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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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인간을 송두리째 활용하게 될 때, 과학에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혼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라고 로맹 가리는 말하고 있다. 그는 이런 슬픈 말을 할 때조차 아름답고, 우리의 삶은 아프다.

 

자연은 사람을 배신하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다만 아름다운 자연에서 위안을 구할 뿐.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 하지만 시도 언젠가는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단순한 생리적 분비 현상으로 연구되리라. 과학은 모든 면에서 인간을 제압하고 있다. 오직 바다만을 친구로 삼고, 페루 해변의 모래언덕 위에 있는 카페의 주인이 되는 데에도 설명이 있을 수 있다. 바다란 영생의 이미지, 궁극적인 위안과 내세의 약속이 아니던가? 조금 시적이긴 하지만…… 영혼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야 할 터. 그것이야말로 영혼이 과학에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머잖아 학자들은 영혼의 정확한 피부와 밀도와 비상 속도를 계산해낼 것이다. 유사 이래 하늘로 올라간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하면 울어 마땅하다. 얼마나 막대한 에너지원이 낭비된 것일까. 영혼이 승천하는 순간 그 에너지를 잡아둘 수 있는 댐을 건설했다면, 지구 전체를 밝힐 만한 에너지를 얻을 수도 있었으리라. 머잖아 인간은 송두리째 활용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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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와 위트를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즐비한 비유들 속에서 과장적 발언들과 기발한 발상 속에서 불쑥 불쑥 솟아오른다.

 

웨이터가 그릇을 치우려고 오자 나는 함메르페스트에는 여가 삼아 할 일이 뭐가 있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우체국 옆에 있는 전화번호부에 불붙이는 건 벌써 해보셨지요?”

물론 웨이터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가 입을 떼려고 하는 찰나 구석에 있더 외로운 형씨가 웨이터에게 소리쳤다. 무슨 욕을 했는지 모르지만 아마 이런 내용인 듯했다.

거기 순록인지 술독인지 옷이랍시고 걸치고 다니는 눈 째진 동양 놈아, 빨리 주문 좀 받지, 동작이 왜 그리 느려 터졌어?”

웨이터는 내 접시를 가져가다 말고 포크가 들썩일 정도로 도로 털썩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씩씩면서 그 남자에게 냉큼 다가간 후 손님의 팔과 어깨를 부여잡고 아주 힘겹게 문으로 질질 끌고 가더니 그를 번쩍 들어 올려 눈 오는 길거리로 내동댕이쳤다. 내 자리로 돌아와서도 아직 붉으락푸르락 하는 얼굴로 흥분이 가시지 않은 그에게 나는 말했다.

설마 모든 손님들한테 나가라는 길을 저렇게 알려주는 건 아니겠죠?”

그러나 그는 농담을 주고받을 기분이 아니어서 화가 난 채로 바로 돌아갔다(발칙한 유럽산책, 39).

 

티머시 페리스가 은하수에서의 성숙에서 잘 묘사한 것처럼, 기욤 르장티의 경우는 더욱 운이 없었다. 르 장티는 인도에서의 관측을 위해서 1년 전에 프랑스를 떠났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금성이 지나가는 날에도 여전히 바다 위에 있어야만 했다. 출렁이는 배 위에서는 연속적인 관측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최악의 장소에 있었던 셈이다. 르 장티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인도에 도착해서 1769년에 다가올 다음 기회를 기다렸다. 8년이라는 긴 시간을 가지게 된 그는, 최고급 관측대를 세우고 장비를 점검하고 또 점검하면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두 번째 통과가 일어났던 176964일의 날씨는 맑았지만, 금성이 통과하기 시작하면서 태양을 가리기 시작했던 구름은 금성이 완전히 통과할 때까지 정확하게 3시간 147초 동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장티는 겨우 냉정을 되찾아서 장비를 챙긴 후에 부근의 항구로 가던 도중에 이질에 걸려서 거의 1년 동안 누어 있어야만 했다. 지친 상태로 겨우 배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배가 아프리카 해안에서 만난 허리케인에 의해서 난파되어버렸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상태로 돌아왔을 때는, 그의 가족들이 이미 사망신고를 하고 그의 재산을 나누어 가진 후였다(거의 모든 것의 역사, 68~69).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롱과 빈정거림이다. 그럼에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거기에 어떤 악의가 끼어들 자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러한 위트와 유머가 대상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는 그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찌 사람을 웃길 수 있겠는가. 울음은 온전히 나의 감정에 충실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웃게 만드는 것은 나를 너머 사람과의 연대를 포기하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절망에 빠져 있던 맨텔은 자신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해서 입장료를 받을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상업적인 활동이 과학자로는 물론이고 신사로서의 명성도 잃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는 결국 사람들을 무료로 입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수백 명씩 떼를 지어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관람객들 때문에 그와 가족들의 생활은 완전히 망가졌다. 결국 그는 빚을 갚기 우해서 수집품의 대부분을 팔아버릴 수박에 없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어려움의 시작에 불과했다(거의 모든 것의 역사, 99).

