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염소들의 거리
엄창석 지음 / 민음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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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작가에게 꽂히면 몰아읽는 독서습관으로 엄창석 작가의 작품을 연달아 읽었다. 이번 책은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책 뒤쪽 '작가의 말'에서

 

"오랫동안 10대의 이야기를 쓰는 것을 주저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쯤으로 요약된다. 많은 이들에게 그렇듯이, 내 삶의 근거도 죄다 10대에 쏠려 있어 그것을 도려내면 마치 허물만 남은 매미나 뱀처럼 나 자신이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들어서였다."

 

라고 밝히고 있다.

 화가들이 평생에 걸쳐 자화상을 그리듯이 작가들 역시 글 쓰는 내내 유년의 기억을 놓을 수 없지 않을까.

 

8 “...나는 지금껏 이보다 더 아름답고 비밀을 간직한 건물을 본 적이 없다.

 

         거대한 사각 병을 거꾸로 세워 놓은 것 같은 측우소는 겉면이 주황색 타일로 되어 있어 햇살을 받으며 무지개빛 반사광을 뿜었다.”

 

9 “...본관 앞, 10여 미터 높이의 쇠기둥 끝에도 풍속계가 까마귀처럼 앉아 날개를 파닥였다.”

 

35 “...예술가들이란 대상으로부터 다른 무엇을 해석해 내는 눈을 가진 부류란 것을. 평범한 바다에서 펄떡거리는 비범한 고기를 낚아 올리는 족이란 것을.”

 

41 “...누군가 등불을 켜서 내 얼굴에 들이밀 듯이 이마가 환하고 따스한 느낌이었다...대해 놀라워하고 존경스러움을 인정하는 낯선 감각이 내게서 움텄던 것이다.”

 

79 “...추상抽象이란 어떤 사물에서 상, 즉 이미지만을 뽑아낸다는 뜻이야.”

 

94 “...한쪽 동공을 잃은 미켈란젤로가 구슬프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136 “...얼굴 위로 난폭하게 뿌려진 발자국은 거칠게 그린 예수의 모습을 더 참혹하게 만들어서, 이상스러운 감흥조차 일었다. 분명히 신성모독이었다. 하지만 이런 유의 신성모독에서 받게 되는 분노가 기묘하게도 도리어 신성한 것처럼 와 닿았다. 그러니까 짓밟힌 예수의 얼굴이 신성을 모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모습 자체로 신성함이 드러나는 이상한 역전을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137 “...하지만 진리는 패배한 곳에서 움터. 이기는 것만 좇는 모든 역사의 강물에서, 그 가장자리에 일어나는 일종의 작은 역류逆流 같은 존재가 진리야.

 

 

139 “...진정한 질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한테 하는 거야...질문을 하게 되면 생각이 열려. 마치 머리에 물을 주는 것처럼 사고가 활발해지지. 그러면 상식적인 도덕이나 믿음도, 분명해 보였던 이념도 다시 생각하게 돼. 흔들리고 균열이 생긴단 말이다...답이 꼭 중요하진 않아. 질문을 통해서 인간은 살아가는 거란다...질문이 끝나면 그때부터 인간은 늙는 거란다. 10대부터 늙은 애가 있고, 스물이나 서른이 되어서 늙는 사람도 있어. 어떤 사람은 아흔 살이 되어도 여전히 젊어. 질문을 그치지 않기 때문이지.”

 

--->살아오면서, 나이가 들면서 종종 하게 되는 말이 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는 사람, 반성하지 못하는 사람하고는 결코 친해질 수가 없다고. 부모 형제라도 마찬가지라고. 특히 자기 확신에 차서 무조건 가르치려고만 드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기분일 때도 있다. 그런 사람이 질문이 끝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260인생은 나이가 듦에 따라 도약하거나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순서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10대의 어느 시기에, 순식간에 몸의 세포가 증식할 때, 단 한 번 세계의 심연과 만나다. 일생을 거쳐 찾아오지 않을 아주 특별한 경이를 체험하는 것이다...그러니 순서를 눈여겨볼 필요는 없다. 다만 꽃봉오리처럼 영롱한 시기를 통화하고 나면 누구나 평범해진다.”

 

263 주인공이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교목에게서 들은 모의 해전 이야기 부분

“...용맹은 육체에서 나오는 것이고 용기는 정신에서 나오는 거야.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용맹한 거라면 모의 해전의 노예는 용기인 거지. 용기는 힘이 강하고 약하고가 아니야. 정신의 부분이야. 자기 영혼의 소리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지. 인간의 자아自我는 그런 용기에 의해서 지켜지는 것이래.”

 

282“...사실을 말하자면 사춘기가 내게서 지나간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사춘기는 그 같은 독특한 번역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마주치는 남자와 여자로부터, 집과 거리와, 계절마다 바뀌는 나무들로부터 지독한 향기를 들이마시며, 그것은 자신의 경험처럼 내면에서 진동한다. 해서 영혼은 언제나 가파른 벼랑 앞에 선 듯 예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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