 더불어 사는 삶이 고통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 있고 내 꿈과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개인적이고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보편적이라면, 내 꿈이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는 것일 수도 있듯이 이 문제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선택의 문제다.








평화가 온순하고 조용해야 한다고 보는 것은 나쁜 의도가 깔려있다. 평화란 깨진 균형,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 조화를 회복하는 데는 온순하고 조용하지 않고 소란스러운 것일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비폭력주의자다. 악에 저항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극단의 폭력을 일삼는다는 부시도 비폭력주의자라고 말한다. 즉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비폭력주의자라고 한다. 폭력이 나쁘다는 말은 아무것도 말하는 게 없다. 비폭력은 폭력의 현장에서만 가능한 말이다. 간디 등 비폭력주의자들은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비폭력주의자들은 논평으로 비폭력을 말한다. 그러나 성실히 일해도 품위유지는 고사하고 자존심도 유지할 수 없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들이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는 것이고 이런 사람들이 비폭력을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 종일이 운동이고 싸움이다. 촛불시위에서 폭력, 비폭력을 말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촛불시위에 나갈 수도 없다. 폭력의 현장에 충분히 자신을 노출시키고 난 다음에 비폭력을 말해야 한다.








목사나 교회에 대한 선택이나 비판에 대해선 먼저 예수정신이 살아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고 없다면 교회가 아닌 동네 가게나 마트다. 기독교 이전 예수님은 유대교시절 성전 안엔 지성소라는 하느님이 살고 있었음에도 인민을 억압하는 체제의 본거지였기에 벽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라고 용기 있게 말씀하셨다. 교회를 잘 따져봐야 한다. 오히려 예수를 사칭, 빙자한 것이지 교회가 아닐 수도 있다.








옳고 그름에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다 옳고 다 그르고 다 선이고 다 악인 것은 없다. 한미FTA도 이건희나 극우파, 노무현이나 유시민처럼 개혁우파들에겐 이익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쪽도 있다. 옳고 그름은 어느 계급, 계층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국가전체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생각과 성실히 일해도 자존심조차 세울 수 없는 사람들과 먹고 살만하고 문화를 향유할 만한 여유를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 옳고 그름은 차이가 큰 것이며 별의미가 없다. 오히려 부각될수록 상황은 나빠진다. 개인의 선택이며 계급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편협하고 편향된 의견이다. 국민, 국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선 정직하게 일하면서도 인간적 자존심을 유지하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이것은 팩트다.








제도권 교육에서도 좌파 10년이라고 쓴다. 민주화는 자본화였을 뿐이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를 가속화했을 뿐이고. 이런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좌파가 경직돼있다고 하는 것은 문제다. 다른 가치가 존재한다. 좌파입장에서는 많이 과격한 게 아니다. 팩트를 말하는 것뿐이다.








주변에 존경하는 예수님 같은 존재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수많은 작은 예수들을 만난다. 실제 예수님은 너무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고 포괄적이다. 즉 정치적 급진성을 가지셨고 차별받는 여성 편에 선 페미니스트시고 장애인들을 위로하고 소수자, 약자편이시고 특히 아동을 가장 높이셨고 이방인들에게 배타적이지 않으셨고 등등..에 부합하는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많다.








[예수전]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 연구를 하셨을 텐데 어디서 오는 통찰력이신가? 라는 질문에선, 순수한 탐구와 진실을 밝히고 접근하려는 진지한 태도면 가능하다고 본다. 삶의 현장에서 순수하게 길어 올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예수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나쁘다고 본다. 즉, 예수는 영성가였다라든가, 농촌공동체복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예수가 그런분이셨다라든가, 예수 믿으면 축복 받는다라든가. 이런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진지하고 순정한 마음에서 해석하고 말씀과 행동을 잘 묵상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예수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나쁘다. 교회에 대해서나 예수론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잘못된 역사 개념에 기대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규항 선생님은 자신의 독설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한 묵상과 고민을 통해서 과격한 말, 행동을 위로받는다.








