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바다 위를 유영하던 비행기가 제주 공항 위에 떠서 착륙 준비를 할 때였다. 비행기 창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다가 그만 활주로가 있는 허허벌판에 반해버렸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망망대해와도 같은 벌판을 내가 한때 꿈꾸던 몽골의 초원과 다르지 않았다. 까무스러한 작은 점이 비행기와 가까와지자 활주로를 안내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원양어선의 항해사를 꿈꾸듯 활주로 안내인으로라도 활주로를 누비고 싶었다. '아, 활주로는 텅 빈 벌판이다.'

 

 제주 풍경의 결

 

 "사물(事物)을 보는 나의 눈은 나의 밖에 있는 사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동시에 본다."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언덕 또한 어마무지하게 좋아한다는 것을. 어쩌면 언덕을 좋아해서 이렇게 오름을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이 대단한 사실을 종달초등학교 가는 언덕길에서 알아낸 것이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다시 살아난 듯 들떴다. 양팔을 벌리고 활주로를 날아오르는 비행기가 되어 골목길을 달음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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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달초등학교 가는 길에서 만난 언덕

 

 

 "우리들이 모든 소유로부터 참으로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지막 소유, 즉 우리의 마지막 비밀은 간직되지 못한다. 그러나 참으로 떠나는 것은 두렵다. 몸이 떠난다고 해서, 늘 풍경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낯선 공간으로 이동하는 공포, 몸에 익은 공간으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자의 공포이다. 이 공포는, 말은 쉬우나 쉬 극복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공포는 아마도 정신적 공포가 아니라 몸의 공포일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두뇌가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공간이 사실은 우리들의 살 속에 새겨져 있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세계, 살이 담도 있는 공간을 우리는 떠나면서도 끌고 가기 쉽다."

 

 마을 중심도록 옆의 나무 뒤로 비스듬히 놓인 검은 안내석이 보였다. "옛날 종달리(終達理)는 유명한 소금 생산지로 알려졌다."로 시작해서 선조 때 육지에서 제염술을 익혀와 소금을 생산하고 90년대까지는 논농사를 짓다가 폐작되었다는 내용이다. 논이었던 곳은 누런 갈대가 수북하게 자라나 지나가는 겨울바람에 서걱거렸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달팽이 같은 데를 가지고 있다. 떠나면서도 항상 '저의 집'에 살고 있는 그 완만한 동작의 달팽이를 가만히 지켜본 일이 있는가? ...달팽이에게는 집이 따로 없다. 그의 일부가 그의 영원한 집이다. 그러나 우리들 몸이 기억하는 풍경은 저기 어느 곳에 따로 있고 그 풍경이 떠나 있는 우리들을 그곳으로 끌어당긴다...그러나 달팽이는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저의 집' 속에 살고 있고 어디를 가나 저의 고향, 저의 조국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집은 주소가 없다. 그래서 달팽이는 쉬 떠나지 못하는 붙박이, 겁 많은 여행자보다 유랑하는 유목민이나 집시나 남사당 같은 이들에게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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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에서의 둘째 날, 늦은 점심을 먹고 - 혼자 지내는 4박 5일 동안 주인집 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는 호강을 누렸다 - 민박집 골목을 나섰다. 최근에 명소가 된 집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새마을 운동 때 지은 집들처럼 빨강 파랑 지붕의 단층집들 사이사이에 다소 엉뚱하게 자리 잡은 도예품 가게, 카페, 게스트하우스, 술집, 서점...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먼저 도예품 가게에 들러 여행기간 동안 쓸 커피 잔과 소주잔을 눈으로 점찍어 놓고 가게를 나섰다.

 아직 영업전인 술집은 전날 밤 창 너머로 봤기에 사진으로 담았다. 발걸음을 옮겨 카페로 갔다. 밖에 세워진 메뉴판을 읽어보다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다른 곳'은 공간에 있어서의 미래이다. '다른 곳'과 '내일' 속에 담겨있는 특정할 길 없는 잠재력은 모든 젊은 가슴들을 뛰게 한다.

  떠난다, 문을 연다, 깨어 일어난다, 라는 동사(動詞)들 속에는 청춘이 지피는 불이 담겨있다."

