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말한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조정하고 질서를 구획하는 일, 칼 슈미트는 이를 ‘주권자’라 불렀다. 그런데 과연 인간다운 삶은 무엇이며, 인간이 인간을 그러한 삶으로 데려갈 수 있는가. 아감벤은 이러한 정치를 통치라 불렀고, 그 어원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간단히 “인간의 행동, 몸짓, 사유를 융용하다고 간주된 방향을 향해 운동, 통치, 제어, 지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실천, 앎, 조치, 제도의 총체”라고 말한다(「장치란 무엇인가」, 31면). 즉 우리는 실천, 앎, 조치, 제도와 같은 것들에 포획된 ‘주체’다.
이러한 주체적 삶에서 인간은 해방될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은 어떻게 삶 속에서 ‘자율’적일 수 있으며, 자신의 삶을 ‘향유’할 수 있는가. ‘자율’적인 삶, 혹은 ‘향유’하는 삶이란, 포획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의 리듬을 되찾는 일(벤야민, 「신화적·정치적 단편」, 131), 혹은 제도 같은 것들로 발전해가고 또 그러한 제도로 이탈해서 또 다른 제도를 향해 나아가는 운동, 동작 즉 탈주선, 리토르넬로의 흐름을 찾는 일(들뢰즈, 천개의 고원, 613), 혹은 상징계의 질서로부터 완전히 떠나는 일(폐제Verwerfung), ‘수동적 공격성passive aggressivity’을 갖는 일(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296)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가능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틀비’다. <<필경사 바틀비>>의 줄거리에 대해서라면 박혜영을 인용하는 편이 더 낫겠다.
1853년에 나온 이 단편소설은 ‘월스트리트 이야기’라는 부제가 암시하듯이 이윤만 좇는 투기꾼들과 이들의 투기행위를 세탁해주는 법률가들이 득실대는 견고한 금융자본주의의 성벽 안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월스트리트에 있는 어느 법률사무소의 변호사는 바틀비라는 이름의 필경사를 채용하는데, 그는 처음 며칠간은 변호사가 요구하는 대로 지극히 추상적인 법률 서류들을 매우 기계적으로 베껴 쓰는 일을 잘 견뎌주었다. 터키와 니퍼스라는 이름의 다른 필경사들은 베껴 쓰는 작업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오전과 오후로 나눠 서로 번갈아가면서 신경질적으로 돌변하는 데 비해 바틀비는 하루 종일 그 지루한 작업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의 착실함과 근면함에 반한 변호사는 여타의 심부름도 시킬 겸 베껴 쓴 필사본을 원본과 대조하는 일도 시킬 겸 바틀비를 가까이에 두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한사코 대조작업을 거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변호사가 심부름을 시켜도, 필사본을 대조하자고 해도 일개 종업원인 바틀비가 자신의 고용주에게 놀랍도록 겸손하고 예의 바르며 침착한 태도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반복되는 온건한 거부에 변호사는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다가 나중에는 짜증과 화를 내게 되고 마침내는 그를 떨쳐내기 위해 사무실을 옮겨버리는 황당한 행동까지 하게 된다. 바틀비는 자신이 왜 필사본 대조를 거부하는지, 나아가 변호사의 다른 요구는 물론이고 종국에는 왜 필경일마저도 거부하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이란 하루 종일 사무실 한구석에 정물처럼 서서 창문 너머로 월스트리트의 벽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바틀비의 조용한 거부는 지난 30년간 무엇보다도 ‘안정’을 가장 중시하며 월스트리트 체제에 순응하고 살아왔던 변호사에게 큰 혼돈과 충격을 주었다. 돈으로 꼬드기기도 하고, 으름장도 놓아보면서 변호사는 바틀비가 자신의 자선을 거부하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하지만 그때마다 듣는 대답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일 뿐이었다. 바틀비의 온건한 거부는 월스트리트 담벽을 무너뜨릴 만큼 혁명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아무런 사유 없이 그 체제를 그대로 베껴내던 변호사의 삶에는 어떤 깨달음을 낳았다.
“난생처음으로 가슴을 찌르듯 밀려오는 우수의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제껏 나는 감미로운 슬픔밖에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하나 지금은 다 같은 인간이라는 유대감이 항거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어두운 우수로 끌어들였다. 형제애의 우수! 나나 바틀비나 다 같은 아담의 후예가 아닌가! 우리는 세상이 명랑하다고 여기지만 불행은 멀찌감치 숨어 있어서 우리가 불행이 없다고 여길 뿐이다.”
