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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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말을 옮기자면 이렇다. ˝선생의 책제목 그대로 “밤이 선생”이라면, 그는 지금 한국문학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밤이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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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고전 강의 - 오래된 지식, 새로운 지혜 고전 연속 강의 1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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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이 쓴 󰡔인문고전강독󰡕(89~90)에 실린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안티고네󰡕에 국한된 서평쓰기가 아니라 서평 일반론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안티고네󰡕를 읽기 전에 과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소포클레스가 󰡔안티고네󰡕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A4 용지 반 매에 두 문단 정도로 쓰는 것입니다. 과제를 하나느 방법은 이렇습니다. 우선 󰡔안티고네󰡕의 메시지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여겨지는 문장을 하나 뽑아서 적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유를 최소한 세 가지는 써야 합니다. 이 세 가지 근거 역시 󰡔안티고네󰡕 안에서 뽑아내야 합니다. 이 과제는 우리가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규모있게 쓰는 서평으로 가는 중간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서평을 쓸 때는 이 텍스트에서 무엇을 핵심-이 핵심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인 메디아스 레스(in medias res)라는 말을 떠올려야 합니다-으로 취해서 끄집어낼 것인가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 텍스트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거를 세 가지 들면 서평의 기본 뼈대가 만들어지고, 이 뼈대에 살을 붙이면 서평이 됩니다. 사람들마다 핵심으로 여기는 것이 다를 것이므로 서평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서평은 책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출판사에서 만드는 보도자료가 아닙니다. 이 책이 나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을 뽑아서 쓰는 것이 서평입니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이 책을 지탱하는, 이것을 빼면 책 전체 구조가 무너질 것 같은 핵심 문장을 딱 하나만 뽑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안티고네를 읽으면서 우리는 이것을 연습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책을 밀도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서평을 쓰기 위한 실마리를 하나 이야기하겠습니다. 󰡔안티고네󰡕는 테바이의 왕 크레온과 어린 소녀 안티고네의 갈등을 다룬 비극입니다. 크레온의 입장과 안티고네의 입장이 맞서는데, 문제는 두 입장이 모두 옳다는 데 있습니다. 이 두 입장을 어떻게 해야 잘 조화시킬 수 있을까 또는 이 비극을 보면서 고대 희랍인들은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등을 생각하면서 읽어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이 부분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인 것 같습니다.

조금 제 이야기를 하자면, 꼭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고전을 안 읽고도 이 책만 보면 어디가서 아는 체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샀는데

개뿔^^

여기에 나온 고전을 안 읽고 이 책을 읽어봐야 아무 짝에 쓸모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물론 강유원이 책을 잘 못 썼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고전을 읽고 난 후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참고서로 이 책을 활용하라는 말입니다.^^

저처럼 이 책만을 읽고 아는 체를 하긴 힘들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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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만세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15
박정대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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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 박정대라는 이름에는 아무런 뜻이 담겨 있지 않다. 󰡔체 게바라 만세󰡕는 이러한 이름의 특징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 시집의 발문에 적힌 강정 시인의 말을 신뢰한다면, 박정대는 2007년과 2011년에 체 게바라 만세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다른 제목을 달아야 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체 게바라 만세󰡕가 꼭 이 시집의 이름이 아니어도 무관하다.

그런데 왜 왜 박정대는 󰡔체 게바라 만세󰡕라는 이름을 고집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름에는 뜻이 없다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가령 이런 대화를 생각해보자. 당신이 나에게 이게 뭐지?”라고 묻는다. 나는 , 컵이야.”라고 답한다.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 이것은 컵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이름에 뜻이 없다면 이것라고 대답하는 것은 얼마나 무용한가. 이것을 다른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이것은 컵이다라는 문장에서 이것은 인식대상이며 은 인식주체의 말이다. 그렇다면 인식대상은 컵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컵처럼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컵은 인식대상의 형태를 의미할 수도 있고, 그 기능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인식주체는 인식대상의 전체가 아닌 부분만을 규정한다. 인식대상은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오직 인식대상은 인식주체의 입을 빌려서만 말 되어지기 때문에 인식대상은 훼손된다. 인식대상과 인식주체 간의 간격을 어떻게 건너뛸 수 있는가. 아마 최선의 방법은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순환논증은 오류가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명징한 언어일 것이다. 그러니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오류 없는 최상의 말하기 방식일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의 말은 무용할 것이다. 박정대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대는 말한다 축구는 축구고 담배는 담배다

 

나는 왜 그런지 잘 모른다 잘 모른다는 것이 나의 본질 중 하나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부분(155*)

*그의 시에만은 페이지 수를 넣는 것이 좋겠다.