 

 김화영은 알고 있었던 그 동사의 의미, 쉰 넷의 나 역시 청춘인걸까. 위의 동사들을 눈으로 읽는 순간 목구명이 꽉 막혔다. 비행기가 공중을 사광斜光처럼 날아오를 때, 내 눈시울이 뜨거웠던 것도 그래서였구나하고 깨닫는다.

 

민박집 1월 풍경

 

 "우리들이 참으로 '떠난다'는 일은 쉽지 않다.... '미지(未知)의 것', '다른 것', '다른 곳'이 감추고 있는 '새로윰'은 참으로 우리들의 모든 유익하였던 경험들을 무용(無用)하게 하는데 그것의 힘이 있다. 행복을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새로운 낙원을 향하여 떠나는 자는 사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 그 공포를 지불하는 순간에 진동시키는 놀라움을 향하여 떠나는 것이다."

 

구불구불한 제주 특유의 구멍 숭숭 돌담 골목길을 따라 걷다가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올라섰다. 지붕 선을 따라 눈길이 죽 가다가 멈춘 곳은 한라산이다. 십여 년 전 겨울에 왔을 때, 어디에서라고 제주 한가운데로 눈을 들면 정수리에 흰 눈을 쓴 한라산이 인심 좋은 할아버지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이 곳 종달리에서는 흐릿하게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덕을 내려와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골목길에서 양팔을 벌렸다. 소리치며 달리고 싶었지만 우적우적 웃음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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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한의 추위가 물러가고 겨울 속의 봄날이다.

 조종사의 솜씨인지 날씨 덕분인지 저가항공 비행기가 아주 날렵하게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맨 뒷좌석이라 크게 흔들릴 거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이륙 순간 멀미와 함께 왈칵 눈이 뜨겁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덤덤했다. 이럴 것 같으면 굳이 여행길에 오르지 말까싶은 정도였다. 눈물이라니...혼자 여행하기. 더 늙기 전에 해보고 싶었지만 채 늙기도 전에 마음을 접었던 일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한라산

 

 여행을 떠나기 전 가장 고민한 일 중 한가지는 무슨 책을 가져가는 가였다. 책장이 있는 방을 오가며 읽지 않은 책을 가져갈 것인가, 읽은 책 중에 고를 것인가를 먼저 결정하기로 했다. 딱 한 권이면 된다. 읽지 않은 책 두 세 권을 뒤적거렸으나 확 내키지가 않았다. 식탁에 앉아 읽은 책 중에서 다시 읽고 싶은 책을 머릿 속으로 검색했다. 뭐 대단한 다독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책을 읽어왔다. 가장 열독한 시기는 이십 대였다. 그리고 작년 한 해 동안 꽤 많은 책을 사기도 하고 읽기도 했다.

 내게는 책을 빌려 읽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긋기도 하고, 여백에 조각글을 써가며 읽는 버릇 때문이다. 가난한 이십 대에는 주로 문고판을 사서 읽었다. 책에 한 번 꽂히면 읽는 동안 밀교에 빠져들듯 미쳤고,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듯 책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읽은 책들은 굳이 두 번 읽을 이유가 없었다. 여태까지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영혼에 무늬로 새겼다고나 할까. 대부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만 읽다 중도에 포기한 책은 실연당한 것 마냥 두 번 다시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세 번 읽은 책으로 언뜻 떠오른 것은 알베르 까뮈의 <결혼/여름> 중 '결혼'과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였다. 릴케의 <로댕>도 떠올랐다. 다 접고 김화영의 <행복의 충격>을 흔쾌히 망설임 없이 여행 가방 옆에 챙겨놓았다. 얼마 전에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를 읽다가 책장 어디쯤에 있을 그 책을 찾았다. 1989년에 <책세상>에서 초판 1쇄 인쇄/발행된 책이다. 후루룩 넘겨보며 줄친 부분과 여백의 조각글만 찾아 읽다가 그만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아 책날개의 작가 소개 글, '저자의 말'까지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 펼쳐본 책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생소했다. 영혼에 무늬로 새겨져 있을 거라고 여겼던 내 생각에 일격을 가했다. 첫 편인 '지중해, 나의 사랑'을 읽으면서 연필을 들고 밑줄을 그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어야 할 판이다. 읽던 책을 마저 읽고 나서 날 잡아 정독하기로 하고 안방 책상 위에다 올려놨던 바로 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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