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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연금술사
엄창석 지음 / 민음사 / 2000년 5월
평점 :
주문한 ≪어린 연금술사≫가 도착한 날이 생각난다. 여행은 떠나기 전이 더 설레듯이 책도 주문하고 기다릴 때, 그리고 책 포장상자를 뜯을 때 기대된다.
140쪽 “...마당에 있던 미꾸라지도 구름을 타고 떨어진 것이 아니라, 꽃뱀도 연필심이 변해서 된 것이 아니라, 그건 우리 삶에 끼어든 틈입자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조개 속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다는 진주처럼 미꾸라지도 꽃뱀도 우주의 갈피 속에 숨어 있다가 홀연 내 앞에 나타난 것이리라.”
151쪽 “...그 다음날 새벽이었다. 나는 굴뚝에 올라 온 동네의 경치를 감상하였다. 지난 밤 눈이 내려 철도 부지 밭들과 길이 온통 하얗게 덮여 있었다. 탱자나무며 찔레, 동일네 집 뒤 왕대나무 잎에도 눈이 덮여 동트는 동네를 벅차게 빛내고 있었다. 눈은 들판에 누워, 아직 늦잠을 자는 아이들을 기다렸고, 목이 묶인 병도네 불독이 눈이 왔다는 신호를 온동네 개들에게 알리느라 킁킁 짖어대고 있었다. 집 밖으로 다니는 사람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소설 속 문장을 읽다가 어느 순간, 죽은 영혼이 죽은 자의 몸에서 빠져나오듯 내 어린 날 마을의 눈 내린 풍경에 대한 기억들이 읽고 있는 문장에서 일어났다. 밤새 소리 없이 내려 마당에 쌓였던 함박눈이 바람에 기척을 해서였는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아침, 방문을 열면 눈부신 바깥세상이 기적처럼 놓여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읽던 부분을 펴서 다시 읽다가 위와 같은 내용을 책 앞부분의 여백에 쓰면서 책 읽는 재미를 생각했다. 특히 이 책처럼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는 책을 읽을 때는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마치 한여름 햇빛에 그을려 벌겋던 피부가 시간이 지나 가장자리가 살짝 돌돌 말리기 시작할 때, 그 가장자리를 잡아 아주 신중하게 살살 잡아당기면 벗겨지는 얇은 껍질처럼, 그런 일이 있었던 것조차 까마득히 잊었던 어린 시절의 일들이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어린 나’가 다른 차원에서 여전히 시공을 차지하고 살아있는 듯 생생해지기도 했다.
168쪽 후후,‘엄창석’이라고 날인되어있는 삽화를 발견했다. 주인공 소년이 할머니를 따라 교회 종탑에 올라가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교회종탑을 중심으로 집들이 줄지어 있는 스케치이다. 지난번에 작가의 소설 ‘체벌법’으로 쓴 감상문에서 나는 어쩌면 작가가 그림을 공부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을 제기했었다. 장편소설 책의 삽화로 작가 본인의 스케치를 넣을 정도라면, 분명히 작가는 정식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본다. 아무튼 반가웠다.
종탑 꼭대기에서 할머니는 헌금으로 아이스케키를 사먹는 주인공에게 할아버지가 종탑을 세울 때 인부가 다리를 다친 날 집에 계신 늙은 어머니의 눈이 밝아졌다고 말씀하시면서 종탑의 스피커 두 개가 하느님의 눈이라고 했다. 주인공은 눈보다 귀처럼 생겼다는 게 훨씬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읽으면서 어린 아이의 보이는 대로 보는 그 시선이 소리 내어 웃게 만들었는데, 이 부분에서도 그랬다.
169쪽~170쪽 “...시선이란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그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수원 아줌마가 채송화 밭에 앉아 방긋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이 이상한 것은 아무리 기울어도 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나는 수원 아줌마의 사진을 최씨방에서 보는 순간, 최씨가 수원 아줌마 집에서 얻어온 것은 ‘지켜보는 눈’이다, 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사진 속에 있는 사람의 시선이 신기했던 적이 있었다. 사진과 거의 같은 비슷한 각도에서 봐도 사진 속의 시선이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참 요상했었다. 하늘의 달도 그랬다. 달밤에 십리나 떨어져 있는 친구 동네서 놀다오는 길을 밝혀주던 달은 줄곧 나를 따라와서 위안이 된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