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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정용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평점 :
그런 소설이 있다.
완벽히
주인공에 몰입되어 그 주인공 앞에 기적이 일어나기를 그래서 조악한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이라도 좋으니 그가 행복해지기를 행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소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소설이 끝난다면 소설가를 욕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런 소설을 읽는 순간은 소설을 쓰는 소설가만큼이나 조심스럽다.
소설가
역시 주인공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 그 역시도 일종의 외줄 위에서 외줄 끝까지 걸어갈 것인지,
아니면
외줄걷기를 포기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소설을 썼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독자는?
외줄의
끝에서 주인공에겐 어떤 변화도 없이 불행이라면 불행인 삶이 계속 되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읽어나간다.
그러니
독자도 읽기라는 외줄 위에서 그 외줄에서 내려와도 그만이지만 외줄의 끝까지 걸어가 보는 것이다.
소설가가
글쓰기를 통해 소설을 완성해 나간다면 독자는 그 쓰여진 글들을 삼킴으로써 소설을 완성해 간다.
그런
소설이란 쓰는 자도 읽는 자도 지난하긴 마찬가지며, 그런 소설은 쓰는 자도 읽도 있는 자도 어떤 희열의 정념에 휩싸일 것은
당연하다.
정용준의 「떠떠떠
떠」는
그런 유의 소설이다.
왼쪽을 쳐다보면 창문이 있었어. 그리고 열한 시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면 네가 앉아 있었지. 창문 너머 파랗게 열린 하늘이나 그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비행기의 느린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처럼, 나는 너를 봤어. 앉아 있을 때는 녹슨 흉상처럼 느껴지다가도 서 있을 때는 폭풍 속에 흔들리는
연약한 나무 같았지. 금방이라도 뿌리째 뽑혀 어딘가로 날아갈 것 같은 너를 보고 있으면 난 이상하게도 마음이 저릿해져 손바닥으로 왼쪽 가슴을 꾹
누르곤 했어. 네가 책을 들고 서 있을 때마다 나는 알아볼 수 있었어.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손끝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모습을. 입속에 갇혀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 너의 혀를 본 것도 같았지. 아니 온몸이 한 조각의 혀처럼 보였어. 흠뻑 젖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거든. 그때 넌 내게 어떤 풍경과도 같았어. 그 풍경 속에 뛰어들어 너의 손을 한 번이라도 잡아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는 없었지. 그때는 너무 어렸으니까. 아마도 그때부터 나는 너를 사랑했던 것 같아.
선생이 말더듬이인 나에게 책을 읽으라고 시켰을 때, 그 곤혹스러운 상황을 바라보았던
그녀는 나를 풍경과도 같다고 했다. 왜 풍경인 것일까. 풍경은 기본적으로 자기 바깥의 정경이나 상황을 뜻하는 말이다. 풍경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와는 다른 이질적인 것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풍경의 양태는 두 가지다. 낯선 것들이
낯익음으로 돌아서기 전의 상태. 이것은 여행을 할 때 만나게 되는 풍광들에서 느낄 수 있는 감탄, 경탄 같은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낯익었던
것들이 낯선 것들로 변화하는 지점, 이를 테면, 잘 알고 있던 곳에서 갑자기 방향감을 일어버릴 때 느껴지는 낯설음에 상응한다. 이 소설에서
그녀의 풍경은 낯익은 것이 낯선 것으로 돌아서는 지점에서 생겨나는 풍경이다. 그녀에게 나는 익숙한 나였으니까, 하지만 책을 읽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나는 낯선 어떤 것, 즉 하나의 풍경으로 변화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걸어야 한다. 그녀는 이 풍경을 왜 사랑하게 된 것일까. 그녀는
아마 이 풍경에서 숭고를 느꼈으리라. 풍경이 숭고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의 작동방식은 이렇다.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나가 배를 타고
있다면 그때 느끼는 것은 공포다. 생각해보라. '파이'(<라이프 오브 파이>)가 거센 폭풍우가 쏟아지는 밤, 갑판으로 나갔을 때 그가
느낀 것은 신의 경이였다. 그런데 그 파도가 배를 삼키고, 물이 들어찰 때 느낀 것은 공포였다. 무엇이든 파쇄할 만큼의 거센 파도가 바다를
향할 때는 경이를 느낀다. 왜, 그 파도는 나와는 관계 없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러나 파도가 나를 향해 달려올 때 나는 공포를 느낀다. 왜
내가 거기에 있으므로. 숭고는 그런 부재 속에서 존재한다.
그래도 아직 왜 사랑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십분 양보해서 말더듬이인
나가 경이롭거나 숭고하다고 치자. 그런데 어떻게 그녀는 그런 나를 사랑하기까지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녀는 이 풍경 속으로 들어가 그의 손을
잡아줄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녀는 어렸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녀가 나의 손을 잡아줄 수 없었던 진짜
이유는 그녀라는 생명이 나로 전환될 수 없는, 나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존재론적 한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녀는 풍경의 내부로 들어와서
그 풍경의 주체로 자리잡을 수 없다. 그 다가갈 수 없는 결핍, 다가갈 수 없는 한계, 그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서도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그녀라는 존재가 나라는 존재로 동일화될 수
없는 그 거리 속에서 나는 존재하며, 그 거리는 좁혀질 수 없다. 그러니 증오하든 사랑이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에 나는 그녀의 뇌전을 바라보며 떠듬거린다. "떠, 떠떠, 떠떠, 떠떠떠, 떠, 떠, 아아, 아아아하아아, 아아아, 아, 사,사, 사아,
아아, 아아아, 라라, 라라라라, 라, 라라라라, 아, 아아앙, 해." 증오하든지 사랑하든지, 한계 앞에서 우리가 보일 수 있는 태도는 고작
이것이다.
