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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중학생 34명 지음, 한국글쓰기연구회 엮음, 장현실 그림 / 보리 / 2001년 12월
평점 :
(내밀함이 내밀함을 불러 모으는 것일까? 이상은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라 했지만, 이 글을 읽고 나면 거지가 될지라도 비밀을 털어놓고 싶을 테니 죽을 만큼 아프다면, 그런 내밀함을 가졌다면, 이 책을 샀다하더라도 읽지는 말 것, 그 내밀함에 새살이 돋을 때까지 읽지 말고 가지고만 있을 것. 대신 나는 쓰는 듯 안 쓰기로 한다.)
농민운동이다 민주화운동이다 밖으로만 나돌던 아버지에게 집도 못 간수하면서 민주화가 가당키나 하냐며 대들었던 형에 대해, 그래서 형의 주댕이가 얼마나 부어올랐는지에 대해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살아서 무엇하냐며 죽어야 일을 고마하지, 라고 입버릇처럼 외던 어머니에 대해, 그러다 싸움이나서 하필이면 하나뿐인 TV를 아버지가 부셔버린 일에 대해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메칸더V가 오메가 미사일에 파괴되려 했던 절체절명의 순간 부서져버린 TV에 대해, 아니 TV를 보지 못해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나에 대해, 그래서 내가 얼마나 자주 울어야 했는지에 대해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키스라는 것을 처음 했던 열여섯의 나이에 왜 눈물이 났는지에 대해, 그 여자 친구와 어떻게 헤어졌는지에 대해, 석 달이나 지난 뒤, 세수를 하다말고 쏟아진 눈물에 대해, 같이 놀던 남자친구들과 가출한 그 애가 결국은 술집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냉소를 지어버렸던 일에 대해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대신 나는 이 내밀함에 대해 쓰려 한다.)
쓸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써버린 것들과 쓸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한 것들, 이것들은 나의 어디에서 살아, 살아나오는 것일까. 이것들을 꺼내어 무말랭이 말리 듯 펼쳐 놓으면 지금의 내가 말려지는 것일까, 그때의 내가 말려지는 것일까. 내밀한 것들은 내밀한 것들끼리 친화력이 있는 것일까. 그래서 내밀한 것들이 내밀한 것들을 불러 모은 것일까. 내밀한 것들이 정말 내밀하다면 그것들이 쏟아지고 난 뒤, 이렇게 글이 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내밀한 것일까.
아니리라. ‘이건 비밀인데’라고 말할 때 비밀을 싸안고 있던 알 수 없던 것들의 장막이 걷히고 비밀은 그 알몸을 드러내게 되리라. 내밀한 것들이 나의 삶의 영역으로 떠오르고 내가 거기까지 발 디딜 수 있게 되리라. 그렇다면 글을 쓴다는 것은 내 내면의 극한에 이르는 일이며, 늘 있었으되 잊지 않다고 믿었던 마음의 영역에 발을 내딛는 일일 것이리라. 그리하여 그 영역을 알게 되는 일이리라. 알 수 없고, 막연히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여겼던 것들이 결국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그런 지점을 발견하는 일이리라. 모기에게 발바닥을 물린 사람처럼 그 부은 자리를 긁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그러다가 그 자국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면 그리하여 그리워지리라. 그리하여 영영 잊으리라. 그리하여 삶의 영역으로 변하리라. 삶이 안 되고서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여전히 남는 문제 둘. 하나. 말이 되어지더라도 여전히 말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남을 것이다. 그것을 빼놓았기에 이미 말 되어진 것들이 왜곡되었는지도 모른다. 둘, 내밀한 것들이 내밀하다면 쓸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남아 있는 이것들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