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효과들: 칸트와 맹자

 

칸트: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으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

 

맹자: 稷當平世三過其門而不入孔子賢之顏子當亂世居於陋巷一簞食一瓢飲人不堪其憂顏子不改其樂孔子賢之孟子曰:「顏回同道禹思天下有溺者由己溺之也稷思天下有飢者由己飢之也是以如是其急也顏子易地則皆然今有同室之人鬥者救之雖被髮纓冠而救之可也鄉鄰有鬥者被髮纓冠而往救之則惑也雖閉戶可也。」(맹자집주, 253)

우왕과 후직이 평세를 당하여 세 번 그 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못하시자 공자께서 그들을 어질게 여기셨다. 안자가 난세를 당하여 누추한 골목에서 거처하며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음료로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안자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자 공자께서 그를 어질게 여기셨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우왕과 후직과 안회는 도가 같다. 우왕은 생각하시기를 천하에 물에 빠진 자가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를 빠뜨린 것과 같이 여기시며, 후직은 생각하기를 천하에 굶주리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를 굶주리게 한 것처럼 여겼으니, 이 때문에 이와 같이 급하게 하신 것이다. 우왕과 후직과 안자가 처지를 바꾸면 다 그러하셨을 것이다. 이제 한 방에 같이 있는 사람이 싸우는 자가 있으면 이를 말리되, 비록 머리를 그대로 풀어 흩뜨리고 갓끈만 매고 가서 말리더라도 가한 것이다. 향리와 이웃에 싸우는 자가 있으면 머리를 풀어 흩뜨리고 갓끈만 매고 가서 말린다면 혹한 것이니, 비록 문을 닫더라도 가한 것이다.

 

 

 

 

칸트의 이 말은 보편성을 추구하라는 말일 것이다. 맹자식으로 말하자면 역지사지(易地思之)하라는 것. 하지만 역지사지하라.’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으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더 효과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간지난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칸트식의 말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은 우리 인식의 현주소이기도 할 것인데, 우리는 동양적이기보다는 훨씬 더 서양적인 지반 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칸트의 말의 방점은 보편성에 있다. 맹자의 易地則皆然만을 딱 떼어놓고 본다면 칸트의 말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이 구절이 적힌 전체 구절을 들여다보면 보편성보다는 처지와 상황에 따른 태도의 유동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근거로 비약해서 말하자면 보편성의 추구, 혹은 보편성이라는 개념 자체는 전적으로 서양적인 것이다. 그 일례로 동양에는 선()은 있어도 악()은 없다. (동양에 선과 대립되는 개념은 차라리 오().) 동양은 선과 악의 명징한 대립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절대적 선 혹은 보편적인 선이라는 것 자체가 없으니까. 오직 상황과 처지에 따른 유동하는 정신만이 존재한다.

 

또 그런데 이것을 더욱 간지나게 말하려면 푸코의 배치를 사용하라. 지금 여기의 우리는 동양적이기 보다는 서양적이니까, 그래서 동양적 사유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역으로 서양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더 쉽고 빠르다. <<사물의 성향>>은 그 좋은 예다. 이 책은 동양의 사유를 푸코의 구조와 배치로 설명하고 있으며 밀도도 높다. 정말 좋은 책은 당연 도올이다. 그의 책이 엄밀한 의미에서 학문적 글쓰기와 멀다고 하더라도, 그의 언어가 경박하게 들릴 수 있다하더라도, 그의 사유는 탁월하다. 특히 <<아름다움과 추함>>을 권한다. 이 책을 정독하고 나면 당신도 당당히 도올빠를 자처할 수 있을 것이다. 