아이를 키우는 문제에 있어선, 우리 아이들이라고 작은 김규항이는 아니고. 어린이의 사회의식은 감당할 수도 참여할 수도 없고 정서적, 감성적으로도 결여돼 있다. 다만, 제국주의 문제나 불이익을 당하는 약자를 위한다든가 하는 것은 또래집단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모든 것은 아이들이 선택할 문제다. 아이들이 잘,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기를 부모는 바라고 그렇게 살도록 도울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러나 잘, 행복, 풍요가 뭔가? 라는 가치기준의 문제이고 여기에 어떤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다르다.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학원을 다니는 사람도 있고 단번에 합격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 학원을 다녔느냐 안 다녔느냐가 그렇게 가치판단이 들어갈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실용적 가치의 문제이듯이. 우리 아이들이 요즘 시대에 학원을 안 보내는 건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것 아니냐도 같은 문제일 뿐. 아이들이 학교 수업으로는 수학을 이해하기 힘들다면 그 땐 학원을 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교육은 자본주의 가치가 배어 있는 가치관의 문제고 고통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선택의 문제다.








복음이 뭐냐? 라는 질문에, 기쁜소식.. 인문학 공부를 안 하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지적인 상태다. 최고의 지적 경지는 개념어가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다. 지적언어는 학술용어다. 그러나 개념어가 들어가 있지 않은 가장 쉽게 글을 쓰면 책을 통해 습득한 사람들은 불편해한다. 동네 아파트에서 평소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과연 몇 명이 사용하는지 봐라. 그리고 젠더라는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쓰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아마 1000명 중 한 명도 안 될 거다.








글을 통해 <내 안의 이명박>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내 안과 밖의 이명박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자기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지금 정부는 한국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건희 대 이건희를 욕하는 사람의 차이가 뭔가. 차이는 돈이 많고 적고 차이일 뿐이다. 삶의 가치관, 철학에선 차이가 없다. 이명박 정부는 쿠데타나 외부의 강제적 힘으로 된 정부가 아니다. 우리의 선택이고 지금 시대의 반영이다. 가장 인간적인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인간 본래의 모습,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든 신성을 되찾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해선 안 된다. 온전한 개인의 변화가 중요하다. 체제가 변한다고 하느님의 나라 새로운 세상, 차별 없고 편견 없는 새로운 세상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예수전]을 통해 영성만을 좇는 교회가 바뀌기를 바라고 예수님은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듯 정치성과 영성성이 둘이 아닌 하나로 동시에 갖고 계셨다.








마무리 질문으로 정태춘 선생님의 질문인 새로운 세상에 대해, 너무 당연한 것을 회복하는 것. 새로운 세상이란 사람이 사람을 억압, 착취하는 것에서부터 벗어나는 것들이다. 러시아 혁명도 사실 쿠데타식 혁명론이었고 그 당시 그 사회의 반영이었고 그 통제 방식들에 세뇌돼 있는 구성원들의 내면은 계량할 수가 없다. 그것이 영성인데 겉으론 열심히 하나 속으론 얼마나 동조하는지 알 수 없다. 그 안에서 이중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발성에 기초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기도하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은폐하지 말고 삶으로 열심히 싸우고 기도하고 동시에 해야 한다. 진정한 혁명은 종교적이다. 싸우고 기도하고. ‘영성 없는 혁명’, ‘혁명 없는 영성’이 아닌 온전한 개인의 변화가 우리사회에 지배적 형태가 될 때 새로운 세상이 가능한 것이다. 노동운동은 사람이 상품이 아닌 인간인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 임금, 생존권을 위한 투쟁도 중요하지만 노동자 자신을 더 상품화시키고 제값받기 운동은 될지 모르나 진정한 혁명은 아니다. 오히려 기득권에 부합하는 것이다. 제주도 늙은 해녀가 해녀복장으로 힘든 잠수를 하자 스킨스쿠버 장비를 이용하면 100명분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안 하냐는 물음에 늙은 해녀가 말하길 그럼 99명은 어쩌냐는 답변에서 우리는 삶에서 가져가는 혁명성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안에는 자본가들이 심어준 정서가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 안에는 혁명의 씨앗이 있다. 예수님이 기도하고 싸우는 영성 속의 정치성은 하나였듯.








