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철학,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ㅣ 누구나 교양 시리즈 6
페르난도 사바테르 지음, 유혜경 옮김 / 이화북스 / 2025년 8월
평점 :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서양철학의 만신전에서 스페인 철학은 다소 변방 외지에 속한다. 스페인의 철학자 페르난도 사바테르는 "현대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두 철학자"로 미겔 데 우나무노와 오르테가 이 가세트를 꼽는다. 책 말미에 '연대표'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 학파와 주요 저작은 물론 시대적 배경까지 정리되어 있다. 우나무노는 인본주의적 실존주의 학파, 대표작은 『삶의 비극적 감정』과 『이것도 저것도 반대하며』이다. 오르테가는 이성적 생명철학 학파, 대표작은 『등뼈 없는 스페인』과 『대중의 반역』이다.
그리고 내가 새로이 관심을 갖게 된 사상가가 있는데, 바로 여성 철학자 마리아 잠브라노다. 잠브라노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제자인데, 역시 이성적 생명철학을 대변하고 대표작 『인간과 신성』이 있다. 빨리 번역본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외에 조지 산타야나(실재론, 『존재의 영역』), 후안 루이스 비베스(인문주의, 『영혼과 생에 대하여』)도 다루고 있다.
우나무노는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가 옹호했던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의 삶을 중시했는데, 키르케고르를 자신의 '형제'라 부를 정도였다.
"삶이야말로 진리의 기준이다. 논리적 일치는 진리의 기준이 아니라 단지 이성의 기준일 뿐이다. 만약 내 신념이 삶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면,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수학이 사람을 죽게 만든다면, 그 수학은 거짓이다. 내가 타는 목마름에 시달리며 걷다가 물처럼 보이는 환영을 보고 달려가 그것을 마셨고 갈증이 해소되어 살아난다면, 그 환영은 진짜였고 그 물도 진짜였던 것이다. 우리를 어떤 식으로든 행동하게 만들고 그 결과가 우리의 목적을 실현하도록 이끄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다."(266쪽)
오르테가의 사유는 세속적이고 이성주의적이다. 오르테가는 인간은 역사 속에 놓인 존재이며, 내가 내 환경을 구하지 못한다면, 나 역시 구원받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속한 사회문화적 환경을 함께 변화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오르테가는 철학, 종교, 예술과 같은 '관념'과 '신념'을 구분한다. 신념이란 우리의 일상적 삶을 지탱하는 바탕이다. 그리고 인식의 문제에 있어선 관념론적 입장과 실재론적 입장 모두를 거부한다.
국내 독자에게도 매우 친숙한 명작 『대중의 반역』에서 오르테가는 현대인을 '대중인간'이라 부르며 획일적이고 무비판적이면서도 욕망만은 강한 존재로 묘사한다. 과거와 단절되어 외롭고 불안한 대중은 지적 엘리트에 대한 존중을 잃고, 중간 수준의 선동과 평범함 속에서 집단적 만족을 추구한다. 오르테가의 이런 대중사회에 대한 이해는 훗날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과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 같은 급진 좌파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정치와 전체주의에 맞선 투쟁에 깊이 천착한 여성 철학자로 『전체주의의 기원』을 집필한 한나 아렌트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여성 철학자 마리아 잠브라노 역시 전체주의에 항거한 투사였다. 그녀가 평생 천착한 주제는 시와 철학이라는 서로 다른 지적 전통을 이어주는 '시적 이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철학이 차이를 제거함으로써 존재의 통일을 추구하는 반면, 시는 있는 그대로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사물 하나하나를 어떤 제약이나 추상화 없이 받아들인다. 시적 이성을 니체식으로 말한다면, 아폴론적 합리성과 디오니소스적 감수성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잠브라노는 대표작 『인간과 신성』에서 불안정하고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인간 삶의 피해 망상 속에서 신성은 때로 불안을 더 심화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며 '경건함'이란 개념을 강조한다.
자, 누구나 '인생의 첫 철학책'이 있기 마련이다. 스페인의 밀리언셀러 철학자 페르난도 사바테르에겐 어릴 때 읽은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의 지혜』가 바로 그런 인생책이었다. "선물용 양장본처럼 꾸며진, 그림이 풍부하게 담긴 철학사 책"을 나름 오마주한 것이 바로 이 책 『철학,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이화북스, 2025)이다. 양장본은 아니지만 '인생의 첫 철학책'으로 손색이 없는 그런 입문서라고 본다. 책의 멋진 삽화는 저자의 친동생인 후안 카를로스 사바테르가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