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상처입은 영혼의 편지 -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유대인 여의사 릴리가 남긴 삶의 기록
마르틴 되리 지음, 조경수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어느 가족의 불편한 진실과 아픈 역사 - 상처입은 영혼의 편지

작년에 본 수많은 다큐물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BBC에서 2005년에 만든 [아우슈비츠] 6부작이다. 2차 대전 이전 독일 경제는 인구의 2%에 불과한 유태인이 40%가 넘는 큰 비중을 차지했다. 나치는 경제혼란을 유태인에게 돌렸고 반유대정책으로 유태인에 대한 박해와 학살이 시작되었다. 아우슈비츠 한 곳에서만 110만명이 죽었고 총 6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의 피해자가 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다큐의 충격은 더 컸다. 그들은 살아남아서 증언을 했지만 대부분의 유태인처럼 여의사 릴리도 아우슈비츠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상처입은 영혼의 편지. 릴리는 유복한 유태인 과정에서 태어났고 문학과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명석한 여성이다. 아리아인 에른스트 얀과 결혼을 했고 소도시에서 각각의 이름을 내 건 병원은 개업했다. 존경받는 유대인 의사이자 다섯 아이의 엄마인 릴리가 어느 날 아무 이유도 설명도 없이 감금되었다. 실상은 이렇다. 병원일이 바빠질 즈음 에른스트는 여의사 리타를 고용했는데 리타는 얀과 불륜 관계가 되고 또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그 즈음 독일의 반유대정책이 시작된다. 순수(?) 유태인은 전국 200개가 넘는 노동교정수용소에 수감 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릴리는 남편이 아리아인이라서 수감을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남편 에른스트는 이혼을 하게 되면 아내가 수감될 것을 알면서도 이혼을 하고 리타와 결혼을 한다. 리타의 출산을 도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릴리였다.
이 책은 릴리가 노동교정수용소에 수감되면서 다섯 아이들과 친척, 그리고 이웃들과 주고 받은 550여통의 편지를 엮은 것이다. 편지의 대부분은 다섯 자녀들과 주고 받은 편지다. 불편한 수용소의 생활을 사실대로 적지 않았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보내달라는 당부와 아이들 안부 묻고 친지들 걱정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게슈타포의 경계가 심해지면서 에둘러 써야하는 불편함은 그래도 소식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안 좋아지고 전쟁의 공포는 더해간다. 자녀들과 주고받는 편지는 이런 변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언제까지는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던 기대는 점점 사라지고 급기야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고 가족에게 릴리의 공식 사망 확인서가 전달된다. 아우슈비츠 제2호적청에서 1944년 9월 28일에 발행한 사망 증명서가 우편으로 배달되었던 것이다.
이 글의 제목으로 "어느 가족의 불편한 진실과 아픈 역사"라고 정한 이유는 이 책의 출간과 관계있다. 이 책의 저자는 릴리의 외손자이자 <<슈피겔>>지의 부편집장인 마르틴 되리다. 1998년 세상을 떠난 외숙부(릴리의 큰아들)의 유품에서 릴리가 수용소에 있을 때 자녀들과 주고받은 250 여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그러나 누가 이것을 쉽게 세상에 이야기하겠는가? 가족은 희생자이면서 공범이기도 했다. 외할머니 릴리를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사람은 그의 외할아버지 에른스트 얀이다. 일종의 가족의 금기사항이다. 그러나 저자는 외할머니의 일생을 추적해 다른 자료들을 찾았고 자녀들과의 편지뿐 아니라 남편과 친구에게 보낸 300여 통의 편지를 추가로 찾았다. 가족을 설득하기를 1년여 이렇게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책에 실린 많은 편지들 중 이 책의 많은 상황을 담고 있는 릴리와 큰 딸 일제의 편지를 옮겨 본다. 이 책의 제목이 "상처입은 영혼의 편지"라는 점, 그리고 엄마는 전쟁 중 수용소에 갇혀 있고,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하고 숙고해서 읽기 바란다.
