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연금술사
엄창석 지음 / 민음사 / 200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문한 어린 연금술사가 도착한 날이 생각난다. 여행은 떠나기 전이 더 설레듯이 책도 주문하고 기다릴 때, 그리고 책 포장상자를 뜯을 때 기대된다.

 

 

140“...마당에 있던 미꾸라지도 구름을 타고 떨어진 것이 아니라, 꽃뱀도 연필심이 변해서 된 것이 아니라, 그건 우리 삶에 끼어든 틈입자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조개 속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다는 진주처럼 미꾸라지도 꽃뱀도 우주의 갈피 속에 숨어 있다가 홀연 내 앞에 나타난 것이리라.”

 

151 “...그 다음날 새벽이었다. 나는 굴뚝에 올라 온 동네의 경치를 감상하였다. 지난 밤 눈이 내려 철도 부지 밭들과 길이 온통 하얗게 덮여 있었다. 탱자나무며 찔레, 동일네 집 뒤 왕대나무 잎에도 눈이 덮여 동트는 동네를 벅차게 빛내고 있었다. 눈은 들판에 누워, 아직 늦잠을 자는 아이들을 기다렸고, 목이 묶인 병도네 불독이 눈이 왔다는 신호를 온동네 개들에게 알리느라 킁킁 짖어대고 있었다. 집 밖으로 다니는 사람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소설 속 문장을 읽다가 어느 순간, 죽은 영혼이 죽은 자의 몸에서 빠져나오듯 내 어린 날 마을의 눈 내린 풍경에 대한 기억들이 읽고 있는 문장에서 일어났다. 밤새 소리 없이 내려 마당에 쌓였던 함박눈이 바람에 기척을 해서였는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아침, 방문을 열면 눈부신 바깥세상이 기적처럼 놓여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읽던 부분을 펴서 다시 읽다가 위와 같은 내용을 책 앞부분의 여백에 쓰면서 책 읽는 재미를 생각했다. 특히 이 책처럼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는 책을 읽을 때는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마치 한여름 햇빛에 그을려 벌겋던 피부가 시간이 지나 가장자리가 살짝 돌돌 말리기 시작할 때, 그 가장자리를 잡아 아주 신중하게 살살 잡아당기면 벗겨지는 얇은 껍질처럼, 그런 일이 있었던 것조차 까마득히 잊었던 어린 시절의 일들이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어린 나가 다른 차원에서 여전히 시공을 차지하고 살아있는 듯 생생해지기도 했다.

 

168 후후,‘엄창석이라고 날인되어있는 삽화를 발견했다. 주인공 소년이 할머니를 따라 교회 종탑에 올라가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교회종탑을 중심으로 집들이 줄지어 있는 스케치이다. 지난번에 작가의 소설 체벌법으로 쓴 감상문에서 나는 어쩌면 작가가 그림을 공부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을 제기했었다. 장편소설 책의 삽화로 작가 본인의 스케치를 넣을 정도라면, 분명히 작가는 정식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본다. 아무튼 반가웠다.

종탑 꼭대기에서 할머니는 헌금으로 아이스케키를 사먹는 주인공에게 할아버지가 종탑을 세울 때 인부가 다리를 다친 날 집에 계신 늙은 어머니의 눈이 밝아졌다고 말씀하시면서 종탑의 스피커 두 개가 하느님의 눈이라고 했다. 주인공은 눈보다 귀처럼 생겼다는 게 훨씬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읽으면서 어린 아이의 보이는 대로 보는 그 시선이 소리 내어 웃게 만들었는데, 이 부분에서도 그랬다.

 

169~170 “...시선이란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그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수원 아줌마가 채송화 밭에 앉아 방긋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이 이상한 것은 아무리 기울어도 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나는 수원 아줌마의 사진을 최씨방에서 보는 순간, 최씨가 수원 아줌마 집에서 얻어온 것은 지켜보는 눈이다, 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사진 속에 있는 사람의 시선이 신기했던 적이 있었다. 사진과 거의 같은 비슷한 각도에서 봐도 사진 속의 시선이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참 요상했었다. 하늘의 달도 그랬다. 달밤에 십리나 떨어져 있는 친구 동네서 놀다오는 길을 밝혀주던 달은 줄곧 나를 따라와서 위안이 된 적이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금색 발톱
엄창석 지음 / 민음사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황금색 발톱1,2부로 나뉘져 있다. 1부는 후기 자본주의의 서설이고, 2부는 푸른 방, 소녀이다. 첫페이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에로티시즘은 모두의 교차로이다-조르주 바타이유라고 짧은 부제가 붙여져 있다. 이어 색칠하는 여자가 시작된다.

