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만 있어줘
조창인 지음 / 밝은세상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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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어진 프로다. 손범수가 진행하기 전 아나운서의 모범이라는 이계진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아프리카 주민들이 내지르는 듯한 시그널 음악과 목도리도마뱀이 목도리(?)를 펴고 우스꽝스럽게 달리던 장면을 기억하실런지. 이계진 아나운서가 차분한 목소리로 '가시고기'에 대해 내레이션 하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무릇 인간이든 동물이든 내리사랑이라 함은 모정母情을 뜻하지만 가시고기는 그 생김과 다른 진한 부정父情으로 시청자들을 울렸다.

얼마 전에 중고책방을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김윤희의 <잃어버린 너> 표지를 찍어 블로그에 올렸다. 그 책 표지를 기억하는 이라면 노인네라는 우스개를 달았지만 책을 기억하는 이들은 모두 추억에 젖었다. 여고 교실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던 친구를 확인하면 그 책을 읽고 있었다는 것은 그 책의 독자들이라면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다.

매일 찾는 출판평론가 한기호 소장의 블로그에서 읽은 글이다.

1990년대 이후 소설로 200만 부를 돌파한 것은 『아버지』,(김정현),『가시고기』(조창인),『엄마를 부탁해』(신경숙) 등 세 가지이다. 21세기 들어 단권으로 밀리언셀러가 된 우리 소설로는『가시고기』(조창인),『봉순이 언니』(공지영),『아홉살 인생』(위기철),『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박완서),『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공지영) 등이다.

살아만 있어줘. 조창인. <가시고기>의 작가 조창인이 새 소설을 냈다. 소설을 잘 안 읽는 탓도 있겠지만 제목부터 진부한 느낌이었고, 내용도 뻔하지 싶은 생각에 처음에는 진도가 나가지 않아 책상 한 구석으로 밀어뒀다. 토요일 밤늦게 <고요함이 들려 주는 것들>의 첫 이야기 '인생, 얻기 힘든 소중한 기회'를 읽다가 문득 생각이나 다시 책을 펼쳤다. <살아만 있어줘>는 처음부터 자살 이야기였고, '인생, 얻기 힘든 소중한 기회'는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 소중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상반된 내용이 이 책을 생각나게 했고 새벽 4시까지 한 달음에 다 읽었다.

다 읽고나서도 조금은 진부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런 진부함을 넘어서는 감동이 있다. 나는 90년대 멜로(또는 연애) 소설과 영화를 즐겨 읽고 보았고 한때는 낭만주의자였(었)고, 남자지만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눈물 흘리는 것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가난, 고아, 연인, 친구, 헌신, 사고, 이별, 재회 등등의 키워드로 그릴수 있는 스토리는 뻔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이 가려져 있었다. 뒤늦게 드러나는 사건들은 새로운 연결고리가 되어 감동이 배가된다.

p21.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죽어 마땅한 이유도 있다. 정신이 괴로워 몸을 망가뜨리고 싶을 때가 있다면, 몸이 괴로워 정신을 버리고 시을 때도 있다. 정답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 길로 가야 할 경우가 있다.

'살아만 있어줘'는 주인공 은재의 유언이다.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삶에 의욕을 상실했던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몇 개월을 지켜준 딸에게 그가 손바닥에 적어 준 유언이다. 처음부터 시니컬한 젊은 여자 둘의 자살소동으로 시작해 불편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늘어나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전개되는 이야기에 금방 몰입하게 된다. 세세한 줄거리는 생략한다. 읽어 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p41. 비에 젖은 이에게 우산을 들려주기보다는 함께 비에 젖는다. 그러나 젖은 옷이 마를 때까지 함께 기다려 줄 수 없다면, 함께 비를 맞았던 자체가 무의미하다. 젖은 옷을 함께 말릴 수 없다면, 섣불리 함께 젖는 일은 하지 말아야 옳다.

추석이나 설날 즈음, 특집극이라는 이름으로 길지도 않게 2부작 정도, 감동이 있는 드라마를 보여줄 때가 있다. 예고편으로 어떤 이야기인지 줄거리가 감이 온다. 그렇다고 채널을 돌리지 않는다. 가족이 TV에 둘러 앉아 눈시울 붉히면서 자리를 지킨다. 드라마가 끝나고 눈시울이 젖었다는 사실이 무안한지 서로를 쳐다보면서 한 번 웃고 난 후 각자 방으로 돌아간다. 이 책이 그런 드라마 같은 소설이다.

p131. 세상이 살 만하다고 여기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스스로 바보가 되어 세상에 속아 넘어가거나, 용의주도하게 세상을 속이는 것. 그 외에는 세상의 끝자락이든 중심이든 삶은 고단할 뿐이다. 질질 끌려 다니다 속절없이 안녕하게 된다.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를 한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은재는 작가의 또 다른 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인생, 얻기 힘든 소중한 기회.