 

2. 자살: 맹자와 벤야민

 

可以取, 可以無取, 取 傷廉, 可以與, 可以無與, 與 傷惠, 可以死, 可以無死, 死 傷勇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얼핏 보면 취할 만하고 자세히 보면 취하지 말아야 할 경우에 취하면 청렴을 상하며, 얼핏 보면 줄 만하고, 자세히 보면 주지 말아야 할 경우에 주면 은혜를 상사며, 얼핏 보면 죽을 만하고, 자세히 보면 죽지 말아야 할 경우에 죽으면 용맹을 상한다.

 

이 역시 변화와 변동에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맹자는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 필요하면 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 때에 맞게 말이다. 이러한 맹자의 자살론’(?)과 달리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파괴적 성격은 인생이 살 값어치가 있다는 감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살할 만한 값어치가 없다는 감정에서 살아가는 것이다.”(29면)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렇게 말한 벤야민은 자살했다.

적어도 동양에서 신체는 국가의 규율대상이 아니다. 사는 것 자체보다 삶의 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준거다. 서양은 명백히 몸, 신체의 목숨을 중시한다. 하지만 동양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름이다. 적절한 때의 자살은 몸의 목숨을 죽여 이름을 살아 가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이름은 그렇게 오래도록 유전한다. 그러므로 죽을 수 있을 때 죽을 수 있기를 강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세 개의 한글판본과 이벤트

 

민음사, 문학동네, 더 클래식에 나온 󰡔위대한 개츠비󰡕를 올해 425일에 샀다. 그 세 권을 합한 가격이 한 권 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12700원이다. 지금(2013.6.14.)도 이 세 권을 함께 사면 11670원이다. 일찍 산 덕에 무려 1030원이나 손해를 본 셈이다. 하지만 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선착순 이벤트를 하던 때여서 문학동네로부터 <위대한 개츠비> 영화티켓을 받아서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었고 더 클래식으로부터는 세계문학 컬렉션 이북(e-book)을 받게 될 예정이다. (당첨된 지가 언젠데 아직 안 주고 있다.) 여하튼 책을 사고 돈을 번 셈이다. 영화를 보려고 이 책을 샀던 것인데 정작 영화를 개봉하고도 읽지 못하다가 이제야 이 책들을 읽게 되었다 

 

서로 다른 번역가가 번역한 서로 다른 한글판본이 있는데다가 영문판까지 주기 때문에 이것들을 비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실 그러려고 사긴 했지만……. 어떤 한글판을 보는 것이 더 좋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권 다 사서 보기 바란다. 책값이 싼데다가 아직도 이벤트 중이니 정말 돈을 벌었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한글판을 보는 것이 더 좋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권 다 사서 보기 바란다. 책값이 싼데다가 아직도 이벤트 중이니 정말 돈을 벌었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저마다 장점을 가지고 있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이 소설에서 번역하기 민감한 부분을 어떻게 번역하였는지 살펴보겠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그런데 영문판 때문에 이 책을 사려한다면 문학동네를 추천한다. 민음사는 영문판을 이북으로 제공하지만, 문학동네는 종이책으로 제공한다. 더 클래식은 글자가 작고 자간이 좁아서 가독성이 떨어진다. 민음사는 원본이 1991년 캠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만든 󰡔위대한 개츠비󰡕결정판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다른 출판사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모르긴 몰라도, 민음사와 동일한 판본을 쓰고 있는 듯하다.

 

 

 