 

21 전 그때 성기 안에 엄첨난 권력이 숨어 있다는 걸 알았어요.”

 

27 “...내가 더 이상 일관된 침묵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은 지난 4월 달의 화보에서였다. 성기의 직접적인 변형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모니카 같은 아름다운 은유는 이미 아니었고, 속이 일그러지거나 부식된 하모니카처럼 절망스런 상징도 아니었다. 독사의 아가리 모양으로 탐욕스럽게 벌어진 허공, 난잡한 섹스 뒤에 흘러내린 (사진의 설명) 검붉은 자궁子宮 따위가 성기의 본 모습인 양 조작되고 있었다.”

 

38 “...무역센터에서 내려다보는 시가지 정경에 손이 멎었다. 한 장 가득 들어차 있는 빌딩군. 빌딩들이 껍질을 벗기 시작하고, 콘크리트들이 녹아내린다. 창문과 층들의 경계가 사라지자 빌딩은 짐승들의 거대한 성기로 변한다. 한 장 가득 들어차 있는 짐승들의 성기들. 맨 뒷장의 화보는 난지도 같은 쓰레기 더미를 찍은 사진이었다. 부서진 텔레비전. 깡통, 깨진 주전자. 날개 찢어진 잠자리...... 잡초들가지 뒤섞여 있는 온갖 쓰레기 틈 사이에 언젠가 보았던 뱀이 똬릴 틀고 있고, 흘러내린 자궁이 살바드로 달리의 휘어진 시계 위에 걸려 있었다.”

 

 

 

<황금색 발톱>

 

  두 번 째 작품이 표제인 황금색 발톱이다. 글 속 화자인 가 오촌 아저씨의 아들인 김필릉 씨가 지구의 자전自傳을 보았다고 알려온 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50 “...이상스런 열정과 몰두가 그의 관습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였다. 책 찾기가 열흘을 넘기면서 그는 사회적인 규율을 흐리게 하였다. 책 찾기가 열흘을 넘기면서 그는 사회적인 규율을 팽개칠 수밖에 없었다. 규율에 얽매여서는 <발견>의 눈을 가질 수 없을 거라는 암시를 받았던 것이다.”

 

51 <세계 괴기담 모음집>이라고 씌인 책 111쪽의 글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짐승이로다. 늙은 코끼리의 복부이듯 주름진 가죽 위로 짧은 털이 송송 돋아 있고 구름처럼 느릿느릿 움직였으되 실상은 엄청난 빠르기였다. 내가 기거하는 동굴 앞에서 그 짐승을 본 것은 알라께 찬미할 때였으니...... . , 무서워라 육지 위로 올라선 바다의 모습이라. 이랑이 이랑을 삼키고 포세이돈의 성남에 거칠 것이 없도다......>

 

 

---> 위에 인용된 글은 아부 디야르의 글이라고 소개돼 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아부 디야르라는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잘랄 알딘 루미와 동시대 사람이라고 나와 있다. 나는 한 때 루미 시인의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를 좋아해서 동아리 카페에 올리기도 하고, 그의 책을 사보기도 해서 루미가 이슬람 신비주의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부 디야르를 두고 놀라운 비범성에는 자신이 못 미친다.’고 루미가 실토했다는 내용이 책 속에 있었다. 루미 시인이 인정한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아부 디야르가 젊은 시절 어느 날 갑자기 사막에 얼굴을 박고 죽었는데, 폐부 속에 (목 안에) 모래가 잔뜩 들어가 있었다고 하니, 기이한 질식사를 한 셈이지.”라고 김필릉의 친구가 통화로 알려주었다. 황금색 발톱작품 속의 거대 짐승의 이야기는 신비롭지만 두렵기도 한 이야기였다.

 

 

 

<육체의 기원>

 

  세 번째 작품은 소설기계라는 이름의 글이고, 네 번째가 육체의 기원이다. 이 이야기 속에도 신비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야기 속 한 인물이 배꼽이 자라는데, 그 자라는 배꼽을 자르는 수술을 하다가 죽는다는 내용이다.