불교의 가르침 중에는 인간의 몸을 받고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잊지 말라는 것도 있다. 이 더없이 아름다운 시각은 의식이 충만한 영혼으로 태어나 물 마시고 장작 패며 살아갈 수 있음에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한다. ....하지만 다행히 이 시간 이곳에 인간으로 태어나는 축복을 받아 고귀한 삶을 살고 있다. 인간으로 살악는 소중한 삶은 다시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바로 지금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고 자신이 아끼는 것을 사랑하라.

- <고요함이 들려주는 것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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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이것 - 인생의 결정적 순간을 담은 60편의 짧은 이야기
존 그레고리 외 엮음, 홍승원 옮김 / 동네스케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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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은 언제였을까? 라는 자문을 해 본다. 몇 가지 사건이 생각나지만 정말 그것이 전부였을까 하는 의문부터 든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지라 섣불리 판단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한 이유다. 지금 내 삶을 돌아보자. 아내를 만나고 오랜 기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아내와 함께 살아가는 일상이 앞으로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아내와의 만남"이라고 해도 괜찮겠다. 아내는 나에게는 브레이크다. 나는 거만하지 않지만 겸손할 줄 모른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유머는 진지함과는 제법 거리가 멀다. 절반은 잘난 맛에 살아가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왔다. 때론 지나쳐 '오버?'하는 경우가 많았던 내 생활에 아내의 일침(잔소리라고도 부른다^^)은 등짝을 갈기는 죽비다. 아직 부족함이 있다면 내 수양이 부족한 것이다.


내가 믿는 이것. 댄 게디먼 외 엮음. 한 사람의 저자 대신 '댄 게디먼 외 엮음'인 이유는 한 라디오 방송에서 "인생의 원칙이나 자신만의 신념에 대해 600자 이내의 에세이를 투고" 받은 것이다. 그리고 투고자들은 라디오에 출연해서 자신의 사연을 직접 읽어준다. 여기까지는 작년 말에 선물받아 읽었던 <사랑하는 나의 엄마에게>가 생각났다. 이 책은 잡지사 [샘터]에서 독자들한테 엄마에 관한 사연을 짧은 글로 받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엄마'라는 소재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가 눈가를 촉촉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인사는 힘이 세다


하워드 화이트는 엄청나게 직원이 많은 회사에서 일을 한다. 놀랍게도 직원 대부분의 이름을 안다. 대부분의 직원들도 하워드 화이트 씨를 안다. 그러한 사실이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 믿고 있다. 그리고 그 이면의 작은 사실 하나는 모든 이들에게 짧고 간단한 인사라도 반드시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 얼마나 많이 들어온 말인가? 매일 매일 "인사 잘 해야 된다" 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른이 되거나 지위가 조금 더 올라가면서 먼저 건네는 인사를 잊고 산다. "내가 10살쯤 되었을 때다. 그때 나는 어머니와 길을 걷고 있었다. 어머니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길에서 만난 리Lee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셨다. 나는 돌멩이를 던져 '멈춤STOP' 표지판의 O자를 맞추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는 동네에서 언제든지 아저씨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저씨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데 아저씨와 헤어진 뒤 어머니는 나를 붙잡고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길에서 사람을 만났는데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짓은 오늘부터 그만둬라. 강아지도 길에서 너를 만나면 꼬리를 흔들며 인사하지 않니?" 어머니의 말씀은 무척 단순했지만, 그것은 내 인생의 지표가 되었고, 현재의 나를 있게 해주었다.-p35. 하워드 화이트씨는 나이키사 조던 브랜드의 부사장이다. 그는 인사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고.



살기좋은 동네


제프 닉사는 노스웨스트 근방의 사우스벤드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안좋은 동네'에 산다. 투자가치가 없는 동네다. 교육 여건도 안 좋다. 그 동네 살기가 무섭지 않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다. 빈말들이 아니다. 동네 빈 집중 한 곳은 파손이 되었고 만취한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남자도 있고 마약을 압수당한 여자도 있다. 그러나 제프 닉사의 가족들은 7년 동안 잘 지내고 있다. 투자 가치가 없는 집 가격은 부담 없어 좋았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진실 저 너머에 있는 지독한 편견들이었다. "나는 우리 동네가 정말 좋다. 내 삶은 균형을 찾았고, 나는 사물이 지닌 진정한 성질을 보게 되었다. 우리 동네는 쓰레기 투기나 도난당한 자동차보다 훨씬 해로운, 특권층의 맹목과 교묘한 인종차별로부터 나를 구해냈다.-p99