 

나는 의사에게서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정말 따분한 곳에 가서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처방이라도 받은 환자 같은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

그러다 보니 은퇴 후의 삶이란 게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나는 심지어 산책 다닐 때도 조그만 메모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매일의 동선을 무의미한 일기로 남기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가 은퇴 후에 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는 매일 산책을 다니다가 동네 슈퍼마켓의 스택 코너에서 점심을 드셨다. 지나가다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조그만 공책에 일기를 쓰고 계셨다. 돌아가신 후에 보니 이런 공책이 벽장에 가득 들어 있었다. 그 공책은 모두 이런 일기로 채워져 있었다.

‘14. 슈퍼마켓까지 걸어감. 디카페인 커피 두 잔 마심. 날씨 좋음.’

이제야 아버지(가 일기 쓰시던) 기분을 알겠다(발칙한 유럽산책, 42).

 

심각하고 진지한 상황에서도 유머와 재치가 뒤섞여 있는데, 어떤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 그것은 아마 그의 통찰과 깨달음이 유머와 재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로라는 때때로 서쪽에서 환하게 명멸하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는 장난이라도 치는 양 뒤쪽에서 순식간에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 나는 오로라의 궤적을 따라가기 위해 계속 빙글빙글 돌거나 몸을 비비 꼬아야 했다. 한 뼘의 하늘이라도 변화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으려 해본 사람이 아니면 하늘이 얼마나 광활한지 상상할 수 없다. 섬뜩한 점은 그 변화가 모두 쥐죽은 듯 조용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려면 하는 낮은 소리나 정전기 소리라도 나야 할 것 같은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 거대한 에너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소진되는 것이다(발칙한 유럽산책, 45~46).

 

우리가 머리를 들면 볼 수 있는 하늘은 우주에서 놀라울 정도로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은 모두 합쳐서 6,000개 정도이고, 그중에서도 한 곳에 서서 볼 수 있는 것은 2,000개 정도에 불과하다. 한 곳에서 쌍안경을 이용하면 5만 개 정도의 별을 볼 수 있고, 소형 2인치 망원경을 사용하면 30만 개 정도를 볼 수 있다. 에번스가 쓰는 것과 같은 16인치 망원경을 사용하면, 별의 수가 아니라 은하의 수를 세게 된다. 에번스는 집 마당에서 5만에서 10만 개 정도의 은하를 볼 수 있었고, 각가가의 은하에는 수백억 개의 별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숫자들은 모두 믿을 만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초신성은 지극히 드물게 나타난다. 별은 수십억 년 동안 타고 나서 한순간에 빠르게 죽어버리지만, 폭발하는 별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은 새벽에 장작불이 꺼지듯이 조용히 사라져버린다. 수천억 개의 별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은하에서도 초신성 폭발은 200-300년 만에 한 번 정도 일어난다. 그러므로 초신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전망대에 올라서서 망원경으로 맨해튼을 둘러보면서 스물한 살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이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과 같다(거의 모든 것의 역사, 47).

…………

에번스에 따르면, “나는 우주공간을 통해서 수백만 년을 지나온 빛이 지구에 도착하는 순간에 누군가가 하늘의 바로 그곳을 쳐다보고 있다가 그것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 정도의 사건이라면 당연히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어야 하겠지요.”(거의 모든 것의 역사, 49)

 

그래서 그의 글에는 젠체하는 자의 거들먹거림을 느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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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 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1945416일 연합군이 베를린을 포위 공격하였을 때부터 1945430일 히틀러가 지하벙커에서 자살하기까지의 2주 동안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2주 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미쳐가고 있었는지, 파국 앞에서 그들이 보인 광란을 매우 냉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김훈의 남한산성은 청()에 포위당했던 16361214일부터 163722일까지 거의 두 달 간의 기록을 소설로 변형해내고 있다. 그 두 달은 나치의 마지막 두 주보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가혹하다. 그런데 왜 이들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일까. 김훈의 소설은 이에 대한 답이기도 할 것이다.

