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레데터: 죽음의 땅>을 봤다. 하루가 피곤했고, 강렬한 자극이 필요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돌려 영화관에 가서 당장 볼 수 있는 액션을 선택했다. 리뷰나 평점 따윈 보지도 않았다. 선택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날 강제로 구겨 넣고 두들겨 맞고 싶은 자학적 감정이었다. 몸은 눕히고 정신은 깨어나고 싶었다. 피곤하지만 몽롱하게 살아가는 삶이 싫었다.

액션은 생각 없이 보기 좋다지만, SF는 다르다. 다행히 SF가 주는 새로움이 있었다. SF나 판타지는 현실에서 떨어져서 현실을 은유해서 좋다. 이번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절대 멋진 비주얼이 아니다. 강함을 추구하는 종족에서 버림받은 열등 종. 자신을 증명받고 싶어 앞뒤 분간 없이 덤벼드는 조급함. 뭐 하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존재다. 그러나 그는 사랑받았다.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걸어줄 정도로.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에게 주어진 것도 비통과 분노다. 그는 온통 약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를 성장하도록 이끌어 주는 존재는 인간이 아닌, 인간에게 감정을 빌린 로봇이다. 로봇은 깊이 이해하기 위해 감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열등한 덱을 함께 싸우는 법을 자각하도록 이끈다. 형이 남겨준 강렬한 사랑의 감정은 덱이 자신의 약함에 잡아먹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형은 약한 덱이 살아남게 하려고 다르게 싸우는 법을 가르쳤다. 그가 약하지 않았다면, 형은 부족의 전통대로 힘으로 상대하는 법을 가르쳤을 것이다. 하지만 약해서 다른 법을 가르쳐야 했다. 다른 관점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개척해 주었다.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은 그는 태생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강력한 팀을 이룬다. 그리고 그 팀을 이끌 대장 늑대의 면모를 갖춘다.


나의 약점은 날 괴롭힌다. 극복해 보려고 열심히 싸우지만 좌절하기 일쑤다. 하지만 좌절하는 이유는 강함의 관점으로 날 평가하기 때문이다. 나의 약점을 인정하고 다른 관점으로 내가 살아가는 법, 나는 찾았을까? 아니, 찾고 있을까? 


영화관을 나오면서, 약함을 다룬 책들을 찾아보았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생각이 들 때마다 관련 책들을 찾아보면, 내가 머물던 세상이 참 작았음을 새삼 깨닫는다. 약함을 다룬 책들은 주로 종교 서적이었다. 일반 자기 계발서는 강점을 주로 다루었다. 현실은 프레데터의 세상처럼 약점을 외면하고 강점으로 승부하라고 외치는 세상이었다. 온통 약함만 느끼는 나는 싸워 대항하기보다 쭈그려 타협하고 순응하기를 배우려 애쓰고 있었다. 잠시 그 분투를 멈추고 나의 약함을 다시 보는 법을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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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미술관에 <향수, 고향을 그리다> 한국 근현대 미술전에 다녀왔다. ‘1부 향토-빼앗긴 땅, 2부 애향-되찾은 땅, 3부 실향-폐허의 땅, 4부 망향-그리움의 땅‘으로 구성된 전시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창전 이상범 선생의 커다란 병풍에 담긴 수묵화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내 고향 산천을 담은 붓과 색, 그 어떤 서양화에서도 느낄 수 없던 강렬한 친근감과 그리움을 느꼈다. 전시회는 우리 근대 회화에 나타난 그 느낌을 ‘향토색‘이라 표현했다. 참 좋다. 향토색이란 말도, 그 느낌도, 오롯이 담긴 그림들도.

하지만 4부까지 다 보고 나서 슬펐다. 우리의 미술은 참 아픈 시대를 지나왔구나, 싶었다. 서양의 인상주의처럼 일상과 감정의 풍요를 느끼고 표현할 시절이 없었다. 나라를 잃었고, 되찾았으나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고, 그리움을 짊어진 분단의 아픔이 남았다. ‘고향‘이란 주제는 우리나라가 겪어온 시절의 아픔을 그대로 관통했다. 그럼에도 그림에 담긴 따듯한 기억, 가족의 사랑, 애잔한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4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시화집을 보고 나온 느낌이다. 책장마다 애잔하고 따듯하고 그리운 향토 내음이 진해서 손끝에 잔뜩 물들이고 나왔다. 여운이 길어서 집으로 돌아와 책장에 꽂혀 있던 <방구석 미술관 2-한국 미술> 을 읽기 시작했다. 조금 더 알아야겠다. 그 그림들이 겪었던 마음들을, 그들이 남기고자 했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싶다. 마음에 와 닿은 그림에 내가 할 수 있는 화답이다.


*연결해서 읽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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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오랑주리-오르세 미술관 특별전: 세잔, 르누아르>를 관람했다. 형태와 구조의 관점으로 그림을 그린 세잔과 빛과 색으로 그림을 그린 르느와르를 비교한 전시가 몹시 흥미로웠다.


