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발터 벤야민 선집 5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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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은 더는 어떤 푸른 꽃을 열어 보여주지 않게 되었다. 꿈은 회색이 된 것이다. 사물들 위에 덮인 회색빛 먼지 층이 꿈의 최상의 부분이다. 꿈들은 이제 평범한 것을 향해 가는 지름길이다. 기술은 사물들의 외양을 마치 효용 가치를 잃어버리게 될 지폐들처럼 영영 다시는 못 볼 듯이 챙겨버린다. 이제 우리의 손은 그 외양을 다시 한 번 꿈속에서 붙잡으며 낯익은 윤곽들을 마지막으로 더듬는다. 우리의 손은 그 대상들을 붙들 때 그것들의 가장 해진 부분을 잡는다. 그 부분은 언제나 잡기에 가장 적당한 부분인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유리잔을 움켜 잡는 것이 아니라 그 유리잔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그런데 사물은 꿈들에게 어떤 면을 드러내는 것일까? 가장 해진 부분이라는 게 무엇일까? 그것은 습관으로 닳아빠지고 싸구려 격언들로 양념을 친 면이다. 사물이 꿈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면은 키치이다(136면).

 

  이 글은 키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키치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키치는 예술의 마지막 형상이다. 그것은 예술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상도 아닌 딱 경계에 놓여 있다. 이를 테면, 키치는 수없이 사용한 유리잔의 손잡이다. 이제 한 번만 더 사용하면 망가지고 말 그런 손잡이 말이다. 벤야민은 이것을 '왜곡'이나 '쪼그라듦'이라고 말했다. 유리잔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아이들 역시 닳아버리고 말 것이다. 닳아없어짐 이것이야말로 벤야민이 그토록 원했던 삶의 형식이었을 것이다.

  세계 속에서 소리없이 스러져가는 일, 이것은 그가 말한 허무주의에  닿아 있다. 그러니까 벤야민의 허무주의는 사물을 그 사용에 맞도록 모두 사용하여 소진시키는 일에 다름 아니다. 벤야민은 그렇게 살고 싶었기에 파리를 그토록 헤매고 다녔으리라. 마치 파리가 먼저 닳는지 자기가 먼저 닳는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벤야민은 그런 식으로 살아가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닳아빠짐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 혹은 역사라 불리는 가혹함 속에서 그는 자살을 선택해야만 했다. 사실 이 자살만이 그에 관한 유일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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