이렇게 3시간 넘는 질문, 대답들이 오갔다. 잠시잠시 웃느라 붙잡지 못한 얘기들도 있고 잠시잠시 김규항 선생님 외모 감상하느라 핵심이 빗나간 것도 있으나 [예수전]책 속에 고스란히 있기 때문에 현장성을 살려 정리해 보았다. 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김규항 선생님의 시기적절한 [예수전] 출간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질문에 대한 성실하고 유머 넘치는 답변이 무척 재밌었다. 알라딘의 단골 주 고객이면서도 이런 행사는 첨이었는데 너무나 유익했고 알라딘 주최 측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제 개인적인 감상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면



종교화된 예수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세포의 부활이 아닌 예수님의 태도로 내 삶이 바뀌는 혁명을 매일매일 싸우며 기도로 가져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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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온한가]에서 김규항 선생님은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하셨다. 예수는 무슨 꿈을 꾸셨으며 어떤 삶을 산  분이셨기에 믿으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까? 그러나 진작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관해선 대부분 역사를 통해 다듬어지고 정리된 예수상이다. 특히 기독교에서 강요하는 교리 안에 갇힌 예수 믿기란 때론 불편할 때가 많다. 그런데 [예수전]에서 기존 교회에서 얘기되는 예수님에 반해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적 배경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갈 수 있다. 아울러 예수님이 꿈꾸셨던 세상과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 지금 제국주의 미국을 등에 업고 전쟁을 일삼는 잔인한 전쟁국가 이스라엘에 대해 아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예수님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이란?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지속적으로 하셨던 사회비판이란 그 시대 지배체제가 허용하고 수용 가능한 개혁의 차원이 아닌, 그 시대 인민들이 겪는 억압, 가난,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예컨대,  사회체제를 고치는 개혁이 아니라  체제 변혁을 뜻한다.   

2000년 전 예수님은 갈릴래아, 사마리아, 이스라엘의 지배체제가 인민들에게 가난과 억압과 고통을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걸 변혁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사회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본주의의 극한치인 신자유주의체제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예수님이 꿈꾸시던 사회주의의 변혁만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라고 볼 수 있다.  1930년대 대공황과 1979년, 2009년 자본주의가 겪는 주기적인 공황을 본다면 자본주의는 인민들이 열심히 일할 수록 고통과 불안과 가난으로 신음하게 만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에서 폭력, 비폭력에 대한 글을 옮겨 본다.
<< 예수는 오히려 폭력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갈릴래아에선 크고 작은 봉기가 셀 수 없이 일어났다.
예수는 그런 현장을 외면할 수 있는 특권계급이 아니었다.
예수가 형 혹은 삼촌이라 부르던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 갔고 나중엔 친구와 동생들이 죽어 갔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오늘 이스라엘로부터 압살당하는 팔레스타인 점령 지구의 청년들과 같다.

그들이 비폭력을 지향했던 건 분명하나, 폭력의 현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폭력은 나쁜 거야’라고 설파하는 한심하고 염치없는 비폭력주의자들이 아니었다는 건 더욱 분명하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폭력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싸움질을 벌여 파출소에 잡혀 온 동네 양아치도 자신은 싸우고 싶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끊임없는 침략전쟁을 벌이는 제국주의자들도 전쟁이 싫지만 ‘악의 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세상에 비폭력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없는데 온 세상이 폭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비폭력주의는 무엇인가?  

 

비폭력주의는 오로지 폭력의 현장에서만 주장될 수 있다.

제국의 미사일 공격에 제 새끼가 찢겨 죽은 어미가 죽음보다 더한 슬픔을 뚫고 ‘우리는 똑같은 폭력의 보복을 해선 안 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누구도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폭력의 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1년 내내 뺨 한번 맞을 일 없는 사람이 점잖은 얼굴로 ‘저항으로서 폭력도 폭력이다’라고 뇌까리는 건 참으로 몰염치한 짓이며 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폭력보다 더 끔찍한 폭력이 된다.  


