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희 몽골방랑 -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김홍희 지음 / 예담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그는 사진으로도 말하고 글로도 말한다.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내 삶을 기록하지 않은 내 게으름이 뼈저리게 후회된다. 기록했더라도 그처럼 아로새기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라도 시샘을 해보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은 기어이 말해야겠다.

이 <<선집>>에 실린 작품이나 번역은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는다.

번역자의 노고에 정말 머리조아려 감사한다.

하지만 최성만의 번역에 대해서는 말해야겠다.

이 번역은 완전히 날로 먹는 번역이다.

 

 <<선집2권>>는 <기술시대의 예술작품>을 싣고 있는데, 제2판과 3판을 같이 싣고 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제2판에 각주를 붙여 3판에서 이런 내용들이 삭제/첨가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3판을 따로 실음으로써 터무니없이 지면을 잡아먹고 있다. 정말 너무한 것 아닌가.

그것은 <<선집5권>>의 <19세기의 수도 파리>에서도 동일한 짓거리를 반복하고 있다.

 

 

<<선집1권>>과 <<선집3권>>에서 이미 해놓은 것이 다수 그가 번역한 곳에서 발견된다.

정말 해도해도 너무 한 것 아닌가. 

 

 

더욱이 최성만이 쓴 <옮긴이의 말>은 쓸데 없이 길고, 벤야민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벤야민의 개념어를 설명하기는 커녕 개념어를 개념어로 늘여 놓기만 하고 있다.

그는 이 해설을 논문으로 게재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엄연히 자기표절이다.

 

 

정말 학자라는 인간들, 특히 권위자라고 불리는 인간들에게 윤리가 있기는 한 것인지, 학자적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 궁금하다.

독자가 무슨 호구도 아니고, 독문과 교수가 독어 좀 한다는 게 그렇게 자랑스럽냐...

 

작작해라.

이 새벽에 뻗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발터 벤야민 선집 5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꿈은 더는 어떤 푸른 꽃을 열어 보여주지 않게 되었다. 꿈은 회색이 된 것이다. 사물들 위에 덮인 회색빛 먼지 층이 꿈의 최상의 부분이다. 꿈들은 이제 평범한 것을 향해 가는 지름길이다. 기술은 사물들의 외양을 마치 효용 가치를 잃어버리게 될 지폐들처럼 영영 다시는 못 볼 듯이 챙겨버린다. 이제 우리의 손은 그 외양을 다시 한 번 꿈속에서 붙잡으며 낯익은 윤곽들을 마지막으로 더듬는다. 우리의 손은 그 대상들을 붙들 때 그것들의 가장 해진 부분을 잡는다. 그 부분은 언제나 잡기에 가장 적당한 부분인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유리잔을 움켜 잡는 것이 아니라 그 유리잔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그런데 사물은 꿈들에게 어떤 면을 드러내는 것일까? 가장 해진 부분이라는 게 무엇일까? 그것은 습관으로 닳아빠지고 싸구려 격언들로 양념을 친 면이다. 사물이 꿈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면은 키치이다(136면).

 

  이 글은 키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키치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키치는 예술의 마지막 형상이다. 그것은 예술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상도 아닌 딱 경계에 놓여 있다. 이를 테면, 키치는 수없이 사용한 유리잔의 손잡이다. 이제 한 번만 더 사용하면 망가지고 말 그런 손잡이 말이다. 벤야민은 이것을 '왜곡'이나 '쪼그라듦'이라고 말했다. 유리잔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아이들 역시 닳아버리고 말 것이다. 닳아없어짐 이것이야말로 벤야민이 그토록 원했던 삶의 형식이었을 것이다.