 

104 “...욕망이 기관을 만들어낸다.”

 

106~107 “...궁금증이란 가장 세련된 포장지인 것이다...오히려 가장 뛰어난 진리일수록 모순의 틈바구니 속에서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가.”

 

120 “...하하, 제가 보기에 이 글은 전체적으로 일종의 은유인 듯합니다. 격심한 노동에 시달리는 노예들의 배에서 배꼽이 자란다. 그들은 지난 수십 년간 몸을 웅크리고 거북이 옷 속에서 잠을 잤고, 줄곧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다 보니 정말 태아가 된 듯 배꼽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런 얘기지요...... 육체가 심한 고통을 받은 끝에 급격한 퇴행이 이뤄졌다는 뜻인지, 일종의 자기 생존 방식을 뜻하는지는 확실치 않군요......하지만 배꼽을 통해 살려달라고 손을 내미는 장면은 눈에 선한데요. 견딜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이 확연히 전달되잖아요. 좋은 은유란 그 글을 스치기만 해도 은유 자체가 더 활동을 하지요.”

 

 

126 “...혹시, 그 분 자신이 은유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고 여긴 것은 아닐까요? 은유처럼 보였던 옛 글 속에 자신을 밀어 넣는 쪽이, 그러니까 차라리 자신을 은유화시켜 버리는 쪽이, 현실을 피하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여겼던 것은 아닐는지요.”

 

 

--->은유란 그 글을 스치기만 해도 은유 자체가 더 활동을 한다는 것과 은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은유에 대한 해석, 이런 장면이야말로 글을 읽는 재미를 알게 해주는 요소들이라고 생각한다.

 

   

  

<남쪽 원숭이>

 

  다음 작품 합창<빨간 염소들의 거리>에 나오는 부분이기도 했다.

  여섯 번째 작품은 남쪽 원숭이이는 화자의 사촌형인 모창가수의 이야기이다.

 

174 “...농담의 살상력을 아시오. 농담이 사회현상이 될 때 그것은 흉기로 변하는 거요. 농담은 원래가 실체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데서 발생하기 때문에 흉기와 다름없다 이 말요...실체를 살해하는 게 농담이지만 농담의 살해는 진담이 아니어, 재생산된 또 다른 농담이지요. 연쇄적인 농담을 강요하는 것이 그 흉기의 본질이란 말요. 아시겠소? 댁의 형님은 바로 그 흉기(농담)의 칼날 위에 서 있기에 그래서 불쌍하우.”

 

177 “...그 생명이고 이데아라는 것이 사람들에겐 한낱 농담에 불과하다고 말하면 형은 무어라 대답할 것인가.”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농담이라는 제목으로 아예 책을 쓰기도 했다. ‘농담이 살해하는 것은 진담이 아니라 재생산된 또 다른 농담이라는 역설 같은 진술이 책을 덮고도 여운이 남았다.

 

2부에는 푸른 방에는 기린이 산다소녀, 항구에 닿다두 편이 있다. 마지막에 나오는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2부의 두 단편은 본 주제와 관련이 없는 소품들이다. 나로서는 이런 소품들을 쓸 때가 가장 즐겁다.”고 말한다. ‘가장 즐겁다는 그 이유가 무척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혹의 형식 책세상 작가선 6
엄창석 지음 / 책세상 / 2003년 1월
평점 :
절판


 

 

  ≪유혹의 형식은 주인공 가 소설 속 소설가 J씨와 시점에 관한 소설작법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고도 되어 있듯이 시점이 혼재돼 있다. ‘삼인칭 시점 속에서 일인칭 화자를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주인공 ‘‘일인칭 개입 삼인칭 소설이라는 생소한 명칭을 붙이고 있다.’ 소설은 여자가 첫 등장인물로 시작되었다가 가 나와 이야기를 진행시키다가곽정이라는 인물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리고 다시 가 곽정의 삶속에 등장하게 된다. 책의 뒷부분에 작가의 인터뷰 내용도 실려 있다.