2. 개츠비의 신념

<<위대한 개츠비>>에서 중요한 부분은 개츠비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 주는 이 소설의 제일 앞부분이다. 의미론상 두 번째 문단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텐데, 서술자인 닉(Nick)은 개츠비라는 인물을 만난 후, 남들과는 클래스가 다르다는 식의 오만한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닉과 같은 시선을 가진 사람은 모든 사람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이를 테면 노무현이나 이명박이 다를 것이 없다, 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사람이란 그냥 그저 그렇고 그렇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일 것이다. 더욱이 개츠비는 닉이 경멸하는 모든 것들을 가진 인물이니, 개츠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닉은 오만하고 특권적인 시선으로 개츠비를 평가할 수 없다고 말한다개츠비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츠비를 만난 후 다른 사람을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닉은 개츠비를 만난 후 변해버린 것이다. 이제 노무현과 이명박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왜일까? 개츠비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지진계를 감지하는 바늘처럼 매우 미미한 것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비록 작가가 개츠비의 이러한 인성을 낭만적 민감성’(romantic readiness)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것을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1920년대라는 호황 속에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만이 유일한 가치였던 시대에 개츠비는 순진하리 만치 인간을 믿었고, 그 믿음을 끝끝내 버리지 않은 그런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대한 조사(弔辭).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표현들이 개츠비(Gatsby)를 묘사하는 부분, 그것도 다른 사람을 대하는 개츠비의 태도를 묘사하는 부분에 섬세한 표현들이 포진해 있다는 것이 그 방증일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매우 신중을 기하여 번역할 필요가 있다.

 

3. 개츠비의 미소

개츠비가 인간을 진실로 믿고, 진실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은 두 곳이다. 하나는 파티장에서 닉에게 미소를 지어보일 때, 또 다른 한 번은 데이지를 바라봐 줄 때다. 우선 개츠비의 미소다.

 

He smiled understandingly--much more than understandingly. It was one of those rare smiles with a quality of eternal reassurance in it, that you may come across four or five times in life. It facedor seemed to facethe whole external world for an instant, and then concentrated on you with an irresistible prejudice in your favor. It understood you just so far as you wanted to be understood, believed in you as you would like to believe in yourself and assured you that it had precisely the impression of you that, at your best, you hoped to convey.

 

김욱동(민음사): 그는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려 깊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미소였다. 영원히 변치 않을 듯한 확신을 내비치는 평생 가도 네댓 번밖에는 만날 수 없는 보기 드문 미소 말이다. 한순간 외부 세계를 대면하고 있는또는 대면하고 있는 듯한미소였고, 또한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으며 당신에게 온 정신을 쏟겠다고 맹세하는 듯한 미소였다. 당신이 이해받고 싶은 만큼 당신을 이해하고 있고, 당신이 스스로 믿는 만큼 당신을 믿고 있으며, 당신이 전달하고 싶어 하는 최상의 호의적인 인상을 분명히 전달받았노라고 말해 주는 그런 미소였던 것이다.

 

김영하(문학동네): 그가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려 깊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그것은 변치 않을 확신이 담긴, 일생에 네다섯 번쯤밖에 마주치지 못할 특별한 성질의 것이었다. 잠깐 전 우주를 직면(혹은 직면한 듯)한 뒤, 이제는 불가항력적으로 편애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노라는, 그런 미소였다. 당신이 이해받고 싶은 바로 그만큼을 이해하고 있고, 당신이 전달하고 싶어 하는 호의적인 인상의 최대치를 분명히 전달받았노라 확신시켜주는 미소였다.

 

이기선(더 클래식): 개츠비는 이해한다는 듯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단순히 사려 깊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긴 인상적인 미소였다. 변치 않을 확신이 담긴 미소, 평생에 네다섯 번밖에 볼 수 없는 특별한 무언가를 갖고 있었다. 잠시 온 우주를 직면한 뒤에 거역할 수 없는 애정으로 당신에게 집중하겠다는 미소였다. 내가 이해받고 싶은 대로 자기도 나를 이해할 것이며, 또 내가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만큼 자기도 나를 믿고 있으며, 내가 전달하고 싶어 하는 호의적인 인상을 분명히 전달받았다고 확인시켜 주는 미소였다.

 

당신이 전달하고 싶어 하는 호의적인 인상의 최대치를 분명히 전달받았노라 확신시켜주는 미소를 받아본 사람은 결코 애정결핍을 따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미소의 어디에도 가식이 들어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오직 인간을 무한히 긍정할 수 있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 평생 살면서 그런 미소를 네댓 번이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행운아일 것이다. 그런 미소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신일 테니 말이다. 