마침내 바틀비의 수동적인 저항은 부랑자 구치소에서 음식마저 거부하는 데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스스로 음식을 끊고 죽음을 택한 바틀비의 저항 이후 변호사는 바틀비가 워싱턴의 ‘배달불능 우편물 취급소’에서 일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수취인의 사망으로 반송된 우편물을 뜯어보고 소각하는 일을 해온 것이다. 자선헌금이 들어 있었지만 누군가가 구제되지 못한 채 죽었거나, 희소식이 들어 있었지만 누군가는 모른 채 절망하며 죽었다. 삶의 심부름에 나선 이 편지들이 제때에 제 손에 닿지 못한 뒤 현대적 처리시스템 속에서 기계적으로 분류되고 소각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바틀비는 인간다운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거대한 담벽이 서 있음을 느꼈는지도 모른다(박혜영, 「댓돌같은 체제 뚫는 낙숫물의 힘」, 《한겨레신문》, 2010.04.02.).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I would prefer not to’(그것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이다. 왜 바틀비는 이러한 말을 하는가. 들뢰즈는 이 구문의 비문법성에 집중하여 “말들이 더 이상 구별되지 않게 만드는 불확정의 지대를 파고들며 언어 속에서 텅 빔”을 만든다고 말한다(비평과 진단, 135). 그러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체계는 정지되며, 바틀비는 “어떤 사회적 상황도 더 이상 주어질 수 없는 순수한 추방자”(같은 책, 135), “모든 형상을 능가하는 기원적 단독성”(같은 책, )을 획득하게 된다. 언어의 정상적인 작동을 멈춤으로써 바틀비는 소수성을 획득하며 그 자체로 탈주선이 된다. 이러한 탈주는 “감각적 경험의 정상적 정보들을 중지”시키고, 이 정상적인 것들 또는 주류적인 것들에 의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었던 세계를 열어 놓는 ‘정치’로 이행케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자크 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 56).
한편 네그리와 하트, 아감벤, 지젝은 이 구문의 의미에 집중하였는데, 네그리와 하트의 경우 이것을 “제국에 맞서는 노동거부refusal of labor”이며, 새로운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첫 걸음으로 보았다. 지젝은 이러한 단계성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도 참여와 행동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을 쥔 자들은 우리를 참여하게 만들고 대화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단순히 ‘안 하는 것’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안 하는 것을 하는 것’, 그러한 “수동적 공격성passive aggressivity”이 가진 불길함을 깨뜨려 버리고자 한다.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일, 학생들이 시험 보기를 멈추는 일, 선거하기를 멈추는 일, 돈 벌기를 멈추는 일, 모든 경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 그러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공허함을 깨달을 수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이러한 지젝의 구상과 아감벤의 견해는 통하는 점이 있다. 지젝은 결국 우리의 삶이 실재계에서 다시 정립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급하게 말하자면, 실재계는 아직 지각되지 않은, 의미화되지 않은 공간이며, 우리와 동시에 존재하면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공간과 시간이다.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바틀비는 개체의 본래적 리듬, ‘자연의 리듬’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억압되지도 포획되지도 않은 인간 본래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마틴 셀리그만의 개실험이 보여준 교훈은 자연의 리듬을 빼앗긴 상태에서도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것인데, 우리의 삶 역시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사물을 성스러운 것 속에 가두지 않고, 세속적인 것 속으로 되돌리는 일(세속화 예찬), 바틀비의 거부는 이러한 되돌림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사물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고 우리의 삶을 본래적 리듬에 맞게 살아가게 했을 때, 혹은 우리가 실재계 속에 발을 딛게 되었을 때, 우리가 열어가야 할 세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지젝은 ‘수동적 공격성’을 내면화하여 새롭게 실재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감벤은 “고유한 잠재성을 완성하고, 그것의 고유한 소통가능성을 완성하는 데 도달한 삶” 속에서 “행복한 삶”이 구현된다고 말한다. 들뢰즈와 지젝은 개인의 의식과 윤리를 계몽코자 하며, 아감벤은 법적 제도의 변화를 강조한다. 그럼 다시 돌아가서, 우리는 무엇을 향하여 ‘수동적 공격성’을 표출하여야 하는가. 끝없는 탈주선을 그린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우리는 80살에도 사랑하며 살 수 있는가.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성을 회복하는 일이란 결국 존재자 속에서 존재의 틈입을 확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혹은 어떤 상태를 잠재태의 완전한 상태라 말할 수 있는가. 그 척도는 있는가.
단정적으로 말해서 이들에게서 이러한 기준과 척도를 찾을 수는 없다. 물론 사물의 본래적 리듬을 찾아야 한다는 아감벤과 지젝의 견해에 동의한다. 또한 사물에 리토르넬로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다시, 사물의 본래적 리듬은 어떤 것이며, 리토르넬로는 무엇인가. 이것을 규정할 수 없다면, 모든 이야기들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 물질을 깊이 있게 사유한 바슐라르를 따라 다음과 같이 말하려 한다. 우리는 ‘하나의 사물’을 가져야 하며, 사물의 ‘참다운 영역’을 찾아야 한다. 바슐라르는 이 사물들의 공통적 질서를 찾아낸다. 그 한 부분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물을 정화하는 예전禮典적 행위는, 그것과 맺어지는 인간적인 실체를 정화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중심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악을 뿌리째 뽑아버림과 동시에 자연 전체에서 악을 근절시킨다는 요구, 즉 ‘동질적 정화’의 주제가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따라서 윤리적인 삶 역시 상상력의 삶처럼 우주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세계 전체는 새롭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물질적 상상력은 세계를 깊이에서 극화한다. 물질적 상상력은 인간의 내면적 삶의 모든 상징을 여러 실체들의 깊이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다(물과 꿈, 280).”
*함정임은 이 구문의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문학동네판)와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창비판)는 생각의 각도와 인식의 깊이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안고 있다. 허먼 멜빌은 이 문장을 ‘I would prefer not to’로 썼는데, ‘안 하고 싶습니다’로 번역할 경우 영어의 독특한 화법인 ‘부정(否定)의 선택’, 곧 ‘그것을 하도록 되어 있는 현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함의가 지워져버린다.(함정임, 「바틀비, 인류의 또 다른 얼굴」, 신동아, 2011.7, 강조-인용자)" 함정임을 따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번역을 기본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