비록 국가의 말들이 허위와 위선 속에서 무력해지더라도 그 국가를 이루는 규준들을 지켜내는 삶, 그런 삶은 진실로 가능한 것일까. 김훈은 남한산성에 갇힌 위정자들의 논쟁의 무력함과 그 공허함이 끝끝내 완전한 공허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집요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신(大臣)들의 논쟁이 그토록 지난했던 것은 이들이 직면한 지금의 시간만을 유일한 문제로 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과거라는 긴 시간을 지금의 삶에 연결했고, 이들이 죽어도 남을 긴 미래까지를 지금의 삶 속으로 끌어와 고민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때로 비겁하기도 하였으나, 그럼에도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이 저 전화의 와중에도 쪽박을 깨뜨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실 그들의 논쟁은 비루한 쪽박을 지켜내려는 일종의 방편이었다. 히틀러와 그 지도부가 파국 앞에서 쉽게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에게 과거도 미래도 모두 그들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히틀러들은 그들의 모든 정치가 헛것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말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딪쳐서 싸우거나 피해서 버티거나 맞아들여서 숙이거나 간에 외줄기 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 터이고, 그 길들이 모두 뒤섞이면서 세상은 되어지는 대로 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김류는 그 말을 참아내고 있었다.

 

일은 늘 되는대로 되기 마련임을 알았음에도, 그 삶이 되는대로 되도록 내버려두는 것밖에 도리는 없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논쟁을 하였는데, 그러한 논쟁을 통해 그들은 되는대로 되는 것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논쟁을 벌였다. 논쟁이 아무리 허위와 허무에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논쟁하기는 결국 삶을 놓지 않는 방법임을 김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삶 전체가 거대한 헛것으로 이뤄졌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삶을 되는대로 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신념까지가 이 소설 속에 투영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2002년 전후에 쓰인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2007년에 출판된 이 소설의 전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김훈 스스로 세설(世說)이라 부른 이 짧은 글은, 평발이라는 이유로 군대에 가지 않기를 바라는 아들과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무력한 아버지의 내면을 적고 있다. 가장 신성하고 가장 도덕적이라고 일컬어진 병역의 의무가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이나 국회의원, 장관, 그리고 온갖 돈 많고 권세 높은 댁 도련님들에 의해 더럽혀지고 허물어졌을 때에도 김훈은 아들에게 군대를 가야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나라를 지키는 일은, 아버지 세대가 늘으면 아들 세대가 물려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사인(私人)인 아버지가 사인인 아들에게 넘겨주는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공적(公的) 아버지와 국가와 국민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너희들의 그 울분에 찬 새벽 술자리에 공사간에 어느 아비가 끼어들 수 있겠느냐. 아들아, 나는 겨우 이렇게 말하려 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이 못난 나라의 못남 속에서 결국 살아내야 한다는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나라의 쪽박을 깨지 않는 일이라고. 너의 의무는 몇몇 비굴한 이탈자들에 의하여 신성이 모독되었지만, 송두리째 부정단한 것은 아니라고.

너의 어머니에게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 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 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 하는 일이다. 가서,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그리고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

 

그 어떤 아비의 말도 이보다 비굴하지는 못할 것이며, 그 어떤 아비의 말도 이보다 더 진실되지는 못할 것이다. 김훈은 그 허위, 신성하고 도덕적인 병역의 의무라는 말들의 위선 앞에서, 그것이 비록 허위일지라도 그 허위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삶이 한낱 '쪽박'일지라도 그 '쪽박'을 부여잡는 일이 삶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김훈의 칼의 노래, 흑산등을 비롯한 거개의 소설들은 삶의 끝자락으로 몰린 자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은 왕명 속에 깃든 것들이 헛것임을 알면서도 그 헛것을 놓지 않는다. 삶은 수많은 헛것으로 이뤄졌더라도 그 헛것을 놓지 않는 일이라고, 그 헛것이 끝끝내 헛것으로 스러져 버리더라도 그 헛것을 끝끝내 지켜내는 그 부질없음이 삶이라는 것을 말하였다. 김훈은 그 지독한 허무를, 그토록 담담하게 그려냈던 것이다.