 

축구는 축구고 담배는 담배다라고 말하는 것은 박정대의 방식이 아니다. 박정대는 이런 식이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축구 중계를 본다 담배를 피운다 축구는 한 곡의 장엄한 미사곡 담배는 꿈틀거리며 타오르는 한 마리의 혁명”(위의 시, 149) 박정대에게 커피는 커피가 아니라 축구와 담배와 혁명이 한꺼번에 얽혀 있는 어떤 것이다. 다른 것을 다른 것로 설명하는 것, 이것이 박정대 스타일이다. 이렇게 말이다. “페르소나, 매그놀리아, 멜랑콜리아, 몽골리아”(파르동, 파르동 박정대, 75) 가면이라는 뜻의 페르소나가 어떻게 목련이라는 뜻의 매그놀리아와 연관되는지 묻지 말라. 연관이 아니라 연관의 가능성에 집중하여야 한다. ‘이것으로 설명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으로 온전히 옮길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일말의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 “페르소나, 매그놀리아, 멜랑콜리아”, 그 불가능의 가능성 속에서 몽골리아가 탄생한다. 시인은 이렇게 쓴다.

 

바람이 분다. 여기는 울란바토르의 톨 강가다. 톨 강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은 시라무런 초원을 거쳐 나의 내면으로 불어올 것이다, 나는 그런 순간을 시라고 부른, 나의 시가 말을 타고 타박타박 별빛 쏟아지는 초원의 내면을 횡단하고 있다.

―「파르동, 파르동 박정대, 75

 

박정대의 시어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어를 불러 모은다. “페르소나에서 출발한 시어의 최종 목적지가 몽골리아인 것은 아니다. 박정대는 더 나아간다. 바로 이어지는 시구는 아니 여기는 몽마르트르 언덕의 바람 부는 저녁이다. “울란바토르거기에서도 특히 톨 강”, 이 강도 버리고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다시 내달린다. 그렇다고 이 언덕이 최종 종착지겠는가. 바람에게 목적지가 없듯이 그의 시가 불려가는 곳 역시 그러하다. 그는 단어들을 특히 이름들을 마구 긁어모아, 목적지 없는 목적지를 누빈다. 이렇게 말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갓산 카나파니, 닉 케이브, 라시드 누그마노프, 마르셀 뒤샹, 미셸 우엘르베끄, 밥 딜런, 밥 말리, 백석,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빅또르 쪼이, 피에르 르베르디*, 아네스 자우이, 악탄 압디칼리코프, 앤디 워홀, 에밀 쿠스트리차, 장 뤼크 고다르, 조르주 페렉, 지아 장 커, 짐 자무시, 체 게바라, 칼 마르크스, 톰 웨이츠, 트리스탕 차라, 파스칼 키냐르, 페르난두 페소아, 프랑수아즈 아르디, 프랑수아 프뤼포, 피에르 르베르디

위의 시, 76

*강조-인용자. 천사가 지나간다(󰡔삶이라는 직업󰡕)에서 피에르 르베르디는 저 자리에 있었으나 이 시에서 저 이름은 제일 끝으로 옮겨져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딱 하나다. 저 열거가 가나다순이라는 싱거운 사실 말이다.

 

시인, 철학자, 가수, 영화감독, 소설가, 화가 등등. 그는 왜 이런 사람들을 이렇게 끌어 모아 늘어놓길 좋아하는 것일까? 앞에서 우리는, 인식주체는 인식대상의 전체가 아닌 부분밖에 말할 수 없다고 했고, 인식대상을 온전히 전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순환논증이라고도 했다. 정말 그러하다면 시는 불가능할 것이며 특히 박정대에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박정대는 시를 말하려고하는 사람, 꼭 말하고야 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 왜냐하면 박정대는 시를 사랑하는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쓴다, 시를. 박정대는 인식주체가 사용하는 이름이 인식대상의 부분만을 드러낸다는 사실에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더 많은 이름들을 불러내 인식대상의 빈틈을 메운다. 그는 물량으로 승부하는 최초의 시인이다. 허나 텅 빈 이름을 아무리 불러 모아도 텅 비어 있긴 매한가지가 아니겠는가.

이에 대해 박정대는 소위 불온한 시들은 혁명적 유머로 이루어진다는 반론을 펼친다(위의 시, 83). 이 텅 빈 것들로 텅 빈 것들을 채우는 이 무모함, 이 불온함, 이 부조리, 이것이 혁명적 유머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시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방법이 아니라 적과 싸워서 이길 수 없는방법으로 적과 싸우는 일, 가능한 것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성으로 가능성에 맞서는 일, 이것이 시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체 게바라 만세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 시집의 제목이 󰡔체 게바라 만세󰡕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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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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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적합한 한자성어를 찾으라면 용두사미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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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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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 대한 분석의 탁월함을 인정한다지만, 그 다음에 대해서까지 수긍할 수는 없다. 이 책을 한자성어로 요약하자면 용두사미 정도일 것이다.

