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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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를 앞둔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석탄 장수인 펄롱은 아내 아일린과 다섯 딸과 함께 조용하고 평온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석탄 배달을 위해 찾은 수녀원에서 혹독한 추위 속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고립된 미혼모들과 아이들을 보게 된다.

“이 위는 이렇게 고요한데 왜 평화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 걸까?”(67p)

겉보기에는 평온한 일상 속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끼기 시작한 펄롱은 수녀원에서 본 장면을 계속 떠올인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도덕적 책임과 양심, 그리고 현실적 두려움이 부딪히며 갈등한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119p)

펄롱은 자신의 키워 준 미시즈 윌슨의 따뜻한 친절과 격려, 그런 ‘사소한 것들’을 떠올리며 결국 용기를 낸다. 앞으로 어떤 최악의 상황이 닥칠지 모르지만, 그는 한 발을 내딛는다.

☕️ 이 작품은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가족과 함께 따뜻한 연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케이크를 만들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고, 성당에 가는 모습들. 그러나 그 따뜻함 사이사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둠이 깔려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펄롱은 어느 순간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29p)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한 삶을 살아온 그는 자신의 불행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묵묵히 성실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수녀원에서 만난 소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고, 그 기시감은 점점 더 커져 그 소녀를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는 수녀원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교회와 깊게 연결되어 있고, 사람들은 진실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해왔다는 것을 알게된다.

☕️ 펄롱이 거대한 두려움과 맞서는 모습을 보며 ‘나라면 과연 저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일랜드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도 작품 속’수녀원’과 같은 공간은 존재해 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영화 도가니에서 다룬 광주인화학교 사건이었다. ‘장애 아동을 돌보는 학교’라는 이미지를 이용하여 아이들을 절망의 끝으로 밀어 넣었던 그 현실은, 소설 속 수녀원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참기 어려운 분노를 느끼면서도,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나라면 펄롱처럼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 작품 속 수녀원은 실제 역사 속 막달레나 세탁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곳에서 많은 여성들이 감금되고 강제 노역을 당하며, 때로는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무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같은 고통과 아픔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마음 깊이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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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복원이 될까요?
송라음 지음 / 텍스티(TXTY)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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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의 부당한 대우와 결혼의 실패를 뒤로하고 설은 구례에 정착한다. 지리산 근처 헌책방에서 책 복원 전문가로 일을 시작한 그녀는 어느 날 등산 중 길을 잃고 야생동물 수의사 유건과 만나게 된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품은 구례에서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다.

설은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곳에서 산에서 마주쳤던 남자와 다시 만나고, 그가 바로 인터뷰 대상인 유건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반달가슴곰 치료로 지친 유건은 약속된 설과의 인터뷰를 거절하고, 첫 만남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어긋난다. 반복되는 만남 속에서 서로를 의식하게 되던 중, 설의 오랜 친구 태양이 나타나 뒤늦게 마음을 고백하고 설은 혼란을 느낀다.

과거의 상처를 안고 있는 설에게 유건은 말한다.
"이미 부서진 마음은 테이프 덕지덕지 붙인 책이랑 똑같아요. 그 상태로는 예전 그대로 못 돌아간다고. 그러니까 그냥 새 걸로 바꿔요."(314p)

낡은 책을 고치면서도 자신의 마음은 고칠 용기조차 없었던 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믿음을 주는 유건에게 점점 흔들린다. 두 사람은 갈등과 오해를 거치며 서로의 상처를 마주하고, 서서히 회복해 나간다.

이 작품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다시 세우고,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사랑도 복원이 될까요?』라는 제목은 지나간 사랑의 상처 역시 책처럼 다시 복원될 수 있는지 묻는다. 인물들이 서로의 상처를 대면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은 그 질문에 답을 건넨다.

