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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
마이크 니콜스 감독, 엠마 톰슨 외 출연 / 워너비엔터테인먼트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영화 ‘Wit’를 보고
말기 암환자에게 인간의 존엄성 유지가 가능한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든 감동영화
주인공 Vivian Bearing (Emma Thompson 분)은 시인 John Donne를 전공한 유명한 영문학 교수다.홀로 고지식하게 살아온 그녀에게 어느 순간 4기 난소암 진단이 내려진다. 치료를 맡은 Dr. Kelekian교수는 실험적이긴 하지만 최대 용량의 항암치료를 제시하고 그녀는 기꺼이 도전하겠다고 받아들인다. 자각 증상에 의한 고통도 없고 항암제의 부작용도 경험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는 치료를 위해 어떤 어려움도 감당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원 첫날 Dr. Kelekian 밑에서 그녀의 치료를 담당하게 된 전공의 Dr.Posner는 지극히 통상적인 골반 내진을 실시하고 사전 설명이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내진을 당한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모멸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건 서막에 불과하다. 그녀의 검사를 담당하는 직원들도 하나같이 사무적이다.
말기 암환자에게 치료의 성과가 검증되지 않는 연구목적의 과도한 치료가 받아들여 질 수 있는가
수술로 복강 내 암 덩어리는 완전히 제거되지 못하고 Dr. Kelekian은 최대 용량의 항암제를 투여한다. 한 사이클이 돌기도 전에 머리카락은 빠지고 Dr. Posner는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그녀의 고통보다는 연구목적의 데이터에만 관심을 쏟는다. 구토 중에 그녀는 뇌가 빠져나간다고 느낀다.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에 상관없이 Dr. Posner의 인사말은 한결같다. ‘How are you feeling today?’ 항암제 때문에 의식이 오락가락하는데도 그것을 자기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도 심지어는 그녀가 죽어있는데도 쳐다보지도 않고 ‘How are you feeling today?’다. 의과대학 입학 전 Bearing교수의 시문학강의를 들었다는 인간적인 관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Dr. Posner가 받은 시문학 A학점은 인간의 감성을 이해한 척도가 아니라 의과대학 입학을 위한 하나의 준비절차처럼 여겨진다. 일주일에 한번씩 Dr. Kelekian은 전공의와 학생들을 데리고 회진을 돈다. 고통스러운 그녀 앞에서 이들이 보이는 관심사항은 인간이 아닌 질병이다. 고장난 기계 앞에서 장인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묻는 방식과 전혀 다름없다. 그녀는 고장난 기계가 된다.
죽음을 향해 내몰리는 두려움을 어떻게 감당하나
기력이 떨어지기 전만 해도 그녀는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만큼 엄격했던 그녀의 지도교수였던 Ashford교수의 박사과정도 겪었으니까. 처음에는 John Donne의 소네트가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의사들은 너무나 사무적이었고 질병에만 관심을 보였다. 실험적으로 투여한 과도한 양의 항암제는 그녀를 죽음 직전으로 몰고 갔다. 그때마다 의사들은 항암제가 효과가 있다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판에 박은 말만 되풀이 했다. 자기가 겪고 있는 고통과는 다른 이야기에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의사들의 말은 항상 똑같았다. 간호사 Susie Monahan은 의료진 가운데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상대다. 그녀로부터 자신의 항암치료가 전혀 효과가 없고 몸의 면역체계는 거의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게 된다. 그럼에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의 망가진 몸을 의사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의식도 가물가물해서 John Donne의 소네트도 떠올릴 수 없다. Ashford교수가 그녀를 방문한다. 말 한마디 내뱉기 힘들다. Ashford교수가 소네트를 읽어줄까 제안하지만 그녀는 거부한다. 대신 어렸을 때 아버지와의 행복한 시간을 떠올리는 어린이 동화책 ‘Runaway Bunny’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녀는 잠에 빠진다.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다.