강상, 사직, 종묘 그런 것들 혹은 국가니 의무니 권리니 이 모든 것들이 쪽박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것을 쪽박이라고 말하지 않는 일은 그것을 쪽박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지난하다. ‘쪽박이라고 말하고 나면 세계는 쪽박이상일 수 없다. 히틀러와 그 지도부의 자살과 광란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모든 가치와 윤리와 도덕이 쪽박일지라도 쪽박을 깨지 않는 일, 그리하여 그 쪽박을 껴안고 살아가는 일, 그것이 삶의 실체이며 진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내는 자의 삶은 무수한 결단과 무수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헛것을 껴안고 헛것의 내용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껴안은 헛것이 변함없이 헛것일 수 있도록 지켜내는 자의 삶은 얼마나 가혹한가. 허나 그 가혹함까지도 헛것이라면, 그러한 완고함이 그의 삶을 지탱하여 왔을 것이다.

모든 것이 헛것이라면 그 모든 헛것 중의 하나를 부여잡고 사는 일, 그 부여잡음조차도 헛것임을 알고서도 살아낼 수 있는 삶은,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을 신념으로 간직하며 사는 삶보다 더 삶에 밀착된 자세일 것이다. 혁명의 신념이 무력해질 때 혁명가 역시 무력해질 것은 자명하다. 모든 것이 헛것임을 알고 살아가는 자에게 좌절이 발 디딜 틈은 없다. 그러니 그의 허무는 살아가기 위한 허무일 것이다. 그러한 그에게 보수도 좌익도 무의미할 것이다.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은 보수니 좌익이니 따위의 말들로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삶은 그 모든 것을 초과하되 삶이라는 범주를 초과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확장도 팽창도 없는 이 시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저항이며, 복수며, 혁명이다. 그러니 삶은 그냥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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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정용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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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소설이 있다. 완벽히 주인공에 몰입되어 그 주인공 앞에 기적이 일어나기를 그래서 조악한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이라도 좋으니 그가 행복해지기를 행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소설이 있다그런데 그런 식으로 소설이 끝난다면 소설가를 욕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런 소설을 읽는 순간은 소설을 쓰는 소설가만큼이나 조심스럽다. 소설가 역시 주인공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 그 역시도 일종의 외줄 위에서 외줄 끝까지 걸어갈 것인지, 아니면 외줄걷기를 포기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소설을 썼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독자는? 외줄의 끝에서 주인공에겐 어떤 변화도 없이 불행이라면 불행인 삶이 계속 되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읽어나간다. 그러니 독자도 읽기라는 외줄 위에서 그 외줄에서 내려와도 그만이지만 외줄의 끝까지 걸어가 보는 것이다. 소설가가 글쓰기를 통해 소설을 완성해 나간다면 독자는 그 쓰여진 글들을 삼킴으로써 소설을 완성해 간다. 그런 소설이란 쓰는 자도 읽는 자도 지난하긴 마찬가지며, 그런 소설은 쓰는 자도 읽도 있는 자도 어떤 희열의 정념에 휩싸일 것은 당연하다.

 

     정용준의 떠떠떠 떠는 그런 유의 소설이다.

 

  왼쪽을 쳐다보면 창문이 있었어. 그리고 열한 시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면 네가 앉아 있었지. 창문 너머 파랗게 열린 하늘이나 그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비행기의 느린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처럼, 나는 너를 봤어. 앉아 있을 때는 녹슨 흉상처럼 느껴지다가도 서 있을 때는 폭풍 속에 흔들리는 연약한 나무 같았지. 금방이라도 뿌리째 뽑혀 어딘가로 날아갈 것 같은 너를 보고 있으면 난 이상하게도 마음이 저릿해져 손바닥으로 왼쪽 가슴을 꾹 누르곤 했어. 네가 책을 들고 서 있을 때마다 나는 알아볼 수 있었어.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손끝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모습을. 입속에 갇혀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 너의 혀를 본 것도 같았지. 아니 온몸이 한 조각의 혀처럼 보였어. 흠뻑 젖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거든. 그때 넌 내게 어떤 풍경과도 같았어. 그 풍경 속에 뛰어들어 너의 손을 한 번이라도 잡아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는 없었지. 그때는 너무 어렸으니까. 아마도 그때부터 나는 너를 사랑했던 것 같아.