"책을 고치며 배운 첫 번째 사실은 낡고 파손이 심한 책일수록 험해보이는 외양과 달리 따뜻한 사연이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이었다. 책이라는 건 주인이 아끼는 만큼 손때가 묻고 낡는 물건이니까."(76p)

특히 책을 대하는 설의 태도는 인상 깊다. 여러 사람의 손길을 거친 책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고쳐 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사랑과 사람 역시 고칠 수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상처를 딛고 자신만의 선택을 한 설의 모습을 보며, 나의 아픔도 치유받은 듯했다.

설과 유건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윤슬이 반짝이는 섬진강과 달콤한 모과나무의 향이 느껴질 것 같은 화엄사 구층암, 대나무 숲 너머 반전의 공간을 품은 쌍산재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나의 봄이 너의 봄은 아닐 수도 있다"는 태양의 말처럼, 각자의 속도로 찾아오는 봄을 기다리게 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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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셀로 그린 심장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22
이열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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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픽셀처럼 흩어져 있던 존재들이 모여, 심장과도 같은 '사랑'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 거대한 위협 앞에서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하며 공존의 길을 찾아갈 것인가.


2040~2060년대, 초능력을 지닌 능력자들과 일반인이 공존하는 한국을 배경으로 한 《픽셀로 그린 심장》은 14편의 독립된 단편이 하나의 세계관을 이루는 소설이다. 각기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서로 얽히며 하나의 서사로 확장되는 구조가 인상적이다. 작품은 염력, 사이코키네시스, 자가 치유, 기억 조작 등 다양한 초능력을 가진 인물들의 삶을 따라간다.

"자유롭게 능력을 사용하며 100% 자신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었다."(160p)

능력의 유무와 관계없이 '나'로서 살고 싶은 인물들의 바람은, 초능력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해 겪게 되는 상처와 인간관계 속 갈등에 주목하고 있다.

2060년대, 외계 생물체 바르크의 침공으로 한국은 폐허가 되고 사람들은 흩어진다. 혼란 속에서 초능력자들은 "모두가 합심해서 살아남아야 해."(232p)라며 시민들을 지키지만, 그 힘이 커질수록 새로운 '계급'이 생기고, 과거 차별의 기억이 다시 갈등을 일으킨다.

"그래서 언니도 늘 바랐잖아, 함께 어우러져 사는 세상을."(241p)


이 작품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능력을 가진 인물들에 집중한다. 각자의 능력으로 발생하는 문제와 상처, 고립, 이별을 겪으며 인물들은 서로 연결되고 성장한다. 특히 재이는 상처받은 언니 지수에게 말한다.

"난 인간성을 믿어. 다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배려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 믿어."(241p)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배려'라는 메시지는 큰 울림을 준다. 우리 사회 역시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며,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해 온 것도 사실이다. 작품은 그 희생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조용히 던진다.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336p)

이들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 번쯤 초능력을 상상하며 동경하지만, 작품의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에 도달한다.

"만약 특별한 능력이 생긴다면, 우리는 과연 더 행복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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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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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마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후 체포와 수사
그리고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고, 그곳에서 우연히 재회한 우덕순과 함께 거사를 준비한
다. 공모라고는 하지만 둘 사이에는 어떤 말도 오가지 않는다.
눈빛만으로 서로 감당해야 할 자신들의 사명을 확인하며 묵묵히
준비한다. 하얼빈역에서 이토 저격에 성공한 안중근은 저항 없이
체포되고, 수사와 재판을 거쳐 여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 “이토는 철도를 좋아한다는데, 하얼빈역 철길은 총 맞기 좋은
자리다. 나도 철도를 좋아한다. 쏘기도 좋은 자리다.”(117p)

안중근은 이토를 저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인다. 그 모습은 침착함과 차분함을 넘어 감정이 제거된
기계와도 같다. 그 침착함 덕에 그는 목표를 이루고, 법정에서도
끝까지 당당한 태도를 유지한다. 일본인들이 자신들 의도대로
재판을 이끌려 할 때, 안중근과 우덕순은 솔직함으로 질문에
대응한다. 그러나 둘의 뜻은 결국 ”극악한 인간말종이 저지른
범행“으로 왜곡된다.

