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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평점 :
읽는 내내 어머니의 분투가 너무 안타까워 마음이 아팠다. 평생 틀렸다고 생각했던 문제를 자식의 입장에서 다를 뿐이라고 이해해달라고 할 때, 과연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단지 책에서 다룬 문제가 아닐지라도 서로 다른 세상을 겪는 어머니 세대와 자식 세대 간에 가치관의 차이는 끊임 없이 발생할텐데... 그때, 나는 이 어머니처럼 이해하려고 이렇게 애써 싸울 수 있을까?
이 책에는 자식들에게 일일이 말하지 못한 채, 어떻게든 이해하려는 어머니의 노력과 고민이 고스란히 글로 표현되어 있다. 젊은 작가가 어떻게 어머니의 마음을 이렇게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지 감탄이 나오는 책이다.
길지 않아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지만 한 문장 한 문장마다 담긴 생각거리가 많아 빠른 걸음으로 읽어내긴 어려웠다. 하지만 이해를 향한 어머니의 발걸음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뭉클했다. 결국 이 엄청난 이해의 발걸음을 내딛게 하는 건 사랑이구나.
어머니와 딸이. 어머니들끼리, 딸들끼리 읽어보면서 서로 이해의 장을 넓혀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가족 모두가 함께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 P22
언젠가부터 나는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천천히 시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뭐든 무리하게 바꾸려면 너무나 큰 수고로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걸 각오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좋은 나쁘든, 모든 게 내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선택했으므로 내 것이 된 것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과거나 미래 같은, 지금 있지도 않은 것들에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는 동안 허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그런 후회는 언제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의 몫일지도 모른다. - P30
내가 한 거라곤 연단이 올려다보이는 이곳에 앉아 남들이 엿들을지도 모를 말들을 가만히 손으로만 매만지면서 침묵을 키운 것뿐이다.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 할 수 없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 이제 나는 어떤 말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런 말을 도대체 누구에게 할 수 있을까. 누가 들어주기나 할까. 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말, 주인이 없는 말들. - P54
나는 좋은 사람이다. 평생을 그렇게 하려고 애써 왔다. 좋은 자식. 좋은 형제. 좋은 아내. 좋은 부모. 좋은 이웃. 그리고 오래전엔 좋은 선생님. 정말 힘들었겠구나. 나는 공감하는 사람.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 나는 응원하는 사람. 다 이해한다. 이해하고말고. 나는 헤아리는 사람. 아니. 어쩌면 겁을 먹은 사람.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 뛰어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 깊이 빠지려 하지 않는 사람. 나는 입은 옷을, 내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사람. 나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표정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 치는 사람. 여전히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 걸까? 그러나 지금 딸애에게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P69
그 애는 듣고만 있다. 그럼에도 노력해 보겠다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그런 헛된 기대를 심어 주고 싶진 않다. 여전히 내 안엔 아무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내가 있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은 내가 있고, 그걸 멀리서 지켜보는 내가 있고, 또 얼마나 많은 내가 끝이 나지 않은 싸움을 반복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일일이 다 설명할 자신도, 기운도, 용기도 없다. - P195
어쨌든 지금은 좀 자야 하니까. 자고 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또 얼마간 받아들일 기운이 나겠지.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 있는 지금이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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