이 세 개의 번역에서 직접적인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It facedor seemed to facethe whole external world for an instant, and then concentrated on you with an irresistible prejudice in your favor.”이다.

민음사의 번역은 오역으로 보이며, 문장이 매끄럽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문학동네의 번역이 원문에 충실하면서 의미전달 역시 분명하다. “잠깐 전 우주를 직면(혹은 직면한 듯)한 뒤"라고 번역한 부분이 조금 더 매끄러웠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더 클래식의 경우 번역가가 아동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인지 모르나 의미를 쉽고 간결하게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다. 너무 의미전달에 집중하기 때문에 피츠제럴드의 만연체의 풍성한 느낌을 살려내지 못한다. 그리고 다음 부분은 오역을 범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Only Gatsby, the man who gives his name to this book, was exempt from my reactionGatsby who represented everything for which I have an unaffected scorn. If personality is an unbroken series of successful gestures, then there was something gorgeous about him, some heightened sensitivity to the promises of life, as if he were related to one of those intricate machines that register earthquakes ten thousand miles away.

 

이기선(더 클래식): 다만 이 책의 제목이 되어 준 남자, 개츠비만이 이런 삐딱한 시선을 비껴간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진실로 경멸하는 것들과 전혀 맞닿지 않은 인물이었다. 인간의 개성이 성공적인 몸짓의 끊임없는 연속선이라고 한다면, 개츠비는 화려하면서도 민감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16천 킬로미터 밖에서도 지진을 탐지해 내는 세미한 기계처럼 그는 인생에서 희망을 감지하는 무언가를 갖고 있었다.

 

김욱동(민음사): 오직 이 책에 이름을 제공해 준 개츠비만이 내가 이러한 식으로 반응하지 않은 예외적인 인물이었다내가 드러내 놓고 경멸해 마지않는 것을 모두 대변하는 개츠비 말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개성이라는 게 일련의 성공적인 몸짓이라면 그에게는 뭔가 멋진 구석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개성이라는 게 일련의 성공적인 몸짓이라면 그에게는 뭔가 멋진 구석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김영하(문학동네): 오직 이 책에 이름을 제공한 개츠비, 내가 내놓고 경멸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바로 그 인물에게만은 다른 기준을 적용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개성이라는 게 결국 일련의 성공적인 제스처라고 한다면 그에겐 정말 대단한 것이 있었다. 1만 마일 밖의 흔들림까지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그는 인생에서 희망을 감지하는 고도로 발달된 촉수를 갖고 있었다.

 

“Gatsby who represented everything for which I have an unaffected scorn.”그는 내가 진실로 경멸하는 것들과 전혀 맞닿지 않은 인물이었다.”와 같이 번역한 것은 꼭 오역이라기보다는 의미전달을 명료하게 하기 위한 의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닉은 개츠비를 긍정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갑자기 내가 진실로 경멸하는 것을 모두 가진 인물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기성처럼 번역한다면, 이러한 오해를 없앨 수는 있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을 연결시킬 수는 없다.

피처제럴드가 개츠비를 “an unaffected scorn.”이라고 부른 것은 매우 의도적이다. 이 부분은,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 의해 전복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개츠비의 특성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 부분을 매우 명민하게 처리한 것은 김욱동(민음사)이다. 김영하(문학동네)처럼 번역을 하게 되면 독자들은 왜 개츠비가 “an unaffected scorn.”인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김욱동은 영어선생님답게 그 의도를 분명히 알아차리고 그러나 만약이라는 접속사를 붙여 주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개츠비는 톰과 데이지 같은 경멸의 범주의 대상에서 벗어나 특별한 개성을 부여 받을 수 있게 된다. 자고로 훌륭한 번역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4. 개츠비의 눈빛