  세계 속에서 소리없이 스러져가는 일, 이것은 그가 말한 허무주의에  닿아 있다. 그러니까 벤야민의 허무주의는 사물을 그 사용에 맞도록 모두 사용하여 소진시키는 일에 다름 아니다. 벤야민은 그렇게 살고 싶었기에 파리를 그토록 헤매고 다녔으리라. 마치 파리가 먼저 닳는지 자기가 먼저 닳는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벤야민은 그런 식으로 살아가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닳아빠짐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 혹은 역사라 불리는 가혹함 속에서 그는 자살을 선택해야만 했다. 사실 이 자살만이 그에 관한 유일한 진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슈퍼히어로의 본고장이라 할 미국에 한국의 슈퍼히어로 홍길동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오브라이언이 쓴 <<홍길동의 전설The Legend of Hong Gil Dong>> 아동용 그래픽 노블이 출판되면서부터다. 그래픽 노블이란 이야기와 그림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채색된 만화다. 그녀의 아버지는 통영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였고, 그 덕분에 그녀는 한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랬기 때문에 작가는 <<홍길동전>>을 원전 그대로 옮길 수 있었고, 옛날 조선의 모습까지도 그림을 통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홍길동을 괴롭히는 서얼차별제도나 조선시대의 의복이 생소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미국인은 그들과 너무도 다른 한국의 고전에 깊이 매료될 수 있었던 것일까?

 

오르페자는 슈퍼히어로들의 중요한 특징으로 일곱 가지를 들고 있다. 1)모든 수퍼 영웅은 초자연적인 수퍼 파워’(super power)를 갖는다. 2)수퍼 영웅은 우연히, 또는 우연한 사고에 의해서 그러한 힘을 얻게 된다. 3)자신의 정체성의 변화나 전이(transformation)를 나타나기 위해서 특정한 의복을 입는다. 4)현재 수퍼 영웅의 부모가 없거나 부모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5)수퍼 영웅이 되기 위해서 생애 속에서 아주 큰 비극을 겪는다. 6)(law)의 준수와는 거리가 있으나 자기 나름의 정의(justice)를 실현해 간다. 7)구세주의 능력, 신과 같은 힘, 귀한 신분적 기원과 같은 신-인간 신화화의 언어들이 수퍼 영웅신화 속에서는 복합적으로 섞여져 있다. 이것은 일종의 가족상사성(family resemblance)라고 말하면서 꼭 일곱 가지가 모두 일치하지 않더라도 대체적으로 이와 같은 특성들을 공유하고 있다고 본다(B.J. Oropeza, The Gospel According To Superhereoes, 6~7).

 

홍길동은 이러한 슈퍼히어로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슈퍼히어로들은 악당을 물리치고 자기 나름의 정의를 실현하듯이 홍길동 역시 신분차별에 저항하며,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 슈퍼맨은 고향을, 스파이더맨은 사랑하는 아저씨를, 배트맨은 부모를, 스폰은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고 슈퍼히어로가 된다. 그들은 이러한 상실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돕고 악과 맞서서 싸운다. 다른 슈퍼히어로가 그러하듯 홍길동 역시 (오르페자가 지적한 것과 같은) 불멸의 의지, 불멸의 영혼을 추구한다. 죽음이 없이 영원히 살고자하는 인간의 욕망, 낙원에서 살고자하는 열망과 같은 인간 본연의 욕망의 표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엑스맨과 슈퍼맨이 천성적인 힘을 가졌다면, 스파이더맨이나 헐크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특수한 능력을 얻게 된다. 그러나 홍길동은 평범하기보다는 미천한 신분에 태어났지만, 자신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스스로 선택하고 이를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홍길동의 모습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영웅이 되는 배트맨과 닮아 있다(C.K. Rovertson, The Gospel According To Superhereoes, 61). 그러나 배트맨과 다른 점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지는 않는다는데 있다. 홍길동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활빈당이라는 산적을 규합하여 이 평범한 인간들과 함께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간다.

 

이러한 홍길동은 한국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홍길동은 1965년 만화영화를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으며 몇 차례에 걸쳐 영화로 각색되기도 하였다. 실존 인물이기도 한 홍길동은 전라남도 장성에 생가를 복원한 홍길동 테마파크가 조성되어 있다.

