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를 꼭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오늘 김규항 선생님과의 만남에 128명의 댓글과 참석을 원했으나 참석할 수 없었던 분들에게 자그나마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해서다.








김규항 선생님은 안동 토론회 때 발제자로 첨 뵀었다. 이번이 두 번째다. 더 젊어지셨고 늘 유머가 넘치신다. 평소 모자 쓰신 모습만 봤는데 모자 벗으신 모습이 훨씬 멋지시다.








여기서 다른 내용보다 질문과 답변을 통해 오고갔던 내용들을 쭈욱 적어보려고 한다.



질문자의 내용은 김규항 선생님의 답변 글을 통해 유추가능하리라 보고 주로 선생님의 답변을 조용조용 정리해 보겠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상식은 여러 가지며 먹고살만하고 문화를 향유할 만큼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과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상식은 다르다.(왜 아니겠는가. 있는 사람들이 매일 먹는 식사가 상식이라면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에겐 그 상식이 일 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하는 특식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이건 제 유머..)








더불어 사는 삶을 사는 것과 개인의 꿈과 욕망을 위해 사는 삶은 꼭 다르다고 볼 수는 없다. 더불어 사는 삶이 고통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 있고 내 꿈과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개인적이고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보편적이라면, 내 꿈이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는 것일 수도 있듯이 이 문제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선택의 문제다.








평화가 온순하고 조용해야 한다고 보는 것은 나쁜 의도가 깔려있다. 평화란 깨진 균형,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 조화를 회복하는 데는 온순하고 조용하지 않고 소란스러운 것일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비폭력주의자다. 악에 저항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극단의 폭력을 일삼는다는 부시도 비폭력주의자라고 말한다. 즉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비폭력주의자라고 한다. 폭력이 나쁘다는 말은 아무것도 말하는 게 없다. 비폭력은 폭력의 현장에서만 가능한 말이다. 간디 등 비폭력주의자들은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비폭력주의자들은 논평으로 비폭력을 말한다. 그러나 성실히 일해도 품위유지는 고사하고 자존심도 유지할 수 없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들이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는 것이고 이런 사람들이 비폭력을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 종일이 운동이고 싸움이다. 촛불시위에서 폭력, 비폭력을 말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촛불시위에 나갈 수도 없다. 폭력의 현장에 충분히 자신을 노출시키고 난 다음에 비폭력을 말해야 한다.








목사나 교회에 대한 선택이나 비판에 대해선 먼저 예수정신이 살아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고 없다면 교회가 아닌 동네 가게나 마트다. 기독교 이전 예수님은 유대교시절 성전 안엔 지성소라는 하느님이 살고 있었음에도 인민을 억압하는 체제의 본거지였기에 벽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라고 용기 있게 말씀하셨다. 교회를 잘 따져봐야 한다. 오히려 예수를 사칭, 빙자한 것이지 교회가 아닐 수도 있다.








옳고 그름에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다 옳고 다 그르고 다 선이고 다 악인 것은 없다. 한미FTA도 이건희나 극우파, 노무현이나 유시민처럼 개혁우파들에겐 이익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쪽도 있다. 옳고 그름은 어느 계급, 계층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국가전체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생각과 성실히 일해도 자존심조차 세울 수 없는 사람들과 먹고 살만하고 문화를 향유할 만한 여유를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 옳고 그름은 차이가 큰 것이며 별의미가 없다. 오히려 부각될수록 상황은 나빠진다. 개인의 선택이며 계급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편협하고 편향된 의견이다. 국민, 국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선 정직하게 일하면서도 인간적 자존심을 유지하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이것은 팩트다.








제도권 교육에서도 좌파 10년이라고 쓴다. 민주화는 자본화였을 뿐이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를 가속화했을 뿐이고. 이런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좌파가 경직돼있다고 하는 것은 문제다. 다른 가치가 존재한다. 좌파입장에서는 많이 과격한 게 아니다. 팩트를 말하는 것뿐이다.








주변에 존경하는 예수님 같은 존재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수많은 작은 예수들을 만난다. 실제 예수님은 너무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고 포괄적이다. 즉 정치적 급진성을 가지셨고 차별받는 여성 편에 선 페미니스트시고 장애인들을 위로하고 소수자, 약자편이시고 특히 아동을 가장 높이셨고 이방인들에게 배타적이지 않으셨고 등등..에 부합하는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많다.








[예수전]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 연구를 하셨을 텐데 어디서 오는 통찰력이신가? 라는 질문에선, 순수한 탐구와 진실을 밝히고 접근하려는 진지한 태도면 가능하다고 본다. 삶의 현장에서 순수하게 길어 올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예수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나쁘다고 본다. 즉, 예수는 영성가였다라든가, 농촌공동체복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예수가 그런분이셨다라든가, 예수 믿으면 축복 받는다라든가. 이런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진지하고 순정한 마음에서 해석하고 말씀과 행동을 잘 묵상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예수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나쁘다. 교회에 대해서나 예수론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잘못된 역사 개념에 기대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규항 선생님은 자신의 독설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한 묵상과 고민을 통해서 과격한 말, 행동을 위로받는다.








