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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우리는 잠시 매혹적이다
오션 브엉 지음, 김목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2월
평점 :
🏷️ 이 책은 베트남계 미국인이자 성소수자인 작가가 3대에 걸친 가족사와 자신의 성장기를 풀어낸 작품이다.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나열하지 않고, 문득 떠오르는 기억과 경험을 작가 특유의 언어로 엮어낸다. 어머니 '로즈'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서사는, 그녀가 영어를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결코 닿지 못할 진실을 향한 슬픔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소설과 시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적 언어는 작가의 속마음을 그대로 옮긴 듯해, 읽는 내내 애처롭고 애달픈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가난과 폭력,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미국으로의 이민, 전쟁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어머니, 그리고 주인공 '리틀독'이 겪는 성 정체성과 첫사랑의 기억까지, 이 작품은 개인의 삶을 넘어 한 가족의 역사를 보여준다. 할머니 란에서 어머니 로즈, 리틀독으로 이어지는 세 세대의 모습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땅 위에 홀로 떠 있는 '외딴섬'처럼 느껴졌고, 그 섬을 둘러싼 날카로운 덤불은 타인과의 관계를 쉽게 허락하지 못하는 삶을 닮았다.
"이제 와 깨닫지만, 아마도 이것이 왜 사람들이 텔레비전에서 타이거 우즈를 뭐라고 부르는지가 엄마에게 중요했는지, 왜 엄마에게 색이란 것이 고정되는 불가침의 사실일 필요가 있었던 것 같아요."(91p)
▫️눈에 띄게 다른 피부색을 지닌 이민자들에게 현실은 냉혹했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늘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달고 살아야 했던 모습은 자연스럽게 우리 조상들의 삶을 떠올리게 했다. 전쟁으로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려 애쓰는 그들의 모습은, 비슷한 역사를 지닌 나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작가에게 '언어'는 특별하다. 그는 상처 입은 과거를 단순히 기록하지 않고, 나방이 허공을 떠다니듯 모호하게 기억을 그려낸다. '리틀독'을 통해 상처를 언어로 표현하려 애쓰는 모습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시인답게 리듬감과 강한 비유가 돋보이는 문장들은 일부 독자에게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상처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보다, 어떻게 독자에게 그려지는지에 집중하면 그 언어는 점차 익숙해진다.
"내 손주요. 그걸 기억해 주시오."(96p)
▫️어쩌면 우리는 거창한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 약간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같은 상처를 견뎌 내는 가족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 할아버지의 한마디는 아이에게, 거친 세상 속에서도 누군가 나를 보호하고 지켜준다는 작은 믿음을 심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