심지어 순종은 메이지에게 ”오늘 이토 공작이 하얼빈에서 흉악
한 역도에게 화를 당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171p)라고 위로의 전문을 보내며, 그들을 역적
으로 규정한다. 그들의 행동은 일본의 눈에는 오직 그런 모습으
로 남는다.

☕️ 안중근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까지, 그 뒤에는 묵묵히 그를
지켜주는 가족들이 있었다. 특히 아내 김아려의 삶은 처절할
만큼 고단했다.

”……이토가 죽었으니까…… 저이도 곧 죽겠구나……“(199p)

라고 담담히 말하는 그녀는 남편의 거사 이후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 극동 지역, 만주, 상해를 옮겨다니며 살아간다. 조국을
위해 가족을 뒤로한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고, 안중근 역시 그녀
가 그럴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 그런 태연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나라를 위해 가족을 버린 남편을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나는 안중근을 ‘조국을 빛낸 인물’로만 바라봤지만,
그의 삶 뒤에 있는 그녀의 고통과 삶을 떠올리자 너무 안타까웠
다.

☕️ ”이토를 살려놓고 이토를 죽이는 이유를 이토에게 말해주었으
면 좋았겠는데 이토가 죽었다면 이토를 죽인 이유를 이토에게
말해줄 수가 없겠구나.“(193p)

안중근은 목표를 달성했다는 기쁨보다도, 남겨질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보다도 이토에게 “왜 죽여야 했는가“를 직접 설명하
지 못했다는 사실에 비통함을 느낀다. 그는 명확한 이유가 있으
며, 그 이유는 반드시 이토 본인이 알아야 하다고 믿었기 때문이
다.

이토는 죽어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과
후세는 그 뜻을 알고 있다. 안중근의 희생과 업적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현실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을,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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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의 끝
정해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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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인코스메틱 대표 희숙은 어느 날, 아들로부터 “사람을 죽였어”라는 충격적인 전화를 받는다. 곧바로 재선시로 달려간 희숙은 아들의 집에는 시신이 된 현재경과 멍한 상태의 아들을 마주한다. 아들이 살인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그녀는 결국 사건의 뒷처리에 나선다.

한편 사건을 맡은 형사 인우에게도 또 다른 과거가 있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떠난 캠핑에서 혼자 물에 빠지는 사고를 겪고 난 뒤, 눈을 뜬 인우 앞에 남아 있던 것은 아빠의 의문스러운 죽음뿐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 왜 나를 구한 게 엄마가 아니야?“(75p)

아빠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결론에 의문을 품게 된 인우는 점점 엄마를 멀리하게 된다. 그리고 재선시 살인 사건을 맡게 되면서 묶여 있던 진실의 매듭을 조금씩 풀어가기 시작한다.

”엄마라면 그럴 수 없다. 자식을 살인자의 아들로 만들 수는 없어. 그런데도 자기가 죽였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하나뿐이야….자식을 지켜야 할 때. 자식이 살인자일 때.”

꼬이고 얽힌 두 사건의 깊은 곳에는 결국 ‘자식을 위해, 엄마이기 때문에‘라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자리하고 있었다.


☕️ 두 사건은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이유로 이어진다. 그것은 바로 지고지순한 ‘엄마의 사랑‘이다. 아들을 살인자로 만들 수 없었던 두 엄마는 망설임 없는 선택을 했고, 그들의 결단은 내 마음을 울렸다. 아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알게 된 희숙 역시 아들을 원망하기보다, 그저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아직 온전히 알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시작된 두 사건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 나에게 정해연 작가의 첫 작품이었던 홍학의 자리는 전체적인 흐림과 결말이 다소 아쉽게 느껴져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사건의 전개, 인물의 감정, 결말까지 모두 빈틈 없이 완성도가 높았다. 두 사건이 하나의 매듭처럼 서로를 당기고 묶이고, 인우가 그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과정은 몰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작가님의 매력이 이런 것이었구나”하고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 여러 반전 사이를 연결하는 이야기의 흐름이 특히 인상깊었다. 일본 미스터리를 좋아해 온 나에게, 한국 미스터리 역시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확신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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