아이를 키우는 문제에 있어선, 우리 아이들이라고 작은 김규항이는 아니고. 어린이의 사회의식은 감당할 수도 참여할 수도 없고 정서적, 감성적으로도 결여돼 있다. 다만, 제국주의 문제나 불이익을 당하는 약자를 위한다든가 하는 것은 또래집단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모든 것은 아이들이 선택할 문제다. 아이들이 잘,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기를 부모는 바라고 그렇게 살도록 도울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러나 잘, 행복, 풍요가 뭔가? 라는 가치기준의 문제이고 여기에 어떤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다르다.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학원을 다니는 사람도 있고 단번에 합격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 학원을 다녔느냐 안 다녔느냐가 그렇게 가치판단이 들어갈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실용적 가치의 문제이듯이. 우리 아이들이 요즘 시대에 학원을 안 보내는 건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것 아니냐도 같은 문제일 뿐. 아이들이 학교 수업으로는 수학을 이해하기 힘들다면 그 땐 학원을 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교육은 자본주의 가치가 배어 있는 가치관의 문제고 고통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선택의 문제다.








복음이 뭐냐? 라는 질문에, 기쁜소식.. 인문학 공부를 안 하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지적인 상태다. 최고의 지적 경지는 개념어가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다. 지적언어는 학술용어다. 그러나 개념어가 들어가 있지 않은 가장 쉽게 글을 쓰면 책을 통해 습득한 사람들은 불편해한다. 동네 아파트에서 평소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과연 몇 명이 사용하는지 봐라. 그리고 젠더라는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쓰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아마 1000명 중 한 명도 안 될 거다.








글을 통해 <내 안의 이명박>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내 안과 밖의 이명박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자기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지금 정부는 한국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건희 대 이건희를 욕하는 사람의 차이가 뭔가. 차이는 돈이 많고 적고 차이일 뿐이다. 삶의 가치관, 철학에선 차이가 없다. 이명박 정부는 쿠데타나 외부의 강제적 힘으로 된 정부가 아니다. 우리의 선택이고 지금 시대의 반영이다. 가장 인간적인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인간 본래의 모습,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든 신성을 되찾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해선 안 된다. 온전한 개인의 변화가 중요하다. 체제가 변한다고 하느님의 나라 새로운 세상, 차별 없고 편견 없는 새로운 세상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예수전]을 통해 영성만을 좇는 교회가 바뀌기를 바라고 예수님은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듯 정치성과 영성성이 둘이 아닌 하나로 동시에 갖고 계셨다.








마무리 질문으로 정태춘 선생님의 질문인 새로운 세상에 대해, 너무 당연한 것을 회복하는 것. 새로운 세상이란 사람이 사람을 억압, 착취하는 것에서부터 벗어나는 것들이다. 러시아 혁명도 사실 쿠데타식 혁명론이었고 그 당시 그 사회의 반영이었고 그 통제 방식들에 세뇌돼 있는 구성원들의 내면은 계량할 수가 없다. 그것이 영성인데 겉으론 열심히 하나 속으론 얼마나 동조하는지 알 수 없다. 그 안에서 이중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발성에 기초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기도하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은폐하지 말고 삶으로 열심히 싸우고 기도하고 동시에 해야 한다. 진정한 혁명은 종교적이다. 싸우고 기도하고. ‘영성 없는 혁명’, ‘혁명 없는 영성’이 아닌 온전한 개인의 변화가 우리사회에 지배적 형태가 될 때 새로운 세상이 가능한 것이다. 노동운동은 사람이 상품이 아닌 인간인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 임금, 생존권을 위한 투쟁도 중요하지만 노동자 자신을 더 상품화시키고 제값받기 운동은 될지 모르나 진정한 혁명은 아니다. 오히려 기득권에 부합하는 것이다. 제주도 늙은 해녀가 해녀복장으로 힘든 잠수를 하자 스킨스쿠버 장비를 이용하면 100명분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안 하냐는 물음에 늙은 해녀가 말하길 그럼 99명은 어쩌냐는 답변에서 우리는 삶에서 가져가는 혁명성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안에는 자본가들이 심어준 정서가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 안에는 혁명의 씨앗이 있다. 예수님이 기도하고 싸우는 영성 속의 정치성은 하나였듯.








이렇게 3시간 넘는 질문, 대답들이 오갔다. 잠시잠시 웃느라 붙잡지 못한 얘기들도 있고 잠시잠시 김규항 선생님 외모 감상하느라 핵심이 빗나간 것도 있으나 [예수전]책 속에 고스란히 있기 때문에 현장성을 살려 정리해 보았다. 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김규항 선생님의 시기적절한 [예수전] 출간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질문에 대한 성실하고 유머 넘치는 답변이 무척 재밌었다. 알라딘의 단골 주 고객이면서도 이런 행사는 첨이었는데 너무나 유익했고 알라딘 주최 측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제 개인적인 감상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면



종교화된 예수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세포의 부활이 아닌 예수님의 태도로 내 삶이 바뀌는 혁명을 매일매일 싸우며 기도로 가져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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