 

 

15 “...사람은 누구나 겉으로 종사하는 부분과 자기 일생의 무게가 쏠려 있는 곳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타인의 삶은 피상적이고 거짓이며, 우울하다. 근원적인 욕망은 따로 뿌리를 내린다...애초의 신성한 단순성이 깨지는 상태를 곧 유혹이라 하고, 유혹의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이 인류의 역사라고 했다. 야나키타의 저서는 그 같은 개념으로 역사적 사실을 진술해나갔다. 이를테면 시간과 싸우기 위해 문자를 발견하고 흐르는 공간을 잡아두기 위해 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 책 제목에도 들어있는 유혹은 야나키타라는 일본인의 책제목 유혹의 옹호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애초의 신성한 단순성이 깨지는 상태를 곧 유혹이라 하고, 유혹의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이 인류의 역사라고 했다.’는 부분에 연필로 밑줄을 긋고 책을 덮었다. 걷잡을 수 없는 생각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가 그러한가, 내 삶 또한 그런가, 신성한 단순성은 어디쯤에서 깨어진 것일까, 뭐 이런 생각들이었다.

 

  이 책은 줄거리며 책 속 문장을 짚기보다 뒷부분의 인터뷰 내용에서 작가의 생각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작가는 곽홍란(문화예술 MC)유혹 앞에 서 있는 인간이라는 제목의 인터뷰를 가졌다.

 

181 “...앞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다양한 문체를 가지게 된 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저는 문체라는 것은 작가의 특성이라기보다 개별 작품의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182“...독자에 따라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제가 사실 가장 소망하는 것은 시적인 감각이 가득 배어 있는 문체입니다.

 

---> 나는 시적인 감각이 가득 배어 있는 문체의 대표적인 국내 소설이 조세희의 ··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 중에 문장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었다고 작가도 말하고 있다. 조금 건방진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나 역시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어쩌면 그래서 엄작가의 작품들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189 “...‘화살과 구도라는 말은 어떤 구도 속에 화살이 날아들었다는 뜻이죠. 말하자면 구도는 현 세상의 정황을 가리키는 것이고, ‘화살은 어떤 이상을 상징하는 것이죠. 구도하는 것은 세상을 작가로서 객관적으로 살펴보겠다는 의도이고, 화살은 저의 시적, 문학적 공격성을 뜻합니다.

 

--->옥타비오 파스의 활과 리라를 읽으면서 왜 책 제목이 활과 리라일까를 계속 생각했었다. 화살과 구도에 대한 작가의 말에서 다시 활과 리라를 펴서 읽다가 그만, 계속 읽게 되었다.

 

190 저는 문학이라는 것을 발견이라는 말로 종종 대치합니다. 성찰이나 고백에 대해서는 그리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저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작품을 쓸 때는 늘 여행하는 기분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살펴가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끼는 편이죠.”

    

210 “...저는 이 작품을 쓰면서 야릇한 두 가지 경험을 했습니다. 작품을 쓰면서 제가 당한 여러 난관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난관을 해결하는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205 “...작가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작품이 일기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죠. 작가는 인물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인물이 다 말을 했기 때문이죠.”

 

--->우습게도, 전업 작가도 아닌 나 역시 혼자 이런 저런 글을 쓰면서 연초에 장만한 일기장을 거의 펼치지 않게 되었다. 글을 읽거나 쓰다가 퍼뜩 생각나는 내 일상을 노트북 한글에 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주로 이전에 쓰다만 글을 다시 읽으며 수정을 하거나, 구상중인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 글은 내가 쓰지만 글 속에서 인물이 어떤 삶을 살지 나 자신도 궁금해지는 일이 소설을 쓰는 일이 아닐까.

 

207“...제가 조금 전에 작품을 쓰는 것은 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고 그랬죠. 우리는 한 여행지에 있는 동안 다음 여행지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작품을 진행할 때 그 자체로서 작품에 몰두하지만, 그 시간은 다른 곳을 찾아가고 싶은 욕망이 깃드는 시간이기도 하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빨간 염소들의 거리
엄창석 지음 / 민음사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작가에게 꽂히면 몰아읽는 독서습관으로 엄창석 작가의 작품을 연달아 읽었다. 이번 책은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책 뒤쪽 '작가의 말'에서

 

"오랫동안 10대의 이야기를 쓰는 것을 주저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쯤으로 요약된다. 많은 이들에게 그렇듯이, 내 삶의 근거도 죄다 10대에 쏠려 있어 그것을 도려내면 마치 허물만 남은 매미나 뱀처럼 나 자신이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들어서였다."