난 예술의 전당 전시회를 꼭 챙겨보는 편이다. 그들만의 전시 기획이 몹시 흥미롭기 때문이다. 예술의 전당 전시회는 자료를 풍부하게 가지고 마음껏 보여줄 수 있는 전시가 아니다. 대중적인 화가를 선택해서 늘 인기가 많지만, 보여줄 수 있는 그림도 한정적이고, 화가는 유명하지만 대표작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 제약 속에서 그들은 미처 몰랐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그림을 새롭게 배치한다. 적절한 설명도 그림을 돋보이는 장치가 된다. 그들이 제시하는 방식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이해의 눈이 열리고 영혼이 차오르는 감동을 느끼곤 한다. 매번 감동 받는 포인트가 달라져서 볼 때마다 기대가 된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챙겨보는 것처럼, 기다리는 설렘이 있다. 읽고 나선 이번에도 역시 좋았다는 느낌이 이어지는 것도 좋다.

이번 전시회에선 르느와르와 세잔의 대비가 좋았다. 특히 세잔을 내가 참 띄엄띄엄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르느와르가 걸어간 길과 대비해 세잔이 추구한 그림 세계를 보니,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형태와 구조를 향해 나아갔는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전시회의 마지막은 르느와르와 세잔이 추구한 그림 세계가 어떻게 현대 미술에도 이어졌는지를 보여준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매달려 그릴 수 밖에 없던 마음들, 추구함, 그들은 자기 표현을 넘어 영원을 향해 가는 흔적을 남겼다. 영혼의 지문이 남은 그림을 보며 그 울림에 공감하고 감동하는 건,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가 강렬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당시 둘의 그림을 모았다는 갤러리스트 폴 기욤의 집을 보며, 그리지는 않았으나 이 사람이 모으고 전하고 남기고자 했던 건 뭐였을까, 궁금했다. 문득, 가치가 남았구나. 싶었다. 영원의 흔적을 담은 가치, 또렷하게 계산되지 않는 가치를 보고 간직하고 전달하겠다는 생각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한 특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 어떤 가치를 모으고 있지? 내가 남길 가치는 무엇일까? 가치를 품는 순간, 인생은 찰나가 아닌 영원에 속하는 생명력을 얻는 것 아닐까?

그림도 좋았지만, 가치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 떠오르는 책 *
<방구석 미술관1>

그림은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는 자기 표현의 열망 같다. 너무 뜨거워서 자신마저 태워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아니,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막막함과 어려움을 버티면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건 영혼의 숙명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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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드 더 와이어(Outside the Wire, 2021, 미국, NETFLIX)



"감정이 인간의 결함이라고 생각해?"

극 중 리오 대위가 하프 중위에게 묻는 말이다. 허를 찌르는 질문. 새로웠다. 하프 중위는 인간이 감정 때문에 실수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38명을 구하기 위해 2명을 희생하는 판단을 내리고도 별로 자책하지 않는다. 감정을 배제한 냉철한 판단이 옳았다고 믿는 인물이다. 나도 감정에 흔들려서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때마다 감정 빼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한다. 마치 로봇처럼 말이다. 하지만 곧 이은 리오 대위에 말이 정말 마음에 와 닿았다. 

"감정이 부족해서 실수를 하는 거야."

감정은 결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기에, 충분히 느끼지 못했기에 인간은 후회할 결정을 내린다. 감정을 인간만의 전유물이라 생각하는 이유도, 감정이 인간다움의 결정체이기 때문 아닐까? 인간은 감정을 결함으로 여기고 배제하도록 훈련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완전해지도록 성장시켜야 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이었다. 


영화는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지닌 AI 로봇과 실수하지만 개선의 여지가 있는 인간을 대비해 끊임 없이 질문을 던진다. 

감정 없이 계산만으로 내린 결정이 과연 옳은가? 대의를 위한 소의 희생이 합리적인가? 영화에 나오는 부차적 피해를 어쩔 수 없다 여기며 외면하지 않았나? 38명을 살리기 위해 2명을 희생하는 판단이 수억을 살리기 위해 수백만을 희생하는 판단과 다르냐는 질문 앞에 순간 멈칫했다.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깨달음. 우리는 감정 없이 계산으로 이끌어낸 합리적 판단이 옳다고 여기는 속임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리오 대위가 보여주는 모습은 내가 믿고 좋다고 여기는 합리적 결정의 위험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반면 실상을 모르고 오만한 데다 정작 자신에게 닥친 현실에 나약한 하프 중위는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인간이기에 나아가야 하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그냥 재미로 보기에도 괜찮은 영화였지만, 전하는 메시지가 신선해서 계속 마음에 남는다. 로봇 시대가 던지는 윤리적 문제를 좀 더 깊이 들여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르니까 그냥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살았는데, 이러다가 시대가 펼친 장막에 눈이 가리워 인간다움을 놓친 노예 상태로 살 지 모른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역사의 큰 흐름을 거슬를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인간답게 조금은 나아가려고, 감정이 좀 더 나은 인격으로 성장하도록 고민하는 사람이고 싶다.  


*떠오르는 책*

   : 아들 녀석이 이 책을 읽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류의 기술은 인간 윤리를 벗어난 발전이어선 안 된다고. 

     모든 것이 완벽한 멋진 신세계가 인간다움을 대가로 

     얻어지는 거라면, 그걸 생존이라 여길 수 있을까?

 

     이 책은 영화와 다른 결의 이야기이지만, 

     기술과 윤리라는 화두가 떠올라서 연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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