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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물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4년 8월
평점 :
가연물 : 사건의 현장, 경찰 미스터리 퍼즐 속에 독자를 초대하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범죄 현장.
삶이 단락 되고 싱싱했던 육체는 소멸된 공간 속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피해자의 심경을 공감한다.
범인을 반드시 잡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이런 상황에 놓이길 바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직업이라도 피하고 싶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철저한 방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관객의 탐닉은 그렇기에 우리의 이중성을 제대로 보여준다.
범죄 소설이나 경찰 스릴러가 매니아 층을 형성하고 소설에서 영화로 제작되며 인기몰이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비극의 한 페이지에 자신이 서지 않기를 바라는 하나의 주술이자, 제 3자가 될 경우에만 장면을 엿보겠다는 숨겨진 갈망이 얽히는 결과물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논 구덩이에 쳐 박히는 반장의 어설픈 몸짓에 웃음보가 터져 나가는 씬이 인상 깊었던 이유도 조용한 방관자의 상황을 웃음으로 넘기기에 뭐랄까, 어색해진 탓이다. 남몰래 훔쳐보는 범죄의 현장에서 욕망 해소하고 있는데 엉뚱한 장면에서 관객이 드러나 버린 셈이다.
카인이 아벨을 무참히 살해한 이후, 인간에게 가장 끔찍한 죄악으로 평가되는 현장을 배회하는 경찰의 능력과 집요함은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게 된다.
그만큼 직업으로 부담감에 비례하는 철저함을 가져야 한다.
가벼운 코미디 물 영화에서 조망하는 개구쟁이 같은 형사를 현실에서 보고 싶지는 않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경찰 소설은 사시키 조의 “경관의 피”다.
조진웅, 최우식 주연의 영화로도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다.
2대에 걸쳐 경찰의 직업 소명을 이어받지만 석연찮은 부친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어나가는 심리묘사가 엄청났던 소설로 기억된다.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맛의 소설이었다.
덕분에 틀에 박힌 소설 장르로 각인되었던 경찰 소설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삶이 즐거운 미소만으로 가득 찬 무지개 빛으로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작은 고비와 어려움들은 뚫고 극복할 과제로서 누구나 겪는 과정이지만, 벌겋게 물들어버린 절벽 아래서 끔찍한 주검의 모습으로 동반자가 주검으로 발견된 상황은 더더욱 피하고 싶다.
공포영화에서 쟤는 꼭 죽겠네 라는 클리세처럼 정해진 코스에서 벗어날 때 위기는 다가온다.
비단 “가연물”에 등장하는 4명의 스키어들의 사례뿐 아니라 실제 일상에서도 야, 이거 좀 위험하지 않냐?는 한 사람 결과를 예측하는 친구의 말 좀 듣자.
쏟아지는 눈이 한바탕 휘몰아친 절벽 아래 발견된 두 사람.
한 사람은 피가 낭자하게 퍼진 현장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인사 불성 상황에서 가까스로 구조되어 처참해진 몰골을 수습하기 위한 수술대에 오른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은 본 장면인데?
그렇다. 미스터리류에서 자주 보는 밀실 트릭이다.
비록 뻥 뚫린 공간이지만 자연스럽게 외부에서 누군가 접근하기 어려운 조건이 만들어졌다.
둘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상태이고, 절벽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취만 남아있다. 동행했던 2명은 이들과 헤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사인에 이르게 만든 도구를 현장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외부에서 접근이 제한되었다면 사건 현장에서는 무기로 쓰일만한 도구가 같이 발견되야 하는데 현장에서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다.
트릭을 풀어가는 경찰의 예리한 관찰과 상황을 조망하는 판단력이 힘을 발휘할 조건이 만들어 진 셈이다.
다른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다.
강도치상죄를 입힌 가해 용의자 중 가장 유력한 자를 몰래 미행하던 경찰은 낭패를 맛보게 된다.
새벽 3시 차를 몰고가던 피의자는 교차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주변 공사 상황으로 몰래 미행하던 경찰들은 신호위반을 누가 했는지 알 수 없게 되고 경찰은 탐문조사를 통해 피의자가 빨간 불인데 무리하게 주행했다는 증인을 4명 확보한다.
이로서 교통사고를 핑계로 피의자를 압박하여 강도죄에 대한 추궁이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형사의 감일까? 오랜 경륜이 묻어나는 수사반장은 야심한 밤중에 증인 확보가 너무 쉬웠다는 근본의 질문으로 자신을 몰아세운다.
과연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피곤함이 엄습하는 상황에서 진한 녹차를 마시다가 문득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낸다.
두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했 듯, 이 책은 주인공 가쓰라 반장과 동료들이 사건을 풀어가는 여러가지 사건을 연작으로 구성한 소설이다. 긴 호흡의 장편소설에서 느껴지는 사건의 지루한 상황을 짤막한 단막극으로 풀어가면서 시리즈로 경찰소설의 묘미를 배가시킬 수 있는 기회다.
“흑뢰성”에서도 수수께끼를 던지고 교묘하게 얽혀 있는 실타래를 풀어가는 과정을 남다른 스토리 전개로 끌어간 작가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경찰 미스터리로 독자들에게 퍼즐을 제공한다. 물론 결론에 다가서면 중간에 주어졌던 떡밥도 충실하게 회수하니 무리하게 사건을 전개시키지 않는다.
다만 흥미로운 경관이 등장했다면 좀 긴 호흡의 사건을 풀어주면 어떨 까라는 기대가 들기도 했다.
다른 작가들처럼 수사반장 가쓰라를 전면에 내세운 만큼 후속 작을 통해 갈증을 해소시켜 주길 바란다.
시대를 넘나들며 독자들에게 미스터리 퍼즐을 제공하는 작가의 왕성한 작품 활동에 부채질 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