*사실 이에 대해서라면 처음부터 서영채를 인용해야 했다. 위의 말들은 서영채의 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마치 이 소설에 대한 평을 쓰기 위해서라는 듯 <절대공간: 풍경과 응시>(2013년 현대문학연구 하계발표대회
발표문)를 얼마전 내놓았다. 그 발표문에서 사유의 중요한 부분을 옮겨 놓는다.
지속적으로 투여된 시선은
대상을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 설사 그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익숙하고 평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인 시선이 투여되는 순간 그것은 특별한
대상이 된다. 그런 응시는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시선이 투여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일상적인 것일 수 없다. 설사
그것이 바로 그 직전까지 매우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실용적 관심이나 인식적인 관심과 무관한 그런 특별한
응시의 대상은 풍경이 된다. 이때의 풍경은 단순히 아름답거나 인상적인 경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풍경은 그런 점에서
일차적으로, 칸트가 언급했던 숭고와 동일한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칸트의 숭고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거대하고 위력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다. 폭풍우 치는 바다의 한복판에서 위험에 빠져 있을 때 사람이 느끼는 것은 미적인 것으로서의 숭고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그것을 숭고함으로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주체가 대상의 격렬함으로부 떨어져 나와 안전한 공간에 있어야 한다. 동일한
대상이지만 어떤 경우의 주체에 의해 포착되느냐에 따라 공포가 될 수도 있고 숭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풍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것 역시
미적 판단력의 대상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숭고와 동일한 작동의 방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칸트가 숭고의 예를 끌어온 것은
거대하거나 위력적인 자연 현상을 통해서였다. 그 거대함이나 위력은 자연에 속한 것이지만, 자연이 자기 자신을 거대하거나 위력적인 것으로 곧
숭고한 것으로 느낄 수는 없다. 풍경도 숭고처럼 인간 주체의 특별한 응시의 산물이다. 매일 아침 해가 뜨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어부에게 해
뜨는 풍경이란 일상적인 배경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바다가, 난생처음으로 그것을 보게 된 사람 앞에 있다면, 혹은 도시로 이주해야
했던 어부의 향수 어린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영상이라면, 그것은 매우 다른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풍경은 반드시 어떤 아름다운
경관일 필요는 없다. 매일 보았던 동네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람의 눈에는 잊을 수 없는 풍경이 되는 것이다.
......略......
풍경은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부재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 시선의 주체가 없어야 숭고가 성립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에서 풍경은,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지닌 과조적 주체와 상관적이다. 그러나 이런 진술이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닌 것은 앞에서 논의해온 바와 같다. 폭풍우 치는
바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와 연관되어 있는 한에서만 숭고한 대상이 될 수 있다. 즉 인간이 지닌 유한성과 연약함의 반면으로 표상되는 한에서만
숭고한 풍경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주체는 자신의 부재를 입증하는 자신의 공간을 그림 속에 남겨둠으로써만, 자신의 자리를 부정적으로
기입해 넣음으로써만, 그것을 숭고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주체가 마땅히 있어야 할 빈 자리, 주체가 빠져나가고 생긴 주체의 공백을 그 안에
품으로써만 그 장면은 풍경일 수 있다. 조개 캐는 남자를 멀리서 지켜보았던 <잊을 수 없는 사람들>[구니키다 돗포]의 오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대상이 히말라야의 만년설에 덮인 봉우리이건 맨하탄의 빌딩 숲이건, 혹은 목가적인 전원이건 황폐하게 버려진 사막이건 간에, 풍경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부재하는 주체의 표상이 되며, 종국적으로는 인간의 유한성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존재론적 갈망의 상징이 된다. 그렇게
존재하는 한에서만 그것은 풍경일 수 있다.
풍경이란 그러므로 종국적으로는
유한자로서의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곳, 영유할 수 없는 것, 버리고 갈 수밖에 없는 어떤 것들에 대한 표상이 된다. 그런 점에서 풍경은 숭고를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 숭고한 대상이 유한자에 의해 포착된 절대성의 표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더 이상 육화되기를 그쳐버린 신,
자신의 존재 증거를 땅 위의 사람들에게 현시해 주기를 그쳐버린 절대자의 표상이다. 풍경에 대한 응시를 통해 숭고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란 그러므로
사실은 자신의 영역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객관적 초월성의 흔적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라 해야 하겠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지와 무관하게
응시 앞에 선 대상으로서의 풍경은 그 자체가 존재론적 불안의 표상이며, 세계의 한계와 자신의 유래를 모르는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근대적 개인이
겪어야 할 형이상학적 질병의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