 

슈퍼히어로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변화해 왔다. 한국 최초의 슈퍼히어로 라이파이, 커다란 오른쪽 주먹으로 악당을 무찌르는 주먹대장, 태권도 남매 아루치 마루치, 우주 괴물과 싸우는 우뢰매가 있다. 사람들은 영웅들에게 자신을 투영하여 슈퍼히어로가 가진 능력과 꿈을 공유하고자 한다. 무수한 히어로의 등장과 퇴장하는 과정 속에서도 홍길동이 출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특수한 능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 조금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홍길동의 용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오브라이언은 www.koreanrobinhood.com라는 사이트를 운영하였다. 여기에는 조선시대의 역사, 문화, 지도, <<홍길동전의 전설>>의 등장인물에 대한 정보를 플래쉬 형태로 제공하였다. 그 수준이 높고, 한국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사이트였다. 한국의 소프트파워는 이러한 사이트가 활성화 될 때 성장할 수 있다. 한국인도 아니고 외국인 직접 운영하는 이런 사이트를 정부가 나서서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오브라이언의 홈페지는 http://annesibleyobrien.com/ 이며,  <>에 대한 정보는 http://www.charlesbridge.com/productdetails.cfm?PC=4365 여기를 참조할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치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말한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조정하고 질서를 구획하는 일, 칼 슈미트는 이를 주권자라 불렀다. 그런데 과연 인간다운 삶은 무엇이며, 인간이 인간을 그러한 삶으로 데려갈 수 있는가. 아감벤은 이러한 정치를 통치라 불렀고, 그 어원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간단히 인간의 행동, 몸짓, 사유를 융용하다고 간주된 방향을 향해 운동, 통치, 제어, 지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실천, , 조치, 제도의 총체라고 말한다(장치란 무엇인가, 31). 즉 우리는 실천, , 조치, 제도와 같은 것들에 포획된 주체.

이러한 주체적 삶에서 인간은 해방될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은 어떻게 삶 속에서 자율적일 수 있으며, 자신의 삶을 향유할 수 있는가. ‘자율적인 삶, 혹은 향유하는 삶이란, 포획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의 리듬을 되찾는 일(벤야민, 신화적·정치적 단편, 131), 혹은 제도 같은 것들로 발전해가고 또 그러한 제도로 이탈해서 또 다른 제도를 향해 나아가는 운동, 동작 즉 탈주선, 리토르넬로의 흐름을 찾는 일(들뢰즈, 󰡔천개의 고원󰡕, 613), 혹은 상징계의 질서로부터 완전히 떠나는 일(폐제Verwerfung), ‘수동적 공격성passive aggressivity’을 갖는 일(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296)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가능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틀비.  <<필경사 바틀비>>의 줄거리에 대해서라면 박혜영을 인용하는 편이 더 낫겠다.

 

1853년에 나온 이 단편소설은 월스트리트 이야기라는 부제가 암시하듯이 이윤만 좇는 투기꾼들과 이들의 투기행위를 세탁해주는 법률가들이 득실대는 견고한 금융자본주의의 성벽 안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월스트리트에 있는 어느 법률사무소의 변호사는 바틀비라는 이름의 필경사를 채용하는데, 그는 처음 며칠간은 변호사가 요구하는 대로 지극히 추상적인 법률 서류들을 매우 기계적으로 베껴 쓰는 일을 잘 견뎌주었다. 터키와 니퍼스라는 이름의 다른 필경사들은 베껴 쓰는 작업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오전과 오후로 나눠 서로 번갈아가면서 신경질적으로 돌변하는 데 비해 바틀비는 하루 종일 그 지루한 작업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의 착실함과 근면함에 반한 변호사는 여타의 심부름도 시킬 겸 베껴 쓴 필사본을 원본과 대조하는 일도 시킬 겸 바틀비를 가까이에 두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한사코 대조작업을 거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변호사가 심부름을 시켜도, 필사본을 대조하자고 해도 일개 종업원인 바틀비가 자신의 고용주에게 놀랍도록 겸손하고 예의 바르며 침착한 태도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반복되는 온건한 거부에 변호사는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다가 나중에는 짜증과 화를 내게 되고 마침내는 그를 떨쳐내기 위해 사무실을 옮겨버리는 황당한 행동까지 하게 된다. 바틀비는 자신이 왜 필사본 대조를 거부하는지, 나아가 변호사의 다른 요구는 물론이고 종국에는 왜 필경일마저도 거부하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이란 하루 종일 사무실 한구석에 정물처럼 서서 창문 너머로 월스트리트의 벽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바틀비의 조용한 거부는 지난 30년간 무엇보다도 안정을 가장 중시하며 월스트리트 체제에 순응하고 살아왔던 변호사에게 큰 혼돈과 충격을 주었다. 돈으로 꼬드기기도 하고, 으름장도 놓아보면서 변호사는 바틀비가 자신의 자선을 거부하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하지만 그때마다 듣는 대답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일 뿐이었다. 바틀비의 온건한 거부는 월스트리트 담벽을 무너뜨릴 만큼 혁명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아무런 사유 없이 그 체제를 그대로 베껴내던 변호사의 삶에는 어떤 깨달음을 낳았다.