우리의 인생 철학이 깊은 독서, 고난을 통한 성찰과 자기 반성 등으로 결정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상에서 우연하게 다가온 작은 경험 하나가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삶의 지표가 된다.. 작은 경험에서 큰 교훈을 얻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 삶을 반추해 보는 것도 분명 새해 초에 할 일이다. 이 책이 작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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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에서 빈둥거리다 길을 찾다 - 명문가 고택 편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 시리즈 3
이용재.이화영 지음 / 도미노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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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에서 빈둥거리다 길을 찾다
 


















지난 주 토요일, 아내의 재촉으로 김해시 진례면의 클레이아크를 찾았다.  클레이아크는 건축도자미술관이고 정식 명칭은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이다. 박물관 상반기 기획전 <테라코타, 원시적 미래 Terra-cotta, Primitive Future> 마지막 날이다. 오후에 독서 모임이 있어 조금 망설였지만 미술이다, 뮤지컬이다 천리길 서울은 찾아다니면서 지척에 좋은 전시를 두고 가지 않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마음 고쳐 먹고 떠났다.




미술관 뒤 연수관에서 교원직무연수에 주말에도 땀을 흘리는 김군君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직원의 힘을 빌려 일반인들이 갈 수 없는(그렇다고 아주 특별한 곳은 아니다) 여러 시설들을 둘러보는 행운도 누렸다. 미술관 본관으로 먼저 가던 아내가 뭔가를 발견했다. 

 









그 곳에서 이용재 선생을 만날 줄은 몰랐다. 한 달에 한 번 진행하는 미술관 강연 프로그램에 이번 달 강사가 이용재 선생이다. 전화를 드리니 도착하기  1시간 전이란다. 아내와 미술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도착하는 시간과 얼추 비슷해졌다.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여쭈었다. 석달 전 창원성산아트홀 강연 때보다 조금 수척해보였다. 농담을 던지시는 걸로 봐서는 아직 짱짱한건데. 오후에 독서모임이 있어 강연은 듣지 못했다.




고택에서 빈둥거리다 길을 찾다. 이 책의 저자가 이용재 선생이다. 제목과 표지가 어떻냐고 문자가 온 적이 있다. 표지는 책과 잘 어울리고 제목의 '빈둥거리다'가 조금 '오버'하는 거 아니냐고 답을 드렸다. '빈둥거리다' : [동사]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자꾸 게으름을 피우며 놀기만 하다' 이거 내가 잘 하는 건데. 그러나 나는 이 책이 말하는 '빈둥거림'에 발도 담그지 못한다. '빈둥거린다'는 것을  말을 바꾸면 '한량'이 되는데 학문은 있지만 현실에 안 나가는 선비가 한량'이기 때문이다.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고택에서 길을 찾다' 제목만 보면 감이 잡히지 않는다. 참선이나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학문에 정진하는 것도 아닌데 고택에서 길을 찾다니... 무슨 수로? 읽어 보면 안다. 고택은 역사를 담고 있다. 긴 세월을 헤치고 살아온 사람 이야기가 있다. 주인 없는 황량한 집도 우리 같은 범인이 배우고, 새겨 들을 스토리가 있다.










[강릉 선교장]은 최고 권력을 마다하고 떠나 비움을 실천한 효령 대군의 이야기가 있고, [연경당]은 19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받은 효명세자와 그의 아버지 순조의 사연이 있다. <운현궁>은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대원군의 힘의 관계가 얽히고 설킨 장소다. 




저자는 [연경당]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지만 나는 [낙선재]에서 생각이 많아졌다. 고종에서 엄비, 영친왕, 덕혜옹주, 이구까지 이어지는 조선의 마지막 역사는 비운이다. 권비영의 책 <덕혜옹주>도 생각났고, KBS 다큐 한국사 전傳 <라스트 프린세스 - 덕혜옹주>도 오버랩되었다.




작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연 방문객이 10만에서 백만으로 늘어난 양동마을의 고택 <향단>의 역사는 길다. 긴 역사의 중심에 청백리 손중돈이 있다. 손중돈은 외손자 회재를 직접 가르쳤다. 그런 가르침을 받은 회재 이언적은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황과 더불어 동방 5현의 한 사람이다. 




이용재 선생의 책을 소개할 때면 빠뜨리지 않는 말이 있다. 처음 10분을 잘 적응해야 한다. 말이 짧다. 너무 짧은 호흡이 독자들에게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일단 적응하면 너무 재밌다. 