개츠비가 미소를 통해 자신의 진정성을 닉에게 보여주었다면, 데이지에게는 이에 상응하는 것이 개츠비의 눈빛이다. 그 부분은 조던이 4년 전, 데이지와 함께 있는 개츠비를 만났을 때의 인상을 전하는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데이지의 흰색 로드스터에서 그녀와 개츠비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데이지는 개츠비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 행복했었나보다. 그래서 지나가던 조던을 불러 세워 자신이 적십자사에 일하러 갈 수 없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데이지와 조던이 이야기하는 사이에도 개츠비는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 기다림과 기다림의 자세를 피처제럴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The officer looked at Daisy while she was speaking, in a way that every young girl wants to be looked at sometime, and because it seemed romantic to me I have remembered the incident ever since.”

김영하(문학동네): 그 장교는 데이지가 말하는 모습을 지그시, 그 또래 여자들이 한 번만 받아봤으면 하는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더라구요. 너무 로맨틱해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예요.

김욱동(민음사): 그 장교가 데이자가 말하는 동안 줄곧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젊은 아가씨라면 누구나 받고 싶을 만한 그런 시선이었지요. 제게는 무척 로맨틱해 보여 지금까지도 기억이 나요.

 

모든 여성들이 한 번 쯤 받고 싶을 법한 그런 눈빛은 어떤 것일까. 개츠비는 아마 데이지를 자신의 눈 속에 고스란히 담아 사랑의 감정을 덧씌워 데이지를 제자리로 돌려놓았을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이해받고 싶은 만큼 당신을 이해하고 있고, 당신이 스스로 믿는 만큼 당신을 믿고 있으며, 당신이 전달하고 싶어 하는 최상의 호의적인 인상을 분명히 전달받았노라고 말해 주는 그런미소와 닮아 있는 그런 눈빛이다. 여기에 결핍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완벽하고 영원한 일치, 키냐르가 말하는 성교에 가까운,한순간의 아찔한 동반자. 녹아 퍼지는 순간 나른하게 떨어지는 순간, 그들은 속삭인다. 그들의 사지를 죽도록 밀착시켜 두 몸이 더 이상 분간되지 않게 한다.”, 것이리라.

이러한 부분을 잘 표현하려면, 데이지가 조던과 말하고 있었다는 것과 모든 여성들이 원하는 시선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데이지가 말하는 동안 줄곧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는데라는 번역은 훌륭하다. 데이지와 내가라고 주어를 바꾸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김영하처럼 “young girl”그 또래 여자들이라고 하는 것도 좋지만, “young”을 과감히 삭제하고 모든 여성들이라고 해도 되었을 것이다. 어떤 여성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츠비의 눈빛이 중요하니까 말이다.

 

5. 정리

정리하자면 그렇다.

김욱동의 번역은 원작에 충실하면서 의미를 명료하게 전달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냥 소설이 아니라 번역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게끔 만들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번역 한 지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연세가 있으신 분의 번역이라 그런지 젊은 감성을 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김영하의 번역은 젊은 감성에 맞게 매우 재기발랄한 번역을 선보였다. 하지만 너무 젊은 독자를 의식해서 인지 단어의 선택들이 지나치다 싶은 것이 많으며 그로 인해 원작의 서정성이 손상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기선의 번역은 쉽고 명료하다. 그래서 전달력은 빠르다. 하지만 왜 피츠제럴드가 대단한가를 실감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연들 마지막 왕국 시리즈 3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키냐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 앞에 무릎 꿇는 일을 망설일 필요는 없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연들 마지막 왕국 시리즈 3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욕망은 자기에서 나오게 한다. 공간 이편에서 나오게 한다. 암수 구별된 생체는 상동성idem에서 나온다.  

시간의 두 조각은 돌연 서로 황홀해지며 편극된다.

이 두 경우, 편극성은 축이 형성되는 지점에서 특히 강하다. 이 축과 이 긴장성이 향방의 정도를 결정한다. 욕망은 증가하다 돌연한 상호성으로 시간의 벽에 부딪히는가 싶게 부서진다(시간 자체는 비가역적인데, 갑작스레 내부에 가역성이 생김으로써 제안에서 부서지는 것이다).