한병철은 에랭베르의 이론이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한다. 성과사회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사회 형태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 이전의) 근대자본주의는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한다.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안하면 안 된다'는 부정적 언술을 포함한다. 저자는 이것을 "금지의 부정성"이라 부른다. 이와 달리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이 성과사회의 특징이다.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분명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다. 생산성이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규율의 기술이나 금지라는 부정적 도식은 곧 그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해체된다.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은 그 이상의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근대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 모두가 노력해야 했던 사회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었다. 그래도 이때는 행복했다.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과업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러한 과업의 달성이 실제적으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기 근대(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 생산성의 향상은 일정한 수준에 도달했고 더 나아질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회는 자꾸만 생산성 향상을 부추기며 생산성을 더 향상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생산성은 상품의 양과 질을 포괄하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 포화상태인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긍정성은 하나의 허상이며 가상이다. 이 허위와 허구를 실현하려는 노력은 지난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어찌 피로하지 않겠는가.

'할 수 있다''긍정성'은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개인에게 스며, 개인은 이 사실을 믿게 된다.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29)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고 느끼는데도 사회는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피로한 것은 당연하다.

피로는 계속해서 증폭되지만 사람들은 그 피로에서 여유를 가질 틈이 없다. 피로는 누적될 뿐이다. 기술발달은 인간의 멀티태스킹 능력을 요구한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함께 해야 한다. 더 피로해진다. 웃기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피로는 때문일 수 있다.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아야 했던 프로메테우스는 피로해진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 한다. 피로하지만 쉴 수 없다. 모두가 피로하지만 성과사회는 성과를 달성하라고 종용한다. 사회가 종용하기도 하지만, 개인을 피로하게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성과사회의 '주문'에 함몰된 개인은 스스로가 자신을 착취하면서도 자신은 자유롭다고 믿는다.

이런 사회를 극복하는 방법, 이런 사회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는 '사색''한트케의 피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멀티태스킹 능력은 진화의 산물일 수 없다. 수렵시대 인간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해야 했다. “경쟁자가 먹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먹는 중에 도리어 잡아먹히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며, 동시에 새끼들도 감시하고, 또 짝짓기 상대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아야 한다.”(31) 이에 맞서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사색적 집중이다. “오직 깊은 주의만이 눈의 부산한 움직임을 중단시키고 제멋대로 이러저리 움직이는 자연의 손을 묶어둘수 있는 집중상태가 '사색적 집중'이다. 사색적 집중 혹은 관조하는 능력을 통해서 멀티태스킹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한트케의 피로'. '성과사회의 피로'는 피로를 축적시킬 뿐 해소시키지는 않는다. 인간은 피로에 빠져 허우적 될 수밖에 없다. 어떠한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다. 일에 치여 사는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돌볼 시간조차 넉넉하지 않다. 그런데 정치를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가. 이웃을 돌아보라는 언명은 얼마나 치사스러운 말인가. 이러한 '성과사회의 피로'는 '한트케의 피로'와 대별된다. '한트케의 피로'는 나의 피로 속에 나를 내버려 두는 일이다. ““자아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틈새를 열어준다.” 그 틈새는 아무도 그 무엇도 지배하지 않고 지배적이지조차 않은친절의 공간, 무차별성의 공간이다.”(68)

 

한병철은 이러한 사색과 피로가 성과사회를 정지시킬 수 있는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에랭베르의 오류에서 한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성과사회는 그의 말처럼 시스템에 의해 작동하는 사회다. 성과사회의 시스템은 한병철이 말하는 '사색적 집중'이나 '한트케의 피로'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사색적 집중'과 '한트케의 피로'를 회복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말한 이 두 가지는 한껏 어렵게 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단순히 말하자면 피로할 땐 여유를 가지고 휴식을 취하라는 말 정도일 게다. 그가 분석하였듯 성과사회는 피로한데도 쉴 수 없기 만들기 때문에 피로가 더 누적된다. 사정이 그렇다면 쉬어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쉴 수 있는 방법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한병철은 쉴 때 쉬어야 한다는 당위론을 펼치며 또 한 편으로 쉴 수 있다는 가상을 심어주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자신이 근대적 자본주의와 후기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답습하여 훨씬 강도 높은 '피로'를 양산하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졸라 피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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