 








▶ 이용재 선생의 책들




[딸과 함께 떠나는......] 시리즈의 저자지만 이제 딸은 함께 하지 않는다. 아빠의 가르침을 받아 스스로 갈 길 찾아갔다. 학교를 그만두고 미술공부 하던 딸은 디자인을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그래서 딸이 질문하고 선생이 답하던 그런 소소한 재미는 줄었다. 그러나 한 마디씩 툭툭 내뱉는 촌철살인은 여전하다. 매력 넘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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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7
제러미 시프먼 지음, 김형수 옮김 / 포노(PHONO)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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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본 다큐 한편. [EBS 음악기행 클래식 13편 -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도시 상트페테부르크]. 상트페테부르크는 표트르 대제가 세운 도시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레닌그라드, 그 레닌그라드의 원래 이름이 상트페테부르크다. 공산주의자들이 붙인 이름이고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 이름이다. 상트페테부르크는 유럽과 가까워지고 싶은 황제의 욕망을 지닌 도시다. 라도가호에서 시작해 핀란드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네바강 삼각주 위에 지어진 도시다. 사람들은 북쪽의 베네치아라 부르지만 실제 모델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다. 추운 도시는 음악, 문학이 발달 할 수 밖에 없는 필연 같은게 있는 것 같다. 추운 겨울에 야외활동은 힘들고 실내에서 난로 불 피우고 차 한잔으로 몸을 녹여가며 서재가 작업실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날 수 밖에.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은 NAXOS BOOKS에서 출간하는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7권이다. 도시 상트페테부르크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차이콥스키와 상트페테부르크는 불가분의 관계다. 차이콥스키가 유년기를 보낸 곳은 보트킨스크지만 8살에 모스크바를 거쳐 상트페테부르크로 이사를 온다. 아버지의 실직과 맞물린 이동은 부유하게 지내던 가족의 상황을 뿌리째 흔들었다. 기숙학교에 들어간 차이콥스키는 무자비할 정도의 대우를 받았다. 범죄라 할 만큼 심한 중노동에 문제아이들은 주먹으로 대했다. 신경과민은 더 심해졌고 감정의 기복도 악화 되었다. 무지력해지고, 짜증도 많이 내고 갈수록 시비조로 변해갔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회복할 무렵 피아노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피아노 연주는 수월하게 잘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음악가가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0살 때, 상트페테부르크 법률학교 예과에 들어갔다. 그는 법을 공부했고 졸업 후 법무부에 직장을 얻었다. 그가 21살 때 누나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저녁 식사 때 내 음악적 재능에 대해 의논했어. 아빠는 예술가가 되기에 너무 늦은 건 아니라고 하셨지. 하지만 사실 나한테 재능이 좀 있다고 해도 적절한 방식으로 발전시키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아. 내가 업적을 낼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형편없을걸. 개선도 빨리 해서 내 일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이제 겨우 지속저음을 공부하고 있는 걸.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음악가의 청년기와 너무 다른 모습에 놀랐다. 우리가 흔히 천재를 이야기 할 때 예술분야는 다른 분야에 비해 어린 나이에 그 재능을 발현하게 된다. 21살에 음악가의 길을 진로로 고민하는 모습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의 성장기에 주목할 만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p28."그는 수심이 잠긴 채 늘 뭔가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매력적으로 살짝 웃고 여자애처럼 예쁘장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서 자그마한 재킷의 소매를 말아 올린 채 몇 시간이고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쳤다." 차이콥스키의 예쁘장한 면은 유년기부터 돋보였다. 기질이 '천사 같고' 눈에 띄게 온화한데다 재치 있게 행동해서 일평생 위험하다 할 만큼 매력을 물씬 풍겼다. 남녀 모두 이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인정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와 강하지 못한 의지때문에 그는 관능에 쉽게 이끌렸고 때로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차이콥스키의 동성애는 그의 연애, 결혼생활, 그리고 죽음에까지 논란거리를 제공한다. 