치료의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은 지켜질 수 있는가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면서 두 가지를 대한다. 하나는 환자라는 인간이고 하나는 환자 몸에 있는 질병이다. 의사는 질병을 치료한다. 당연히 관심은 질병이다. 검사의 초점은 질병이고 치료의 초점은 질병이다. 검사과정 중에 치료과정 중에 환자가 어떤 육체적 고통을 겪는지 어떤 모멸감을 느끼는지 환자의 존엄성이 얼마나 상처입는지에 대한 생각은 아예 관심이 없다. 그것에 관심을 갖는 순간 환자치료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한다고 여기는지 의사의 머리 속에서 인간과 질병은 완전 분리된다. 환자는 내 몸 안의 질병치료를 의사에게 맡긴 이상 어떤 것이던지 의사의 지시에 따를 수 밖에 없고 의사에 판단에 따를 수 밖에 없다. 치료 중에 받는 어떠한 고통도 어떠한 존엄성에 대한 상처도 질병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기에 감내하는 수 밖에 없다. 환자에게는 어떤 선택권도 없다. 내 몸 안에 있는 질병의 치료를 의사에게 맡기면서 질병과 분리된 나의 인간됨은 그대로 포기한다.
Part, Shostakovich, 그리고 Gorecki
영화 내내 Arvo Part의 ‘거울 속의 거울’ 음악이 흐른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은하수를 타고 서쪽 나라를 향해가는 쪽배처럼 무심하게 차갑게 때로는 단순하게 그러면서도 스멀스멀 영겁의 나라로 다가가는 모습으로 우리의 감성을 유도한다. CD 내지 설명을 보니 이 곡은 죽음과 불멸에 대한 명상이며, 인간존재 의식에 대한 명상이며, 예술가의 운명과 영적가치의 불멸에 대한 명상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영화의 스토리에 Arvo Part의 음악은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것은 고스란히 내 눈에 눈물이 되었다. 영화는 Shostakovich 의 현악사중주 15번의 제 2악장 하이 톤의 바이올린으로 시작한다. Dr. Kelekian의 선고가 내려진다. ‘암입니다. 전이성 난소암입니다.’ 사무적으로 내뱉는 판결에 놀람과 당혹감으로 허물어져가는 환자의 비명이 들려온다. 면역체계가 망가져 고열이 동반되어 급히 응급실을 찾은 그녀의 두려움 속에서 현악사중주는 다시 들려온다. Gorecki교향곡 3번의 2악장 라르고는 인생을 담담한 시선으로 관조하면서 시작한다. 인간의 일생은 우주시간에서 찰나에 불과하며 인간의 한 몸은 우주에서 한 티끌도 못 되는 미물이다. 인생의 기복은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티도 나지 않는 존재없는 존재다. 그러면서도 낮고 굵은 현과 오르간의 소리덩어리는 무심하고 허무하다. 슬픔이 밀려온다. 그러다가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따뜻한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상처를 네 엄마와 나누거라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언제나 너를 내 마음에 담고 살아왔기 때문이란다
언제나 너를 믿음으로 보살펴왔기 때문이란다
네 엄마에게 말하거라 기쁨을 주거라
네가 이미 나로부터 떠나갔어도
나의 소중한 희망이여
아니어요 엄마 울지마세요
사랑스런 하늘나라 왕비가
나를 언제나 도와줘요
내 사랑하는 아들아
어디로 간거니
아마 하늘로 올라가는동안
잔인한 적들이 내 아들을 죽였어요
오 나쁜 인간들아
신의 이름으로 성스러운 신의 이름으로 묻노니
말해라 왜 내 아들을 죽였느냐
이젠 다시 그를 돌볼 수 없구나
울다 내 늙은 눈알이 빠져나가도
내 쓰디쓴 눈물이 또 다른 오데르강을 만들지라도
그들은 네 생명을 돌이킬 수 없구나
내 아들아
Gorecki가 그랬던 것처럼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슬프면서도 공허한 눈빛이 인간의 존엄성이 배제된 채 차디찬 치료를 받다가 죽어가는 그녀의 얼굴과 화면에 오버랩 되는 것은 비단 나만의 느낌이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