양극은 이토록 기이하게 팽창한다.

이것이 성교co-ire.

Ire는 라틴어로 가다라는 뜻이다. 성교는 한순간 함께 헤매는 일이다.

한순간의 동반자.

한순간의 아찔한 동반자. 녹아 퍼지는 순간 나른하게 떨어지는 순간, 그들은 속삭인다. 그들의 사지를 죽도록 밀착시켜 두 몸이 더 이상 분간되지 않게 한다.

언어는 두 대화자가 호환 가능한 장소이다. 거기서 상이성은 포기된다. 성적 편극성은 포기된다. 언어는 편극이 감극되는 곳으로, 거기서 양성성은 망각되고 인간들은 서로 호환된다. 언어에서 교환되는 종신적인 나je라는 주어는 성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어 욕망이 다시 태어난다. 시간이 다시 태어난다. 봄이 다시 태어난다. 분리가 다시 태어난다. 차이가 다시 태어난다.

 

===================================

성교 뒤에 이어지는 '사랑해'라는 말은 둘을 비로소 소통하게 만든다. 그 말 속에서 연인은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한 몸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때 '나'라는 단어가 비로소 '나'라는 의미를 분명하게 갖게 된다. '나'란 본래 이런 것이다. "'나'라는 말에는 성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나'는 결코 독립적일 수 없다. '너'가 없다면 '나'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정윤은 <홀로서기>에서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첨언하자면, 그렇게 만난 둘의 완전한 결합 속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사랑이 아니면 '나'가 '나'로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은 휙 지나쳐 버리고 만다. 왜 욕망은 부서지고 마는 것일까, 왜 양성성이 망각되고 인간이 서로 호환되는 지점은 지속될 수 없는 것일까. 키냐르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갑작스레' 또는 '이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만큼 분명하다. 원자의 핵과 핵은 단 한 번의 충돌만으로도 우주를 만들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의 만남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사랑은 더 넓은 우주 속에서 '너'가 있음을 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 발터 벤야민 선집 3
발터 벤야민 지음, 윤미애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1. 이미지=()=몸짓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은 옮긴이의 지적처럼 유년시절[] 기록[] 감상적·회고적 성격의 글이 아니, “유년시절을 이상화하거나 미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벤야민이 스스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이미지를 붙잡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이 책을 독해하는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이미지는 어떤 대상이 전달하는 인상이 아니다. 인상이란 이미 인간의 마음에서 여과된 어떤 상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이미지는 순수한 상 그 자체이다. 비인격적인 어떤 것이며, 인간의 이해범주를 넘어선 상()으로만 오직 상으로만 존재한다. 이것을 그의 다른 용어로 바꾸자면 몸짓/제스처일 것이다. 카프카가 인디언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말한 그런 몸짓이다.

 

······달리는 말에 서슴없이 올라타고,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땅 위에서 이따금씩 짧게 전율을 느낄 수 있다면, 마침내는 박차도 내던지고, 왜냐하면 박차 따윈 있지도 않았으니까, 또 말고삐도 내던지고, 왜냐하면 말고삐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으니까, 드디어는 대지가 매끈하게 깎아 놓은 황야처럼 보이자마자 이미 말의 목덜미도 말의 머리도 보이지 않으리라(󰡔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재인용, 94).

박차도, 말고삐도, 말도 없어지는 상태, 그러니까 말을 타고 달리겠다는 욕망까지도 소멸된 상태의 몸짓. “책장을 넘기고, 종종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다른 책을 항상 전광석화처럼 재빨리 집어오기도 하고, 때로는 노트에 무엇인가를 기입해 넣기도 하며, 그럴 때는 항상 얼굴을 갑자기 노트 속에 깊이 파묻기도 하는그런 몸짓이다(93). “그 몸짓은 연구되기만 하고 더 이상 실행되지 않는 법이다(95). “휙 스쳐 지나가는진정한 상이다(345).