 

라고 밝히고 있다.

 화가들이 평생에 걸쳐 자화상을 그리듯이 작가들 역시 글 쓰는 내내 유년의 기억을 놓을 수 없지 않을까.

 

8 “...나는 지금껏 이보다 더 아름답고 비밀을 간직한 건물을 본 적이 없다.

 

         거대한 사각 병을 거꾸로 세워 놓은 것 같은 측우소는 겉면이 주황색 타일로 되어 있어 햇살을 받으며 무지개빛 반사광을 뿜었다.”

 

9 “...본관 앞, 10여 미터 높이의 쇠기둥 끝에도 풍속계가 까마귀처럼 앉아 날개를 파닥였다.”

 

35 “...예술가들이란 대상으로부터 다른 무엇을 해석해 내는 눈을 가진 부류란 것을. 평범한 바다에서 펄떡거리는 비범한 고기를 낚아 올리는 족이란 것을.”

 

41 “...누군가 등불을 켜서 내 얼굴에 들이밀 듯이 이마가 환하고 따스한 느낌이었다...대해 놀라워하고 존경스러움을 인정하는 낯선 감각이 내게서 움텄던 것이다.”

 

79 “...추상抽象이란 어떤 사물에서 상, 즉 이미지만을 뽑아낸다는 뜻이야.”

 

94 “...한쪽 동공을 잃은 미켈란젤로가 구슬프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136 “...얼굴 위로 난폭하게 뿌려진 발자국은 거칠게 그린 예수의 모습을 더 참혹하게 만들어서, 이상스러운 감흥조차 일었다. 분명히 신성모독이었다. 하지만 이런 유의 신성모독에서 받게 되는 분노가 기묘하게도 도리어 신성한 것처럼 와 닿았다. 그러니까 짓밟힌 예수의 얼굴이 신성을 모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모습 자체로 신성함이 드러나는 이상한 역전을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137 “...하지만 진리는 패배한 곳에서 움터. 이기는 것만 좇는 모든 역사의 강물에서, 그 가장자리에 일어나는 일종의 작은 역류逆流 같은 존재가 진리야.

 

 

139 “...진정한 질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한테 하는 거야...질문을 하게 되면 생각이 열려. 마치 머리에 물을 주는 것처럼 사고가 활발해지지. 그러면 상식적인 도덕이나 믿음도, 분명해 보였던 이념도 다시 생각하게 돼. 흔들리고 균열이 생긴단 말이다...답이 꼭 중요하진 않아. 질문을 통해서 인간은 살아가는 거란다...질문이 끝나면 그때부터 인간은 늙는 거란다. 10대부터 늙은 애가 있고, 스물이나 서른이 되어서 늙는 사람도 있어. 어떤 사람은 아흔 살이 되어도 여전히 젊어. 질문을 그치지 않기 때문이지.”

 

--->살아오면서, 나이가 들면서 종종 하게 되는 말이 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는 사람, 반성하지 못하는 사람하고는 결코 친해질 수가 없다고. 부모 형제라도 마찬가지라고. 특히 자기 확신에 차서 무조건 가르치려고만 드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기분일 때도 있다. 그런 사람이 질문이 끝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260인생은 나이가 듦에 따라 도약하거나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순서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10대의 어느 시기에, 순식간에 몸의 세포가 증식할 때, 단 한 번 세계의 심연과 만나다. 일생을 거쳐 찾아오지 않을 아주 특별한 경이를 체험하는 것이다...그러니 순서를 눈여겨볼 필요는 없다. 다만 꽃봉오리처럼 영롱한 시기를 통화하고 나면 누구나 평범해진다.”

 

263 주인공이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교목에게서 들은 모의 해전 이야기 부분

“...용맹은 육체에서 나오는 것이고 용기는 정신에서 나오는 거야.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용맹한 거라면 모의 해전의 노예는 용기인 거지. 용기는 힘이 강하고 약하고가 아니야. 정신의 부분이야. 자기 영혼의 소리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지. 인간의 자아自我는 그런 용기에 의해서 지켜지는 것이래.”