 

 

    선생이 말더듬이인 나에게 책을 읽으라고 시켰을 때, 그 곤혹스러운 상황을 바라보았던 그녀는 나를 풍경과도 같다고 했다. 왜 풍경인 것일까. 풍경은 기본적으로 자기 바깥의 정경이나 상황을 뜻하는 말이다. 풍경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와는 다른 이질적인 것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풍경의 양태는 두 가지다. 낯선 것들이 낯익음으로 돌아서기 전의 상태. 이것은 여행을 할 때 만나게 되는 풍광들에서 느낄 수 있는 감탄, 경탄 같은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낯익었던 것들이 낯선 것들로 변화하는 지점, 이를 테면, 잘 알고 있던 곳에서 갑자기 방향감을 일어버릴 때 느껴지는 낯설음에 상응한다. 이 소설에서 그녀의 풍경은 낯익은 것이 낯선 것으로 돌아서는 지점에서 생겨나는 풍경이다. 그녀에게 나는 익숙한 나였으니까, 하지만 책을 읽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나는 낯선 어떤 것, 즉 하나의 풍경으로 변화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걸어야 한다. 그녀는 이 풍경을 왜 사랑하게 된 것일까. 그녀는 아마 이 풍경에서 숭고를 느꼈으리라. 풍경이 숭고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의 작동방식은 이렇다.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나가 배를 타고 있다면 그때 느끼는 것은 공포다. 생각해보라. '파이'(<라이프 오브 파이>)가 거센 폭풍우가 쏟아지는 밤, 갑판으로 나갔을 때 그가 느낀 것은 신의 경이였다. 그런데 그 파도가 배를 삼키고, 물이 들어찰 때 느낀 것은 공포였다. 무엇이든 파쇄할 만큼의 거센 파도가 바다를 향할 때는 경이를 느낀다. 왜, 그 파도는 나와는 관계 없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러나 파도가 나를 향해 달려올 때 나는 공포를 느낀다. 왜 내가 거기에 있으므로. 숭고는 그런 부재 속에서 존재한다.

    그래도 아직 왜 사랑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십분 양보해서 말더듬이인 나가 경이롭거나 숭고하다고 치자. 그런데 어떻게 그녀는 그런 나를 사랑하기까지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녀는 이 풍경 속으로 들어가 그의 손을 잡아줄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녀는 어렸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녀가 나의 손을 잡아줄 수 없었던 진짜 이유는 그녀라는 생명이 나로 전환될 수 없는, 나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존재론적 한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녀는 풍경의 내부로 들어와서 그 풍경의 주체로 자리잡을 수 없다. 그 다가갈 수 없는 결핍, 다가갈 수 없는 한계, 그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서도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그녀라는 존재가 나라는 존재로 동일화될 수 없는 그 거리 속에서 나는 존재하며, 그 거리는 좁혀질 수 없다. 그러니 증오하든 사랑이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에 나는 그녀의 뇌전을 바라보며 떠듬거린다. "떠, 떠떠, 떠떠, 떠떠떠, 떠, 떠, 아아, 아아아하아아, 아아아, 아, 사,사, 사아, 아아, 아아아, 라라, 라라라라, 라, 라라라라, 아, 아아앙, 해." 증오하든지 사랑하든지, 한계 앞에서 우리가 보일 수 있는 태도는 고작 이것이다.

 

    *사실 이에 대해서라면 처음부터 서영채를 인용해야 했다. 위의 말들은 서영채의 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마치 이 소설에 대한 평을 쓰기 위해서라는 듯 <절대공간: 풍경과 응시>(2013년 현대문학연구 하계발표대회 발표문)를 얼마전 내놓았다. 그 발표문에서 사유의 중요한 부분을 옮겨 놓는다. 

 