차이콥스키는 우울증이 반복되면서도 작품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작품들은 관객과 단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를 비난하는 음악가들이 적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명곡으로 꾸준히 연주됨으로써 비판가들의 의견을 뭉개버렸다. 그는 타고난 선율 작곡가였으며 자연스럽게 들리게 하는 능력이 있었고 즉흥연주 능력도 대단했다. 통속과 고급사이의 줄타기에서 최적의 지점에 효과적으로 음악을 놓는 법도 알았다. 작년에 조지 발란신의 [호두까기 인형]을 발레로 본 적이 있다. 무대위의 몸동작과 음악, 배경과 조명이 한데 어우러져 꿈을 꾸는 듯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 책 한 권으로 많은 궁금증들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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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다다오의 도시방황]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
안도 다다오 지음, 이기웅 옮김 / 오픈하우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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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색이 강한 일본 오사카. 도쿄가 서울이라면 오카사는 부산 같은 도시라고 했다. 전쟁의 폐허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시기. 집안은 가난했다. 그 때는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다. 오사카는 야쿠자의 도시라 불릴 정도로 야쿠자의 본당 같은 곳이다. 형이 야쿠자였다. 그는 복싱을 했고 프로복서로 뛰었다. 형을 따라 야쿠자를 했어야 마땅한(?) 젊은이는 헌책방에서 건축집 한 권을 보고 전율을 느낀다. 당장 그 책 살 돈이 없었고 누가 먼저 사 갈까봐 맨 아래에 숨겨 놓는다. 돈을 모아 그 건축집 한 권을 손에 쥐었다. 읽고 또 읽고. 현대 건축의 거장 르꼬르뷔지에의 건축집이었다. <건축을 향하여>. 청년의 마음은 이미 거장의 건축물 앞에 가 있었다. 당장 돈도 없었지만 돈이 있다고 프랑스로 갈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다. 일본에서 해외여행이 자유화 되자마자 청년은 훗카이도를 건너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몸을 싣는다. 1965년 4월에 출발해서 9월에 파리에 도착했다. 긴 여행이 육신을 지치게 한 것이 아니라 독서와 사색의 시간을 주었다. 도착한 곳은 현대 건축의 성지라 불리는 [롱샹 성당]. 르 꼬르뷔지에의 말년의 대표작이다. 기뻐 어쩔 줄 몰라 들어선 건물에서 청년은 한 시간도 머무르지 못했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들어오는 빛은 난폭할만큼 폭력적인 에너지를 뿜었다. 때론 빛이 부드럽기까지 했다. 건축가가 만든 공간과 건물에 압도되었다. 수십년 동안 여러회 찾아도 강렬한 인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했다. 그가 처음 롱샹 성당을 찾은 그 해에 르꼬르뷔지에는 세상을 떠났다.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 안도 다다오 관련 책은 처음이 아니다.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도 읽었고, <르꼬르뷔지에 VS 안도 타다오>, 그리고 크기로 다른 책들을 압도하는 건축 사진집도 여러 권 봤다. 이전과 달리 안도 다다오를 보는 여유가 조금 생겼다. 직접 쓴 책이라 그의 생각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제목에 언급한 '도시 방황'도 될 수 있지만 조금 상투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기행'이다. 도시 방황 후 만나는 인물과 작품들이지만 그가 여행하는(또는 방황하는) 도시보다 그가 만나고 접했던 인물과 작품들에 관심이 갔다. 현대 예술의 거장이 다 등장하는 느낌이다. 그는 오랜 방황 속에서 또 다른 거장을 만나고, 작품을 만나면서 건축을 고민했다. 정규 건축 교육을 받지 않은 그의 걸작이 어디서 왔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안도 다다오는 건축을 넘어서는 슈퍼 스타다. 모두가 서양 중심을 논할 때 일본의 목조 건축풍을 그의 건축에 녹였고 자연을 부르고 대지를 끌어 들였다. 파괴는 건축의 한계일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안도는 자연을 넘어서지 않고 자연의 품에 안겼다. 그가 건축을 넘어선 이 시대의 교양이 되는 근본이 거기에 있다. p38. 그리고 거기에는 건축주인 구엘이라는 인물의 강렬한 에고이즘이 있었다. 구엘은 가우디의 후원자다. 건축은 건축가만의 것이 아니다. 건축가의 이성과 창조력, 건설자의 기술과 열정, 거기에 건축주의 경제력과 의지가 존재해야 비로소 건축은 성립된다. 구엘에게는 지고의 꿈이 있었다. 카탈루냐의 풍토를 가우디라는 재능을 통해 남기겠다는, 광기라 해도 좋을 꿈. p49. 적어도 내 몸무게는 열여덟 이후로 변하지 않았다. 복싱을 할 무렵에는 시합 때문에 한 달만에 6킬로그램 가량 감량한 적도 있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내내 63킬로그램이다. 불안과 긴장 속에서 창조성을 모색하기 시작한 시절의 육체와 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기 위해서도 나는 이 63킬로그램이라는 체중을 죽을 때까지 유지할 작정이다. 그게 불가능해졌을 때 나는 단연코 내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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