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효과들: 칸트와 맹자
칸트: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으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
맹자: 禹、稷當平世,三過其門而不入,孔子賢之。顏子當亂世,居於陋巷,一簞食,一瓢飲,人不堪其憂,顏子不改其樂,孔子賢之。孟子曰:「禹、稷、顏回同道。禹思天下有溺者,由己溺之也;稷思天下有飢者,由己飢之也;是以如是其急也。禹、稷、顏子,易地則皆然。今有同室之人鬥者,救之,雖被髮纓冠而救之可也。鄉鄰有鬥者,被髮纓冠而往救之,則惑也,雖閉戶可也。」(맹자집주, 253면)
우왕과 후직이 평세를 당하여 세 번 그 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못하시자 공자께서 그들을 어질게 여기셨다. 안자가 난세를 당하여 누추한 골목에서 거처하며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음료로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안자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자 공자께서 그를 어질게 여기셨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우왕과 후직과 안회는 도가 같다. 우왕은 생각하시기를 천하에 물에 빠진 자가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를 빠뜨린 것과 같이 여기시며, 후직은 생각하기를 천하에 굶주리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를 굶주리게 한 것처럼 여겼으니, 이 때문에 이와 같이 급하게 하신 것이다. 우왕과 후직과 안자가 처지를 바꾸면 다 그러하셨을 것이다. 이제 한 방에 같이 있는 사람이 싸우는 자가 있으면 이를 말리되, 비록 머리를 그대로 풀어 흩뜨리고 갓끈만 매고 가서 말리더라도 가한 것이다. 향리와 이웃에 싸우는 자가 있으면 머리를 풀어 흩뜨리고 갓끈만 매고 가서 말린다면 혹한 것이니, 비록 문을 닫더라도 가한 것이다.
칸트의 이 말은 보편성을 추구하라는 말일 것이다. 맹자식으로 말하자면 역지사지(易地思之)하라는 것. 하지만 ‘역지사지하라.’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으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더 효과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간지난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칸트식의 말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은 우리 인식의 현주소이기도 할 것인데, 우리는 동양적이기보다는 훨씬 더 서양적인 지반 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칸트의 말의 방점은 보편성에 있다. 맹자의 “易地則皆然”만을 딱 떼어놓고 본다면 칸트의 말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이 구절이 적힌 전체 구절을 들여다보면 보편성보다는 처지와 상황에 따른 태도의 유동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근거로 비약해서 말하자면 보편성의 추구, 혹은 보편성이라는 개념 자체는 전적으로 서양적인 것이다. 그 일례로 동양에는 선(善)은 있어도 악(惡)은 없다. (동양에 선과 대립되는 개념은 차라리 오(惡)다.) 동양은 선과 악의 명징한 대립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절대적 선 혹은 보편적인 선이라는 것 자체가 없으니까. 오직 상황과 처지에 따른 유동하는 정신만이 존재한다.

또 그런데 이것을 더욱 간지나게 말하려면 푸코의 ‘배치’를 사용하라. 지금 여기의 우리는 동양적이기 보다는 서양적이니까, 그래서 동양적 사유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역으로 서양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더 쉽고 빠르다. <<사물의 성향>>은 그 좋은 예다. 이 책은 동양의 사유를 푸코의 구조와 배치로 설명하고 있으며 밀도도 높다. 정말 좋은 책은 당연 도올이다. 그의 책이 엄밀한 의미에서 학문적 글쓰기와 멀다고 하더라도, 그의 언어가 경박하게 들릴 수 있다하더라도, 그의 사유는 탁월하다. 특히 <<아름다움과 추함>>을 권한다. 이 책을 정독하고 나면 당신도 당당히 도올빠를 자처할 수 있을 것이다.
2. 자살: 맹자와 벤야민
可以取, 可以無取, 取 傷廉, 可以與, 可以無與, 與 傷惠, 可以死, 可以無死, 死 傷勇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얼핏 보면 취할 만하고 자세히 보면 취하지 말아야 할 경우에 취하면 청렴을 상하며, 얼핏 보면 줄 만하고, 자세히 보면 주지 말아야 할 경우에 주면 은혜를 상사며, 얼핏 보면 죽을 만하고, 자세히 보면 죽지 말아야 할 경우에 죽으면 용맹을 상한다.
이 역시 변화와 변동에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맹자는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 필요하면 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 때에 맞게 말이다. 이러한 맹자의 ‘자살론’(?)과 달리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파괴적 성격은 인생이 살 값어치가 있다는 감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살할 만한 값어치가 없다는 감정에서 살아가는 것이다.”(29면)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렇게 말한 벤야민은 자살했다.
적어도 동양에서 신체는 국가의 규율대상이 아니다. 사는 것 자체보다 삶의 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준거다. 서양은 명백히 몸, 신체의 목숨을 중시한다. 하지만 동양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름이다. 적절한 때의 자살은 몸의 목숨을 죽여 이름을 살아 가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이름은 그렇게 오래도록 유전한다. 그러므로 죽을 수 있을 때 죽을 수 있기를 강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