   지속적으로 투여된 시선은 대상을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 설사 그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익숙하고 평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인 시선이 투여되는 순간 그것은 특별한 대상이 된다. 그런 응시는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시선이 투여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일상적인 것일 수 없다. 설사 그것이 바로 그 직전까지 매우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실용적 관심이나 인식적인 관심과 무관한 그런 특별한 응시의 대상은 풍경이 된다. 이때의 풍경은 단순히 아름답거나 인상적인 경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풍경은 그런 점에서 일차적으로, 칸트가 언급했던 숭고와 동일한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칸트의 숭고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거대하고 위력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다. 폭풍우 치는 바다의 한복판에서 위험에 빠져 있을 때 사람이 느끼는 것은 미적인 것으로서의 숭고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그것을 숭고함으로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주체가 대상의 격렬함으로부 떨어져 나와 안전한 공간에 있어야 한다. 동일한 대상이지만 어떤 경우의 주체에 의해 포착되느냐에 따라 공포가 될 수도 있고 숭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풍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것 역시 미적 판단력의 대상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숭고와 동일한 작동의 방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칸트가 숭고의 예를 끌어온 것은 거대하거나 위력적인 자연 현상을 통해서였다. 그 거대함이나 위력은 자연에 속한 것이지만, 자연이 자기 자신을 거대하거나 위력적인 것으로 곧 숭고한 것으로 느낄 수는 없다. 풍경도 숭고처럼 인간 주체의 특별한 응시의 산물이다. 매일 아침 해가 뜨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어부에게 해 뜨는 풍경이란 일상적인 배경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바다가, 난생처음으로 그것을 보게 된 사람 앞에 있다면, 혹은 도시로 이주해야 했던 어부의 향수 어린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영상이라면, 그것은 매우 다른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풍경은 반드시 어떤 아름다운 경관일 필요는 없다. 매일 보았던 동네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람의 눈에는 잊을 수 없는 풍경이 되는 것이다.

......略......

   풍경은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부재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 시선의 주체가 없어야 숭고가 성립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에서 풍경은,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지닌 과조적 주체와 상관적이다. 그러나 이런 진술이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닌 것은 앞에서 논의해온 바와 같다. 폭풍우 치는 바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와 연관되어 있는 한에서만 숭고한 대상이 될 수 있다. 즉 인간이 지닌 유한성과 연약함의 반면으로 표상되는 한에서만 숭고한 풍경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주체는 자신의 부재를 입증하는 자신의 공간을 그림 속에 남겨둠으로써만, 자신의 자리를 부정적으로 기입해 넣음으로써만, 그것을 숭고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주체가 마땅히 있어야 할 빈 자리, 주체가 빠져나가고 생긴 주체의 공백을 그 안에 품으로써만 그 장면은 풍경일 수 있다. 조개 캐는 남자를 멀리서 지켜보았던 <잊을 수 없는 사람들>[구니키다 돗포]의 오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대상이 히말라야의 만년설에 덮인 봉우리이건 맨하탄의 빌딩 숲이건, 혹은 목가적인 전원이건 황폐하게 버려진 사막이건 간에, 풍경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부재하는 주체의 표상이 되며, 종국적으로는 인간의 유한성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존재론적 갈망의 상징이 된다. 그렇게 존재하는 한에서만 그것은 풍경일 수 있다.

   풍경이란 그러므로 종국적으로는 유한자로서의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곳, 영유할 수 없는 것, 버리고 갈 수밖에 없는 어떤 것들에 대한 표상이 된다. 그런 점에서 풍경은 숭고를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 숭고한 대상이 유한자에 의해 포착된 절대성의 표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더 이상 육화되기를 그쳐버린 신, 자신의 존재 증거를 땅 위의 사람들에게 현시해 주기를 그쳐버린 절대자의 표상이다. 풍경에 대한 응시를 통해 숭고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란 그러므로 사실은 자신의 영역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객관적 초월성의 흔적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라 해야 하겠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지와 무관하게 응시 앞에 선 대상으로서의 풍경은 그 자체가 존재론적 불안의 표상이며, 세계의 한계와 자신의 유래를 모르는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근대적 개인이 겪어야 할 형이상학적 질병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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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안 보여주고 싶은 책이 있다. 나만 읽고 싶고 나만 알고 싶은 책들이 있다. 저 말들을 삼켜 마치 내 것인냥 쓰고 싶어서 일 것이다. 김홍희의 책들이 그런 책들이다. 그는 사진으로도 말하고 글로도 말한다. 글에 대한 최대의 찬사가 시(詩)라면 그의 글과 사진 둘 모두에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집은 돌아갈 곳의 대명사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것이 천막으로 얼기설기 지은 집이든 나무로 지은 집이든.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온유함을 가리키는 마음의 집이라면 더욱 행복하다. 온유는 여유에서 나오고, 여유는 삶의 확신에서 나오며, 삶의 확신은 방랑에서 나온다. 이때의 방랑은 삶의 궁극을 묻는 걸음걸이여야 한다. 방랑의 동반자는 진리로 만든 나무지팡이일 수도 있고, 차가운 쇠로 깍은 카메라일 수도 있다. 그것은 슬픔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해야만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살아내려고 온 힘을 다한다. 스스로 서 있기조차 버거운 삶을 하나씩 지고는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숙명이다. 스스로를 연민하는 자만이 다른 산 것들을 연민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다른 모든 것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자는 스스로를 연민했던 자이고 긍휼히 여겼던 자이다. 그는 시와 공이 함께할 때 우리의 인식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존재이다. 그 인식은 시공을 벗어날 때 비로소 사라진다는 것 또한 알고 있는 자이다. 모든 방랑의 목적지는 바로 그곳이다(<<몽골방랑>>, 34~35면).

