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만세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15
박정대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름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 박정대라는 이름에는 아무런 뜻이 담겨 있지 않다. 󰡔체 게바라 만세󰡕는 이러한 이름의 특징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 시집의 발문에 적힌 강정 시인의 말을 신뢰한다면, 박정대는 2007년과 2011년에 체 게바라 만세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다른 제목을 달아야 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체 게바라 만세󰡕가 꼭 이 시집의 이름이 아니어도 무관하다.

그런데 왜 왜 박정대는 󰡔체 게바라 만세󰡕라는 이름을 고집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름에는 뜻이 없다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가령 이런 대화를 생각해보자. 당신이 나에게 이게 뭐지?”라고 묻는다. 나는 , 컵이야.”라고 답한다.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 이것은 컵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이름에 뜻이 없다면 이것라고 대답하는 것은 얼마나 무용한가. 이것을 다른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이것은 컵이다라는 문장에서 이것은 인식대상이며 은 인식주체의 말이다. 그렇다면 인식대상은 컵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컵처럼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컵은 인식대상의 형태를 의미할 수도 있고, 그 기능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인식주체는 인식대상의 전체가 아닌 부분만을 규정한다. 인식대상은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오직 인식대상은 인식주체의 입을 빌려서만 말 되어지기 때문에 인식대상은 훼손된다. 인식대상과 인식주체 간의 간격을 어떻게 건너뛸 수 있는가. 아마 최선의 방법은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순환논증은 오류가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명징한 언어일 것이다. 그러니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오류 없는 최상의 말하기 방식일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의 말은 무용할 것이다. 박정대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대는 말한다 축구는 축구고 담배는 담배다

 

나는 왜 그런지 잘 모른다 잘 모른다는 것이 나의 본질 중 하나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부분(155*)

*그의 시에만은 페이지 수를 넣는 것이 좋겠다.

 

축구는 축구고 담배는 담배다라고 말하는 것은 박정대의 방식이 아니다. 박정대는 이런 식이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축구 중계를 본다 담배를 피운다 축구는 한 곡의 장엄한 미사곡 담배는 꿈틀거리며 타오르는 한 마리의 혁명”(위의 시, 149) 박정대에게 커피는 커피가 아니라 축구와 담배와 혁명이 한꺼번에 얽혀 있는 어떤 것이다. 다른 것을 다른 것로 설명하는 것, 이것이 박정대 스타일이다. 이렇게 말이다. “페르소나, 매그놀리아, 멜랑콜리아, 몽골리아”(파르동, 파르동 박정대, 75) 가면이라는 뜻의 페르소나가 어떻게 목련이라는 뜻의 매그놀리아와 연관되는지 묻지 말라. 연관이 아니라 연관의 가능성에 집중하여야 한다. ‘이것으로 설명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으로 온전히 옮길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일말의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 “페르소나, 매그놀리아, 멜랑콜리아”, 그 불가능의 가능성 속에서 몽골리아가 탄생한다. 시인은 이렇게 쓴다.

 

바람이 분다. 여기는 울란바토르의 톨 강가다. 톨 강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은 시라무런 초원을 거쳐 나의 내면으로 불어올 것이다, 나는 그런 순간을 시라고 부른, 나의 시가 말을 타고 타박타박 별빛 쏟아지는 초원의 내면을 횡단하고 있다.

―「파르동, 파르동 박정대, 75

 

박정대의 시어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어를 불러 모은다. “페르소나에서 출발한 시어의 최종 목적지가 몽골리아인 것은 아니다. 박정대는 더 나아간다. 바로 이어지는 시구는 아니 여기는 몽마르트르 언덕의 바람 부는 저녁이다. “울란바토르거기에서도 특히 톨 강”, 이 강도 버리고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다시 내달린다. 그렇다고 이 언덕이 최종 종착지겠는가. 바람에게 목적지가 없듯이 그의 시가 불려가는 곳 역시 그러하다. 그는 단어들을 특히 이름들을 마구 긁어모아, 목적지 없는 목적지를 누빈다. 이렇게 말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갓산 카나파니, 닉 케이브, 라시드 누그마노프, 마르셀 뒤샹, 미셸 우엘르베끄, 밥 딜런, 밥 말리, 백석,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빅또르 쪼이, 피에르 르베르디*, 아네스 자우이, 악탄 압디칼리코프, 앤디 워홀, 에밀 쿠스트리차, 장 뤼크 고다르, 조르주 페렉, 지아 장 커, 짐 자무시, 체 게바라, 칼 마르크스, 톰 웨이츠, 트리스탕 차라, 파스칼 키냐르, 페르난두 페소아, 프랑수아즈 아르디, 프랑수아 프뤼포, 피에르 르베르디

위의 시, 76

*강조-인용자. 천사가 지나간다(󰡔삶이라는 직업󰡕)에서 피에르 르베르디는 저 자리에 있었으나 이 시에서 저 이름은 제일 끝으로 옮겨져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딱 하나다. 저 열거가 가나다순이라는 싱거운 사실 말이다.

 

시인, 철학자, 가수, 영화감독, 소설가, 화가 등등. 그는 왜 이런 사람들을 이렇게 끌어 모아 늘어놓길 좋아하는 것일까? 앞에서 우리는, 인식주체는 인식대상의 전체가 아닌 부분밖에 말할 수 없다고 했고, 인식대상을 온전히 전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순환논증이라고도 했다. 정말 그러하다면 시는 불가능할 것이며 특히 박정대에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박정대는 시를 말하려고하는 사람, 꼭 말하고야 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 왜냐하면 박정대는 시를 사랑하는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쓴다, 시를. 박정대는 인식주체가 사용하는 이름이 인식대상의 부분만을 드러낸다는 사실에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더 많은 이름들을 불러내 인식대상의 빈틈을 메운다. 그는 물량으로 승부하는 최초의 시인이다. 허나 텅 빈 이름을 아무리 불러 모아도 텅 비어 있긴 매한가지가 아니겠는가.

이에 대해 박정대는 소위 불온한 시들은 혁명적 유머로 이루어진다는 반론을 펼친다(위의 시, 83). 이 텅 빈 것들로 텅 빈 것들을 채우는 이 무모함, 이 불온함, 이 부조리, 이것이 혁명적 유머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시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방법이 아니라 적과 싸워서 이길 수 없는방법으로 적과 싸우는 일, 가능한 것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성으로 가능성에 맞서는 일, 이것이 시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체 게바라 만세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 시집의 제목이 󰡔체 게바라 만세󰡕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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