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 발터 벤야민 선집 3
발터 벤야민 지음, 윤미애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1. 이미지=()=몸짓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은 옮긴이의 지적처럼 유년시절[] 기록[] 감상적·회고적 성격의 글이 아니, “유년시절을 이상화하거나 미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벤야민이 스스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이미지를 붙잡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이 책을 독해하는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이미지는 어떤 대상이 전달하는 인상이 아니다. 인상이란 이미 인간의 마음에서 여과된 어떤 상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이미지는 순수한 상 그 자체이다. 비인격적인 어떤 것이며, 인간의 이해범주를 넘어선 상()으로만 오직 상으로만 존재한다. 이것을 그의 다른 용어로 바꾸자면 몸짓/제스처일 것이다. 카프카가 인디언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말한 그런 몸짓이다.

 

······달리는 말에 서슴없이 올라타고,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땅 위에서 이따금씩 짧게 전율을 느낄 수 있다면, 마침내는 박차도 내던지고, 왜냐하면 박차 따윈 있지도 않았으니까, 또 말고삐도 내던지고, 왜냐하면 말고삐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으니까, 드디어는 대지가 매끈하게 깎아 놓은 황야처럼 보이자마자 이미 말의 목덜미도 말의 머리도 보이지 않으리라(󰡔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재인용, 94).

박차도, 말고삐도, 말도 없어지는 상태, 그러니까 말을 타고 달리겠다는 욕망까지도 소멸된 상태의 몸짓. “책장을 넘기고, 종종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다른 책을 항상 전광석화처럼 재빨리 집어오기도 하고, 때로는 노트에 무엇인가를 기입해 넣기도 하며, 그럴 때는 항상 얼굴을 갑자기 노트 속에 깊이 파묻기도 하는그런 몸짓이다(93). “그 몸짓은 연구되기만 하고 더 이상 실행되지 않는 법이다(95). “휙 스쳐 지나가는진정한 상이다(345).

그러므로 이것에는 어떤 목적, 의도, 필연성 따위가 전혀 없는 무구한 더 정확히는 허무하기까지 한 어떤 것이다. 아감벤식으로 말하자면, 이미지화된 욕망이자, 욕망으로부터 이미지가 분리된 상태이다. 즉 순수 언어다. 이미지화된 욕망에는 욕망이 없으며, 의미도 목적도 없다. 욕망의 몸짓만 남아 있는, 순수한 몸짓을 말한다. 이와 유사하다면 소외효과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소외효과가 작동할 때 줄거리는 사라지고 상황은 드러나게 된다. 이때 상황이란 어떤 맥락도 연관도 없는, 의미도 목적도 없는 하나의 몸짓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몸짓을 끌어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몸짓으로부터 전통적 토대를 탈취해서는 그 토대에서 끝을 모르는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74).

 

2. 현재의 알레고리로서의 유년

벤야민의 이미지(몸짓 혹은 제스처)는 의미 없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들을 기억할 수 없다. 의식화 되는 것들, 우리의 사유 망에서 관찰될 수 있는 것들만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들만 기억할 수 있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휙 스쳐 지나가버리는 (진정한) 상으로만 존재한다. 과연 이러한 진정한 상을 기억해낼 수 있을까? 자신이 의식할 수도 없었던 것, 기억의 형태로 남아있지도 않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불수의적이고 무의지적인 기억들을 되살릴 수 있기는 한 것일까?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유년시절[] 기록[] 감상적·회고적 성격의 글이 아니라는 옮긴이의 말은 보다 엄밀히 사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벤야민은 회고할 수 없는, 정확히는 회고될 수 없는 것을 회고하려 했기 때문이다. 정말 이것이 가능하긴 한 것일까?

그것은 프루스트가 꽁브레 마을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방식이로 가능했다. 즉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일들이 아침이슬처럼 일순간에 반영되는그러한 회생(回生)현재, 지나간 과거를 끌어 모을 수 있는 현재를 찾는 일이다. 이 책에서의 흐릿한 창문 뒤에서 시간을 보낼 때면 내 마음은 수달에게 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차린 것은 다음번에 수달 우리 앞에 서 있을 때였다.”와 같은 구절들이 이러한 사유를 반영하고 있다.

그의 글쓰기는 자신의 현재를 탐구함으로써, 그 현재에 천착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과거의 회상이나 이를 토대로 한 감상이 아니다. 그가 살았던 1930년대에 대한 철저한 기록이다. 그가 기록한 것은 그의 현재이지 결코 과거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현재의 알레고리다.

 

 

3. 사유의 알레고리로서의 유년

또한 이 책은 벤야민의 사유의 알레고리며 벤야민 철학의 축약본이다.

 

한 번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 동판화’(Kupferstich)라는 단어를 발음했는데, 이러한 우연이 초래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나는 의자 아래에서 머리를 쑥 내밀어보았다. 그것은 바로 머리 찌르기’(Kopf-verstich)였다. 그때 나는 내 자신과 단어를 왜곡시켰는데, 그것은 내가 삶 안에 자리를 잡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다(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81).

이러한 말들은 벤야민의 언어이론이나 번역이론에 대응한다.

 

이 자연적 상응물들은 우리가 그것들이 모두 인간이 지닌 미메시스 능력을 (인간은 이 미메시스 능력을 통해 그에 대답하는데) 자극하고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비로소 결정적인 의미를 얻는다(유사성론, 200~201).

벤야민은 머리 찌르기를 통해 인간이 지닌 미메시스 능력을 일깨웠으며, 그리하여 “[보다] 큰 언어의 파편으로 인식되도록하였다(번역자의 과제,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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