장녀 일제가 엄마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엄마! 우리는 오늘 엄마가 어디 계신지 알게 되었어요. 언제 돌아오시는지 얼른 편지로 알려주세요. 우리는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요. 먹을 것은 충분한가요? 엄마한테 먹을 것을 보내도 되나요? 속옷을 좀 보낼게요. 오늘은 게르하르트 오빠 생일이었어요. 아주 근사했지만, 그렇게 근사하지도 않았어요. 이스트를 넣은 사과 파이와 파운드 케이크가 있었어요..... 엄마 방이 따로 있나요? 침대는 괜찮은가요? 너무나 사랑하는 엄마, 전 엄마 생각만 해요. 오늘 마릴리스 언니가 왔어요. 마릴리스 언니는 임멘하우젠 말고 우리 집에서 잘 거에요. 요즘 전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많이 공부하고 있어요. 그 밖에는 전부 예전과 다름 없어요. 이제 방마다 다 커튼을 달았어요.
엄마가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얼른 답장해 주세요..... 뭘 보내야 할지 자세히 써 주세요. 아빠는 매일 밤 우리를 보러 오시고 낮에는 로레 고모가 계세요. 도들레와 에파, 한넬레는 다 잘 있어요. 게르하르트 오빠는 책을 받고 무척 좋아했어요. 열네 살 이하 아이들에게는 사탕이 배급되었어요. 그 중 몇 개를 오빠한테 줬어요. 엄마가 어서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일제가 수많은 다정한 인사와 키스를 보내요! 힘찬 포옹도요.
엄마는 답장을 한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 마릴리스와 사랑하는 착한 로레를 비롯한 모두에게.
내일이면 벌써 집을 떠나온 지 14일이 되는구나. 난 열흘 전부터 이곳에 있고, 하루 하루 지나는 것이 기쁘단다. 하지만 너희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까지 남은 날짜를 셀 용기가 아직 안 나는구나. 내 걱정은 하지 마. 나는 확실히 잘 지내고 있고 건강해. 너희들도 알잖아. 너희 엄마는 항상 끄덕없이 일찍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노동은 유익한 거야.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이 항상 넘쳐나. 그때마다 당연히 너희들이 보고 싶고 집이 그리워진단다. 애들아, 이제 언제든지 나한테 편지를 써도 돼. 부디 얼른 많이 많이 써주렴. 좋은 일 나쁜 일 가리지 말고 뭐든지 다 얘기해 줘. 기쁜 일, 걱정거리에 대해서도. 당분간 답장이 허락되지 않으니 너희가 편지를 보내줘. 로레 형님도 편지 써주시고 로테나 게오르크 아저씨한테서 온 편지가 있으면 좀 보내주세요.
내 아가 도들레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얌전하게 구니? 도를레의 생일까지는 엄마가 집에 돌아가지 못할 거야. 큰 생일 초들이랑 손수선 석 장이 복도 앞 장의 맨 아래 서랍에 있고 찬장(중앙)에 사탕이 몇 개 있어.
나의 에피라인, 다시 건강해졌니? 학교에서 진도가 많이 뒤쳐졌어? 책은 받았고? 학교는 마음에 들고 요새도 임멘하우젠에 가곤 하니?
꼬마 한넬레, 하이디는 어떻게지내니, 바이올린은 잘 하고 있어? 견신례 수업은 어떠니? 곧 새를 살 거니?
나의 착하고 예쁜 큰딸 일제야, 너는 분명히 로레 고모에게 큰 의지가 될거야! 잘 지내고 있니? 울라와 기젤라는? 걔들이 아직 놀러오니? 라틴어는 어때? 나의 마릴리스, 성명축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괴팅엔으로 갈 거니? 우리가 곧 다시 보게 될까? 나의 게르하르트는 어떻게 지내니? 정기적으로 집에 오니? 그 애 생일은 어땠어?
로레, 좋은 사람, 잘 지내세요? 일이 너무 과하지 않나요? 할 만하세요? 줄리는 어떻게 하고 있어요? 인사 받을 만하다면 안부 전해주세요.
아빠는 어떻게 지내시니? 어디 계셔? 무슨 일 하시니? 아빠에게 다정한 안부 인사 전해 주렴. 아, 아빠한테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운이 날까.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지.
그런데 엄마가 부탁할 게 참 많구나. 수고해 줄 너희들에게 미리 고맙다는 말을 해두마. 아마 작은 소포로 나눠 보내면 더 빨리 올거야. 우선 정기적으로 신문을 좀 보내주렴. 그리고 읽을 책도 한 권<아빠한테 골라달라고 해> 보내 줘. 슈티프터의 [늦여름]이 괜찮겠다. 복도 책꽂이에 보면 나랑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이 읽을 만한 좀 덜 귀중한 책이 있을 거야. 또 엄마 손톱줄이랑 핀셋, 빨간색 핸드백에 든 거울, 바세놀 파우더 한 봉지, 애들 서랍장 작은 서랍에 있는 탄산칼슘 두 봉지, 엄마 슬리퍼, 검은 구두를 보내 줘. 혹시 가능하면 가끔 빵 조금, 소금 약간도. 혹시 치즈나 마멀레이드가 조금 남았으면 그것도. 오래된 은제 나이프(오른쪽 서랍)도 한 개 같이 넣어줘. 그리고 혹시 사과 몇 개 있니. 여기서는 수프나 삶은 감자만 나오거든. 혹시나 너희에게 없어도 되면 푸딩 가루도 4~5봉지 넣어줘. 오늘은 이만 줄일게. 모두에게 포옹과 키스를 보낸다. 내 생각과 소망, 그리움은 모두 밤낮으로 너희들 곁에 있어. 사랑해!
- 엄마

위 명함을 클릭하시면 제가 고른 글들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손을 클릭해주시면 저의 블로그 생활에 큰 힘이 됩니다!!
다큐 아우슈비츠수용소
기회가 되면 꼭 찾아보시라



* 안네의 일기도 다시 읽어보시고
쉰들러의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도 함께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