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늘 천장
엄창석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집에는 총 6편의 단편과 중편이 한편 들어있었다. 단편마다 소재가 특이했고, 밀도 높은 문장 하나하나가 작가의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한 번에 다 읽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아껴 먹듯이 조금씩 야금야금 읽었다. 소설을 읽으며 이십 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작가에 대한 궁금증과 내 소설작업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강한 바람도 생겼다.

 

<몸의 예술가>

     

첫 번째 나오는 소설이 몸의 예술가였다.

 

11“...나는 언제부터인지 다리에 대해 사뭇 매혹 어린 감정을 품어왔다. 물 위로 걷고 싶은 유혹과 공중을 떠돌고 싶은 인간의 꿈이 어울려 만나는 곳이 다리가 아닐는가.”

 

16 “...기이한 느낌이라는 것은 단식광대를 떠올리는 기억의 방식이 그러하다는 뜻이었다. 마치 나무가 이야기를 한다거나 사람 머리에 뿔이 달렸다는 식의 옛 동화를 현실에서 만나듯이, 혹은 현실에서 목격한 것이 이미 오래전에 부정돼버린 과거와 연결되는 듯했다. 기억의 통로 어디쯤인가가 몹시 비틀려 있는 느낌이었다.”

 

17 “...머릿속에 물컹대는 듯한 어떤 기억의 덩어리가 있었다.”

 

19 “...사람이 바싹 마른 오동나무처럼 변한다고 생각해봐. 부러질 듯 팥죽지가 댈랑거리고 눈은 옹이처럼 옴푹 파였단다.”

 

22~32“...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프란츠가 신의 질서를 거역했다는 주장이야...그러니까 먹고 생명을 이어가라는 창조적 본성에 역행했다는 거야...말하자면 집요한 전체성에 억눌린 사람들은 차라리 자신의 몸뚱아리가 소멸되었으면 하는 절망적인 소망을 품게 된 거야...신은 자신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로 인간을 만들었지 않습니까. 신의 거울이 인간인 셈이죠. 그라쿠스는 인간의 모습을 바꾸어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신의 형상을 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 이 부분에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대심문관편이 떠올랐다. 단편소설에서 이 정도의 울림을 받게 된 것은 내게 있어 참으로 놀라웠다.

 

 <고양이가 들어있는 거울>

 

두 번째 소설은 고양이가 들어 있는 거울이다.

 

55 “...미제사건들은 실제로 미궁의 특징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었다. 머리가 소인 괴물이 숨어 있었다는 고대 그리스의 미궁과 흡사했다. 끝없이 긴 금실을 가진 자가 아니면 살아나올 수 없다는 미궁은 몇 가지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사람의 접근을 손쉽게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허성不許性이 있고 들어온 사람을 포박하는 감금의 성격, 그리고 끝없이 반복되는 회랑으로부터 불사성不死性을 읽는다. 완전범죄가 된 사건들도 그러했다. 수사의 접근이 여의치 않았고, 추적하는 단서가 빗나간 궤적인 듯한데도 왠지 포기할 수 없으며 새로운 추적은 이미 지나쳤던 추적의 다른 형태를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 작가의 글 속에 자주 나오는 소재 중 하나가 거울이 아닐까. 여러 작품 속에 거울이 나온다. 작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의도된 것일까. 이상의 시 거울을 떠올랐다. “나는 지금 거울을 안가졌소마는 거울속에는 늘 거울속의 내가 있소 잘은 모르지만 외로된 사업에 골몰할게요

 

60~61“...김위승의 원고는 하나의 정황이 분열을 일으키는 (따라서 한 명의 진범이 여럿으로 나타나는) 원인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 원인으로 환영이나 착오, 시선의 굴절, 시간의 문제를 거론했다...환영과 굴절,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사건의 경로를 낱낱이 도식화해나갔는데, 그것을 미궁의 지도 그리기라고 지칭했다...‘인간은 가장 완벽한 미궁을 자기 내부에 쌓는다’...요컨대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 중의 하나가 거짓말이었다는 거지.”