비폭력주의의 목표는 ‘비폭력’이 아니라 ‘저항’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예수는 결코 안온한 예배당이나 연구실에서 비폭력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는 언제나 폭력의 현장에서 그 폭력을 몸으로 감당하며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20세기 비폭력주의 운동의 대명사’라 일컬어지지만 일각에서는 인도 ‘민족’에 집착하여 인민들의 정당한 투쟁을 훼방한 사람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간디조차 ‘무기력하고 비굴한 비폭력보다는 차라리 정당한 폭력이 낫다’고 말했다. 비폭력주의는 폭력적인 투쟁 방법을 넘어서는 투쟁 방법이지 폭력적인 투쟁 방법에도 못 미치는, 투쟁의 정당성은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유약한 인텔리들의 요사스러운 말장난이 아니다. 진정한 비폭력주의자들이 결국 폭력에 희생당하는 운명을 갖는 건, 지배체제가 그들에게서 무장투쟁을 선택한 운동가들보다 오히려 더 큰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237,8,9쪽>>  

 

'성전 성화' 사건에서.. 

181,182쪽..<< 그러나 예수 당시의 성전이 단지 종교적 의미를 넘어 지배체제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에서, 예수의 태도를 전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해 보아야만 한다. 예수는 억압의 사회체제가 피억압자들의 비굴과 무기력에 힘입어 유지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앞서 말했듯 인민들은 성전의 실상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저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다.", " 하느님은 저곳에 거하시지 않는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엔 예의 순진함 외에 '세상이 다 그런 거지' 하는 비굴과 무기력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대개 어떤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힘이 전적으로 그 체제의 지배세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를테면 1970년대 한국의 군사 파시즘 체제를 유지하는 힘은 전적으로 박정희 패거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민은 다만 그 포악한 체제의 일방적 희생자로 묘사된다. '박정희 군사 파시즘에 신음하던 인민들.' 그러나 그 시절 대개의 인민들은 '신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다 그런 거지','사람이 하는 일인데 완벽할 수야 있나' 하며 제 식구들 챙기며 오순도순 살았을 뿐이다.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인민들의 비굴과 무기력이다. 사실 제아무리 포악하고 강한 사회체제라고 해도 대다수 인민들이 한꺼번에 거부의사를 표시하면 당장이라도 맥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예수는 수많은 인민들 앞에서 그들의 비굴과 무기력을 일깨우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난동'은 침묵하는 억압의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장엄한 퍼포먼스였다. 지배자들은 그 퍼포먼스를 통해 하느님의 권위로 은폐된 그들의 썩은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인민들은 '인민들의 순진함'으로 가려진 제 비굴과 무기력을 비로소 되새기며 인간적 위엄을 회복할 채비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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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한테 선물 받은 책이다. 

비싼 책이라서가 아니라 반드시 독후감을 써서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리.. 

 

 

 

 

 

 "경제위기, 끝나고 있는가?" 이런 턱 없는 기사도 나오고 있는데 

자본주의의 근본문제에 접근하고 

경제위기를 통찰할 수 있는 현안을 키울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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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선생님의 [예수전]을 올해 나의 베스트 북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물론 이 책에서 김규항 선생님이 지적하셨듯, 내가 듣고 싶은 것,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깨닫는 것은 또 하나의 편견, 고집, 더 나아가 독선, 독단을 만드는 책 읽기가 되지않도록 깨어있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완고함"에 대해 손가락이 밖으로 향할 필요없이 바로 나에게로 향해야 되지 싶다. 

어떤 친절하신 알라디너 분이 책읽는 방법을 최근에 가르쳐주셔서 요즘은 책을 제대로 꼼꼼히 읽고 있다. 책에 줄을 찍찍 긋고 읽었는데 요즘은 그런 책을 모독하는 짓은 그만뒀다. 모르는 건 배우고 고치고 바꿔 변화하며 살아가야 한다.  

핵심은 실천이다. 

부드러운 필력으로 사람을 살리는 글쓰기가 감동이다. 마치 예수님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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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인 제목으로 인해 도저히 안 사 읽고는 못베길것 같은 책이다.