 

282“...사실을 말하자면 사춘기가 내게서 지나간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사춘기는 그 같은 독특한 번역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마주치는 남자와 여자로부터, 집과 거리와, 계절마다 바뀌는 나무들로부터 지독한 향기를 들이마시며, 그것은 자신의 경험처럼 내면에서 진동한다. 해서 영혼은 언제나 가파른 벼랑 앞에 선 듯 예민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늘 천장
엄창석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집에는 총 6편의 단편과 중편이 한편 들어있었다. 단편마다 소재가 특이했고, 밀도 높은 문장 하나하나가 작가의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한 번에 다 읽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아껴 먹듯이 조금씩 야금야금 읽었다. 소설을 읽으며 이십 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작가에 대한 궁금증과 내 소설작업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강한 바람도 생겼다.

 

<몸의 예술가>

     

첫 번째 나오는 소설이 몸의 예술가였다.

 

11“...나는 언제부터인지 다리에 대해 사뭇 매혹 어린 감정을 품어왔다. 물 위로 걷고 싶은 유혹과 공중을 떠돌고 싶은 인간의 꿈이 어울려 만나는 곳이 다리가 아닐는가.”

 

16 “...기이한 느낌이라는 것은 단식광대를 떠올리는 기억의 방식이 그러하다는 뜻이었다. 마치 나무가 이야기를 한다거나 사람 머리에 뿔이 달렸다는 식의 옛 동화를 현실에서 만나듯이, 혹은 현실에서 목격한 것이 이미 오래전에 부정돼버린 과거와 연결되는 듯했다. 기억의 통로 어디쯤인가가 몹시 비틀려 있는 느낌이었다.”

 

17 “...머릿속에 물컹대는 듯한 어떤 기억의 덩어리가 있었다.”

 

19 “...사람이 바싹 마른 오동나무처럼 변한다고 생각해봐. 부러질 듯 팥죽지가 댈랑거리고 눈은 옹이처럼 옴푹 파였단다.”

 

22~32“...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프란츠가 신의 질서를 거역했다는 주장이야...그러니까 먹고 생명을 이어가라는 창조적 본성에 역행했다는 거야...말하자면 집요한 전체성에 억눌린 사람들은 차라리 자신의 몸뚱아리가 소멸되었으면 하는 절망적인 소망을 품게 된 거야...신은 자신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로 인간을 만들었지 않습니까. 신의 거울이 인간인 셈이죠. 그라쿠스는 인간의 모습을 바꾸어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신의 형상을 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 이 부분에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대심문관편이 떠올랐다. 단편소설에서 이 정도의 울림을 받게 된 것은 내게 있어 참으로 놀라웠다.

 

 <고양이가 들어있는 거울>

 

두 번째 소설은 고양이가 들어 있는 거울이다.

 

55 “...미제사건들은 실제로 미궁의 특징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었다. 머리가 소인 괴물이 숨어 있었다는 고대 그리스의 미궁과 흡사했다. 끝없이 긴 금실을 가진 자가 아니면 살아나올 수 없다는 미궁은 몇 가지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사람의 접근을 손쉽게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허성不許性이 있고 들어온 사람을 포박하는 감금의 성격, 그리고 끝없이 반복되는 회랑으로부터 불사성不死性을 읽는다. 완전범죄가 된 사건들도 그러했다. 수사의 접근이 여의치 않았고, 추적하는 단서가 빗나간 궤적인 듯한데도 왠지 포기할 수 없으며 새로운 추적은 이미 지나쳤던 추적의 다른 형태를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 작가의 글 속에 자주 나오는 소재 중 하나가 거울이 아닐까. 여러 작품 속에 거울이 나온다. 작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의도된 것일까. 이상의 시 거울을 떠올랐다. “나는 지금 거울을 안가졌소마는 거울속에는 늘 거울속의 내가 있소 잘은 모르지만 외로된 사업에 골몰할게요

 

60~61“...김위승의 원고는 하나의 정황이 분열을 일으키는 (따라서 한 명의 진범이 여럿으로 나타나는) 원인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 원인으로 환영이나 착오, 시선의 굴절, 시간의 문제를 거론했다...환영과 굴절,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사건의 경로를 낱낱이 도식화해나갔는데, 그것을 미궁의 지도 그리기라고 지칭했다...‘인간은 가장 완벽한 미궁을 자기 내부에 쌓는다’...요컨대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 중의 하나가 거짓말이었다는 거지.”