 

62 “...우가 말하는 거짓말의 개념은 속인다는 것과 궤가 다르며, 오히려 어떤 명분을 가진 내부의 활동이란 뜻이었다. ”

이런 거짓말은 자기 존재의 형질을 변형시키는 연금술 같은 거야. 가장 완벽한 거짓말이고, 이를테면 스스로 범인이 아닌 거지. 따라서 완전범죄는 범인을 못 찾는 것이 아니라 범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75“...우태희가 말했던, 벽 안에 숨은 검은 고양이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검은 고양이로부터 마경魔鏡이란 걸 떠올린 것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거울 속면에 음각을 해놓아 들여다볼 때는 비치지 않으나 빛을 반사하면 그 상이 나타난다는 신비한 고대 거울 마경을 . 벽은 인간 존재이고 벽 속에 있는 고양이는 존재의 미궁 속에 숨은 범인을 가리키지 않은가. 그렇다면 검은 고양이가 들어 있는 그 벽의 표면이 바로 인간 존재의 비밀스런 거울이고 마경이 되는 셈이었다.”

 

<비늘천장>

 

세 번째 소설은 표제인 비늘천장이다.

 

81 “...비탈, 은비녀, 제비꽃 등등을 다시 하나씩 입에 물었다 뱉어본다. 사물은 나는 말속에 도사리고 있는 자를 집는다. 사물은를 품고 있고 가 섞여 사물은 지탱되고 있다. 많은 자획이 모이고 흩어지는 가운데 는 끝없는 말의 대해大海를 유랑하고 있다.”

 

96~97 “...남들은 글을 새기는 데 집중하면 뜻이 지워진다는데 나는 뜻이 그려져야 글 파기가 되었으니까요...활자는 책의 안만 아니라 책의 밖으로도 끝없이 유랑을 한답니다.”

 

98 “...비늘은 겨울 나뭇가지의 순에서芽鱗, 날개 달린 곤충의 배에서腹鱗, 그리고 용의 턱밑逆鱗과 날렵한 문장鱗文에서도 존재한다. 심지어 관아의 토지대장에까지魚鱗圖. 전혀 다른 사물 속에 하나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이 경이롭지 않느냐고 복인춘은 다리에 팔을 얹고 속살거렸다. 모든 사물은 따로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움직이는 활자가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107 “...활자로써 세상을 열어가는 것이 아니라 활자를 가지고 세상의 입을 틀어박는 데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본 걸세...활자가 무한으로 조합되었던 게 아니라, 허용된 안쪽으로만 조립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도리깨처럼 이마를 후려쳤어.”

 

110 “...빈 장죽을 빠느라 주름이 볼에 배꼽처럼 몰려들다 지워졌다.”

 

--->사실 비늘천장은 매 쪽마다 줄을 치고 싶은 부분이 있을 정도로 울림을 주는 글이었다. 다만생생자 30만자에 대해서는 인터넷으로 몇 번이나 찾아보았지만 끝가지 명확하게 머릿속에 정리되지가 않았다. 다만 그 일이 각자刻者에게 있어서 대단한 일인 것만으로도 소설을 읽는 데는 충분하지 않나 싶다.

 

<해시계>

네 번째 소설은 해시계이다.

 

125 “...종아리를 빠져나온 그의 그림자가 내 곁으로 다가서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선착장을 가로질렀다.”

 

147 “...꿈에서는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실제적인 특성을 지운다. 사람, 구름, 시간, 꽃 같은 것이 자신의 개별적인 특성을 지우고 하나의 추상으로 남아서 서로 교섭한다.”

 

<쉰 네 가지의 얼굴>

 

다섯 번째 소설은 쉰 네 가지의 얼굴이다.

 

165 “...김을룡은, 눈이란 어떤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170 “...그는 변장할 때마다 재바른 도망자가 되어 있기보다 또 한 사람의 인격으로 나뉘는 자신을 느꼈다.”

 

177 “...어떤 삶이든 하나의 말로써 드러낼 수 있는 삶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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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머지 글에도 책장을 넘기다 보면 밑줄 친 부분들이 곳곳에 있다. 참으로 맛나게 읽은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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