먼저, 이 책을 읽기전까지 책 제목만을 되뇌이면서 한껏 상상을 했었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보다 여론, 종교주의자, 도덕주의자들에게

훨배 자칫 직격탄을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해서 빨리 책을 구해 읽었다.

첫 장을 넘기는데, 소설도 아니고 문화비평서가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단 말인가!

소설<차탈렛부인의 연인>, <임마뉴엘부인>, <메꽃 세브린느>등의

그 당시 도덕적 금기에 당당히 도전했던 작품들을 마광수 특유의 감수성과

성심리와 성문학적 접근과 탐구로 독창적인 설득력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은 섹스다.

사랑과 섹스는 마치 견우와 직녀가 일년에 단한번 오작교에서 만나는만큼이나

만나기엔 힘겨운 처지이자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하다.

수많은 문학작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사랑은 오를 수 없는 경지만큼 높은 천상의 그 곳, 정신에 치닫고 있고

섹스는 빠지면 죽음에 이르는 병처럼 좀체 그 터부에서

완전한 자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 마광수는 이 책에서 당당하게 둘이 하나임을 억지없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게 해준다.

 

섹스는 행복추구권이며

약자들의 섹스 문제를 들어 이젠 섹스는 인권의 문제라고 한다.

 

식욕의 시대가 가면 반드시 성욕의 시대가 온다는 것에 초점이

자연스럽게 맞춰진다.

사실 식욕도 보릿고개를 넘기던 시절에는 단지 세끼 배만 불리면 됐었지만,

지금은 일식, 한식, 중식, 피자도 여러 종류의 입맛에 맞는 것을 찾아 먹는것처럼

늘 먹든 된장찌게에 청국장만 먹고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성욕의 시대에는 단지 기본적인 생식을 위한 단계를 넘어서

이젠 섹스가 즐기는 놀이문화 수준을 제대로 형성해야 

그 다음 단계인 건강한 명예욕의 시대를 맞을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 섹스에 대한 여러면의 탐구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특히 그 중 하나가 비틀거리고 있는 결혼제도에 대한 재고,

즉 "불륜"에 대해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남녀평등의 입장에서 불륜에 관해 접근하고 있다.

남녀불평등이 잔존하는 지금 남자로서 기득권을 내어놓고 "불륜"에 관해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인물론 중에서

김용옥에 대해서

나는 예전에 <앙코르와트, 월남가다> 김용옥 책을 읽다가 ,

이 책 끝부분에 김용옥이 김우중 회장과 개인용 헬기를 타고

경제사업 관련으로 아프리카를 투어하던 때를 회고하던 글을 읽으면서

뭔가 모를 답답함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전 노무현대통령선거 개표당일 당선이 확정되던 날,

노무현 당선자 곁에 김용옥이 함께 있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비춰지는 걸 보면서

나는 다소 실망했었다. 그 전까지 내가 김용옥의 글을 읽으면서

심오한 학자로서 깊이가 있는 분일 거라고 느끼고 있었고

앞으로 시간을 내서 그 분의 책을 탐독해 보리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터라.

그런데 순수한 학자가 아니라 어쩌면 학문을 등에 업고 입신출세와  권력을 추구하는

분일지도 모르겠군!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됐었다.

그렇기에 마광수의 김용옥 인물론을 읽으면서 일부분 공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지성인들간에 이런 건강한 비판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 장정일에 관해서

그의 소설<내게 거짓말을 해 봐>는 불행히도 외설성 시비로 판금되긴 했지만,

그 책은 내가 아끼는 책이다. 그 책에 감동받아 장정일 소설을 즐겨 읽고, 특히 시도 즐겨 읽는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 >을 읽으면서 훌륭한 시인임엔 틀림없는데

소설만큼 시에 확 몰입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를 꼼꼼히 생각은 못했었지만

마광수가 장정일 시에 대한 지적에서 장정일에 대한 애정과 아끼는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지식인들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정치인들에 대한 조언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밖에도 문화비평서로서 여러 문제에 대한 통찰력있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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