난생처음으로 가슴을 찌르듯 밀려오는 우수의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제껏 나는 감미로운 슬픔밖에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하나 지금은 다 같은 인간이라는 유대감이 항거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어두운 우수로 끌어들였다. 형제애의 우수! 나나 바틀비나 다 같은 아담의 후예가 아닌가! 우리는 세상이 명랑하다고 여기지만 불행은 멀찌감치 숨어 있어서 우리가 불행이 없다고 여길 뿐이다.”

마침내 바틀비의 수동적인 저항은 부랑자 구치소에서 음식마저 거부하는 데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스스로 음식을 끊고 죽음을 택한 바틀비의 저항 이후 변호사는 바틀비가 워싱턴의 배달불능 우편물 취급소에서 일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수취인의 사망으로 반송된 우편물을 뜯어보고 소각하는 일을 해온 것이다. 자선헌금이 들어 있었지만 누군가가 구제되지 못한 채 죽었거나, 희소식이 들어 있었지만 누군가는 모른 채 절망하며 죽었다. 삶의 심부름에 나선 이 편지들이 제때에 제 손에 닿지 못한 뒤 현대적 처리시스템 속에서 기계적으로 분류되고 소각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바틀비는 인간다운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거대한 담벽이 서 있음을 느꼈는지도 모른다(박혜영, 댓돌같은 체제 뚫는 낙숫물의 힘, 한겨레신문, 2010.04.02.).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I would prefer not to’(그것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이다. 왜 바틀비는 이러한 말을 하는가. 들뢰즈는 이 구문의 비문법성에 집중하여 말들이 더 이상 구별되지 않게 만드는 불확정의 지대를 파고들며 언어 속에서 텅 빔을 만든다고 말한다(󰡔비평과 진단󰡕, 135). 그러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체계는 정지되며, 바틀비는 어떤 사회적 상황도 더 이상 주어질 수 없는 순수한 추방자”(같은 책, 135), “모든 형상을 능가하는 기원적 단독성”(같은 책, )을 획득하게 된다. 언어의 정상적인 작동을 멈춤으로써 바틀비는 소수성을 획득하며 그 자체로 탈주선이 된다. 이러한 탈주는 감각적 경험의 정상적 정보들을 중지시키고, 이 정상적인 것들 또는 주류적인 것들에 의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었던 세계를 열어 놓는 정치로 이행케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자크 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 56).

한편 네그리와 하트, 아감벤, 지젝은 이 구문의 의미에 집중하였는데, 네그리와 하트의 경우 이것을 제국에 맞서는 노동거부refusal of labor”이며, 새로운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첫 걸음으로 보았다. 지젝은 이러한 단계성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도 참여와 행동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을 쥔 자들은 우리를 참여하게 만들고 대화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단순히 안 하는 것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안 하는 것을 하는 것’, 그러한 수동적 공격성passive aggressivity”이 가진 불길함을 깨뜨려 버리고자 한다.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일, 학생들이 시험 보기를 멈추는 일, 선거하기를 멈추는 일, 돈 벌기를 멈추는 일, 모든 경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 그러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공허함을 깨달을 수 있[]”고 지젝은 말한다.