 

  사진기를 들고 방랑하는 그를 생각하면 덩달아 고독해진다. 방랑을 통해서 "삶의 확신"에 이르고, 여기에서 다시 "여유"를 찾고, "온유"함을 배우는 그 연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방랑의 기저에는 연민이 있다. 그 연민은 싸구려 동정심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그의 운명과 동일한 파장을 가진 것들에서 연민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한다. 방랑 속에서 그는 어김없이 사람을 만난다. 그렇게 만난 사람 중의 하나가 '무서운 눈'을 가진 매 사냥꾼이다.

 

  무서운 눈에는 두 종류가 있다. 세상을 돌며 무서운 눈을 가진 사람들을 찍으며 알게 된 것이다. 하나는 남이 두려워하기를 바라는 가장 된 무서운 눈이고 다른 하나는 타고난 무서운 눈이다. 전자는 살면서 익힌 사회적 습관이고 대개 용렬하다. 후자는 타고난 것이라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뼛속에서부터 익혀온 사람이다. 가장된 눈빛은 카메라를 들이대면 대개 웃음으로 얼버무리거나 미동한다. 그러나 태생적 눈빛은 야수처럼 미동하지 않고 웃지도 않는다.

  카메라가 코앞에 걸리고 셔터가 끊어졌다. 역시 사내의 눈빛은 움직이지 않았다. 송곳처럼 한쪽으로 고정된 채 오직 '본다'로 일관되어 있었다. 어떤 형용사적 감정이나 부사적 서술이 없는 말 그대로의 동사, '보다' 그 자체의 눈빛이었다.

  나는 이런 사내들의 눈빛을 지구촌을 여행하며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눈빛은 강렬하고 무섭지만 그 속은 부드럽다. 내공이 그대로 눈빛으로 드러나는 사내들은 대개 용감하며 관대하다. 당연히 손님에게는 후하다(<<몽골방랑>>, 155~158).

 

  비록 '무서운 눈'이라 했으나 그것이 어디 무서운 눈이겠는가. 언어는 문맥을 떼어 놓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무서운 눈'은 저 문맥을 벗어나면 아무 것도 아닌 말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맥 속에서 '무서운 눈'을 새롭게 읽어내야 한다. 무서운 눈을 가진 사람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뼛속에서부터 익혀온 사람"이다. 이 설명은 조금 부족한 듯하다. 하지만 아래의 진술과 더불어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송곳처럼 한쪽으로 고정된 채 오직 '본다'로 일관"하는 사람 역시 무서운 눈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니 무서운 눈이란 가혹한 세상 앞에 위축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눈일 것이다. 세상의 협작과 모략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자의 눈, 참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바라보고, 심지어는 참을 수 없는 것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자의 눈일 것이다. 김홍희는 그런 "눈빛을 지구촌을 여행하며 몇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어쩌면 그가 처음으로 대면한 무서운 눈은 그의 스승인 마쓰자키 선생의 그것일지도 모른다.

 

너희들은 수영을 잘한다. 강에 사람이 떠내려간다. 아직 살아 있다. 사람을 구할 수도 있고 카메라를 들고 있으니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할래? !”

내 앞자리의 학생이 머뭇거리자 여지없이 밀어낸다.

!”

산발적으로 날아다니는 그의 손가락 끝은 칼날처럼 날카롭다.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 생각을 가다듬어본 적이 없는 그런 질문의 연속이었다. 카메라를 내던지고 사람을 구한다고 해도 밀려나고 사진을 찍고 난 뒤 구한다고 해도 밀려난다. 그런 상황이 되면 생각해보겠다는 학생들은 완전히 바보 취급을 당하며 밀려났다. 그는 바보 같은 놈이라는 말을 학생들의 뒤통수에 꽂는 것을 잊지 않았다.