 

62 “...우가 말하는 거짓말의 개념은 속인다는 것과 궤가 다르며, 오히려 어떤 명분을 가진 내부의 활동이란 뜻이었다. ”

이런 거짓말은 자기 존재의 형질을 변형시키는 연금술 같은 거야. 가장 완벽한 거짓말이고, 이를테면 스스로 범인이 아닌 거지. 따라서 완전범죄는 범인을 못 찾는 것이 아니라 범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75“...우태희가 말했던, 벽 안에 숨은 검은 고양이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검은 고양이로부터 마경魔鏡이란 걸 떠올린 것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거울 속면에 음각을 해놓아 들여다볼 때는 비치지 않으나 빛을 반사하면 그 상이 나타난다는 신비한 고대 거울 마경을 . 벽은 인간 존재이고 벽 속에 있는 고양이는 존재의 미궁 속에 숨은 범인을 가리키지 않은가. 그렇다면 검은 고양이가 들어 있는 그 벽의 표면이 바로 인간 존재의 비밀스런 거울이고 마경이 되는 셈이었다.”

 

<비늘천장>

 

세 번째 소설은 표제인 비늘천장이다.

 

81 “...비탈, 은비녀, 제비꽃 등등을 다시 하나씩 입에 물었다 뱉어본다. 사물은 나는 말속에 도사리고 있는 자를 집는다. 사물은를 품고 있고 가 섞여 사물은 지탱되고 있다. 많은 자획이 모이고 흩어지는 가운데 는 끝없는 말의 대해大海를 유랑하고 있다.”

 

96~97 “...남들은 글을 새기는 데 집중하면 뜻이 지워진다는데 나는 뜻이 그려져야 글 파기가 되었으니까요...활자는 책의 안만 아니라 책의 밖으로도 끝없이 유랑을 한답니다.”

 

98 “...비늘은 겨울 나뭇가지의 순에서芽鱗, 날개 달린 곤충의 배에서腹鱗, 그리고 용의 턱밑逆鱗과 날렵한 문장鱗文에서도 존재한다. 심지어 관아의 토지대장에까지魚鱗圖. 전혀 다른 사물 속에 하나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이 경이롭지 않느냐고 복인춘은 다리에 팔을 얹고 속살거렸다. 모든 사물은 따로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움직이는 활자가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107 “...활자로써 세상을 열어가는 것이 아니라 활자를 가지고 세상의 입을 틀어박는 데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본 걸세...활자가 무한으로 조합되었던 게 아니라, 허용된 안쪽으로만 조립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도리깨처럼 이마를 후려쳤어.”

 

110 “...빈 장죽을 빠느라 주름이 볼에 배꼽처럼 몰려들다 지워졌다.”

 

--->사실 비늘천장은 매 쪽마다 줄을 치고 싶은 부분이 있을 정도로 울림을 주는 글이었다. 다만생생자 30만자에 대해서는 인터넷으로 몇 번이나 찾아보았지만 끝가지 명확하게 머릿속에 정리되지가 않았다. 다만 그 일이 각자刻者에게 있어서 대단한 일인 것만으로도 소설을 읽는 데는 충분하지 않나 싶다.

 

<해시계>

네 번째 소설은 해시계이다.

 

125 “...종아리를 빠져나온 그의 그림자가 내 곁으로 다가서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선착장을 가로질렀다.”

 

147 “...꿈에서는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실제적인 특성을 지운다. 사람, 구름, 시간, 꽃 같은 것이 자신의 개별적인 특성을 지우고 하나의 추상으로 남아서 서로 교섭한다.”

 

<쉰 네 가지의 얼굴>

 

다섯 번째 소설은 쉰 네 가지의 얼굴이다.

 

165 “...김을룡은, 눈이란 어떤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170 “...그는 변장할 때마다 재바른 도망자가 되어 있기보다 또 한 사람의 인격으로 나뉘는 자신을 느꼈다.”

 

177 “...어떤 삶이든 하나의 말로써 드러낼 수 있는 삶은 없는 것이다.”

      

************** 

  나머지 글에도 책장을 넘기다 보면 밑줄 친 부분들이 곳곳에 있다. 참으로 맛나게 읽은 소설집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