그러므로 이것에는 어떤 목적, 의도, 필연성 따위가 전혀 없는 무구한 더 정확히는 허무하기까지 한 어떤 것이다. 아감벤식으로 말하자면, 이미지화된 욕망이자, 욕망으로부터 이미지가 분리된 상태이다. 즉 순수 언어다. 이미지화된 욕망에는 욕망이 없으며, 의미도 목적도 없다. 욕망의 몸짓만 남아 있는, 순수한 몸짓을 말한다. 이와 유사하다면 소외효과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소외효과가 작동할 때 줄거리는 사라지고 상황은 드러나게 된다. 이때 상황이란 어떤 맥락도 연관도 없는, 의미도 목적도 없는 하나의 몸짓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몸짓을 끌어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몸짓으로부터 전통적 토대를 탈취해서는 그 토대에서 끝을 모르는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74).

 

2. 현재의 알레고리로서의 유년

벤야민의 이미지(몸짓 혹은 제스처)는 의미 없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들을 기억할 수 없다. 의식화 되는 것들, 우리의 사유 망에서 관찰될 수 있는 것들만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들만 기억할 수 있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휙 스쳐 지나가버리는 (진정한) 상으로만 존재한다. 과연 이러한 진정한 상을 기억해낼 수 있을까? 자신이 의식할 수도 없었던 것, 기억의 형태로 남아있지도 않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불수의적이고 무의지적인 기억들을 되살릴 수 있기는 한 것일까?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유년시절[] 기록[] 감상적·회고적 성격의 글이 아니라는 옮긴이의 말은 보다 엄밀히 사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벤야민은 회고할 수 없는, 정확히는 회고될 수 없는 것을 회고하려 했기 때문이다. 정말 이것이 가능하긴 한 것일까?

그것은 프루스트가 꽁브레 마을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방식이로 가능했다. 즉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일들이 아침이슬처럼 일순간에 반영되는그러한 회생(回生)현재, 지나간 과거를 끌어 모을 수 있는 현재를 찾는 일이다. 이 책에서의 흐릿한 창문 뒤에서 시간을 보낼 때면 내 마음은 수달에게 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차린 것은 다음번에 수달 우리 앞에 서 있을 때였다.”와 같은 구절들이 이러한 사유를 반영하고 있다.

그의 글쓰기는 자신의 현재를 탐구함으로써, 그 현재에 천착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과거의 회상이나 이를 토대로 한 감상이 아니다. 그가 살았던 1930년대에 대한 철저한 기록이다. 그가 기록한 것은 그의 현재이지 결코 과거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현재의 알레고리다.

 

 

3. 사유의 알레고리로서의 유년

또한 이 책은 벤야민의 사유의 알레고리며 벤야민 철학의 축약본이다.

 

한 번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 동판화’(Kupferstich)라는 단어를 발음했는데, 이러한 우연이 초래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나는 의자 아래에서 머리를 쑥 내밀어보았다. 그것은 바로 머리 찌르기’(Kopf-verstich)였다. 그때 나는 내 자신과 단어를 왜곡시켰는데, 그것은 내가 삶 안에 자리를 잡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다(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81).

이러한 말들은 벤야민의 언어이론이나 번역이론에 대응한다.

 

이 자연적 상응물들은 우리가 그것들이 모두 인간이 지닌 미메시스 능력을 (인간은 이 미메시스 능력을 통해 그에 대답하는데) 자극하고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비로소 결정적인 의미를 얻는다(유사성론, 200~201).

벤야민은 머리 찌르기를 통해 인간이 지닌 미메시스 능력을 일깨웠으며, 그리하여 “[보다] 큰 언어의 파편으로 인식되도록하였다(번역자의 과제, 1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