!”

갑자기 칼끝이 내 눈을 가리켰다.

사진을 찍고 말겠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 잘난 사진을 찍고 있어?”

도마에 오른 고기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도망갈 곳이 없었다. 마쓰자키 선생은 분명 우리들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 공격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넌 잔인한 놈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분명 너를 잔인한 놈으로 낙인찍을 거다.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사람의 사진을 찍어? 한 장의 사진을 위해? 그럴 수 있어? 넌 잔인한 놈이야!”

그는 집요했다. 몇 남지 않은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우리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찍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이유를 대라.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여? 넌 살인자야. 정당한 이유를 대지 않는 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모르겠다는 말 외에는. 답을 알기는 알겠지만 말로 할 수가 없다는 변명을 들이대었을 때 그는 노기를 띠면서 몰아붙였다.

아는데 말을 못해? 니가 니 엄마를 아는데 엄마라고 안 부르고 뭐라고 불러?”

난감하다. 천하에 잔혹한 질문이다(<<방랑>> 중)

(<<방랑>>은 2002년에 나온 책인데, 지금은 절판이다. 정가가 9,800원 하는 책인데, 한 중고서점에서 세 배에 가까운 값을 주고 샀다. 아마 네 배 다섯 배여도 샀을 것이다.)

 

 

   마쓰자키 선생은 강의 첫 시간에 질문을 던져 학생들을 몰아낸다. 그의 질문은 무작위다. 하루에 몇 시간 사진을 생각하는지, 이 강의실에 모기가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인지, 이런 질문들을 마구 던진다. 선생은 그 질문의 정점에서 '천하에 잔혹한 질문'을 던진다. 죽어가는 사람을 구할 것인가, 사진을 찍을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마쓰자키 선생의 눈은 분명 '무서운 눈'일 것이 틀림없다. 김홍희는 사진을 찍겠다고만 말한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이 책의 어디에도 '죽어가는 사람'을 찍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오고 수 년이 지난 뒤 김홍희는 이에 대해 어렴풋이 답하고 있다. 사진을 찍는 동안 그 역시 무서운 눈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허리띠 속에 감춰둔 전대를 풀어 달러 한 장으로 고슴도치의 생명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인적 없는 들판에 자유롭게 풀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슴도치의 고통이 순박한 사내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잡혀온 그의 절망이 더 이상 깊어질 수 없는 나락에 떨어진 순간, 나의 셔터는 끊어졌다.

  이때의 고슴도치와 나는 동격이다. 고슴도치는 이 순간에서 달아나려 할 뿐이고, 나는 최절정의 순간을 담으려 할 뿐이다. 고슴도치는 지금 직면한 운명에 거역을 꿈꾸고, 나는 더할 수 없는 그의 절망을 카메라에 담는다. 아이러니한 운명의 만남이다. 그때 그 순간이 고슴도치에게 주어졌듯, 내게도 주어진 것이다. 그와 나는 피할 수 없는 다급한 운명 안에서 조우했고, 우리는 각자 할 일을 했다(<<몽골방랑>>, 31면).

 

   삶은 가혹하다. 저토록 가혹하다. 그래도 바라볼 수 있을까. 바라보아야 한다. 죽을 운명에 처한 고슴도치의 다급함과 물에 떠내려 가는 사람의 다급함, 그 다급함만큼이나 사진을 찍는 사람의 운명 역시 다급하다. 이미지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흘러 가버린다. 흘러 가버린 것은 죽음과 같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러니 어찌 보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찍지 않을 수 겠는가. 사진가의 윤리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생명의 온전한 드러남을 보는 것이다. 사진가의 윤리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다급함을 포착하는 것이다. 죽음의 운명을 거스르는 최선의 방법은 죽음이다. 사진가의 운명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은 셔터를 누르는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죽은 자는 죽음으로써 영원히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으나, 사진가는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에만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왜? 사진을 찍는 그 순간만큼은 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바깥에는 내 생에 한유했던 어떤 비밀의 오후가 멈추려 했다. 나는 얼른 카메라를 들었다. 카메라의 셔터는 깜박이는 눈과 같다. 어떤 것을 보는 순간은 뜬 눈이지만, 메모리가 되는 시간은 눈을 깜박이는 탄지의 순간이다. 그러니 실제로 촬영되는 어떤 광경이란 실제로는 사진가가 보지 못하는 순간이다(<<몽골방랑>>,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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