이러한 지젝의 구상과 아감벤의 견해는 통하는 점이 있다. 지젝은 결국 우리의 삶이 실재계에서 다시 정립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급하게 말하자면, 실재계는 아직 지각되지 않은, 의미화되지 않은 공간이며우리와 동시에 존재하면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공간과 시간이다.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바틀비는 개체의 본래적 리듬, ‘자연의 리듬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억압되지도 포획되지도 않은 인간 본래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마틴 셀리그만의 개실험이 보여준 교훈은 자연의 리듬을 빼앗긴 상태에서도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것인데, 우리의 삶 역시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사물을 성스러운 것 속에 가두지 않고, 세속적인 것 속으로 되돌리는 일(󰡔세속화 예찬󰡕), 바틀비의 거부는 이러한 되돌림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사물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고 우리의 삶을 본래적 리듬에 맞게 살아가게 했을 때, 혹은 우리가 실재계 속에 발을 딛게 되었을 때, 우리가 열어가야 할 세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지젝은 수동적 공격성을 내면화하여 새롭게 실재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감벤은 고유한 잠재성을 완성하고, 그것의 고유한 소통가능성을 완성하는 데 도달한 삶속에서 행복한 삶이 구현된다고 말한다. 들뢰즈와 지젝은 개인의 의식과 윤리를 계몽코자 하며, 아감벤은 법적 제도의 변화를 강조한다. 그럼 다시 돌아가서, 우리는 무엇을 향하여 수동적 공격성을 표출하여야 하는가. 끝없는 탈주선을 그린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우리는 80살에도 사랑하며 살 수 있는가.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성을 회복하는 일이란 결국 존재자 속에서 존재의 틈입을 확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혹은 어떤 상태를 잠재태의 완전한 상태라 말할 수 있는가. 그 척도는 있는가.

단정적으로 말해서 이들에게서 이러한 기준과 척도를 찾을 수는 없다물론 사물의 본래적 리듬을 찾아야 한다는 아감벤과 지젝의 견해에 동의한다. 또한 사물에 리토르넬로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다시, 사물의 본래적 리듬은 어떤 것이며, 리토르넬로는 무엇인가. 이것을 규정할 수 없다면, 모든 이야기들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 물질을 깊이 있게 사유한 바슐라르를 따라 다음과 같이 말하려 한다. 우리는 하나의 사물을 가져야 하며, 사물의 참다운 영역을 찾아야 한다. 바슐라르는 이 사물들의 공통적 질서를 찾아낸다. 그 한 부분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물을 정화하는 예전禮典적 행위는, 그것과 맺어지는 인간적인 실체를 정화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중심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악을 뿌리째 뽑아버림과 동시에 자연 전체에서 악을 근절시킨다는 요구, 동질적 정화의 주제가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따라서 윤리적인 삶 역시 상상력의 삶처럼 우주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세계 전체는 새롭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물질적 상상력은 세계를 깊이에서 극화한다. 물질적 상상력은 인간의 내면적 삶의 모든 상징을 여러 실체들의 깊이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다(󰡔물과 꿈󰡕, 280).”

 

 *함정임은 이 구문의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문학동네판)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창비판)는 생각의 각도와 인식의 깊이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안고 있다. 허먼 멜빌은 이 문장을 ‘I would prefer not to’로 썼는데, ‘안 하고 싶습니다로 번역할 경우 영어의 독특한 화법인 부정(否定)의 선택’, 그것을 하도록 되어 있는 현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함의가 지워져버린다.(함정임, 바틀비, 인류의 또 다른 얼굴, 󰡔신동아󰡕, 2011.7, 강조-인용자)" 함정임을 따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번역을 기본으로 삼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