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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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를 다시 읽고 그 문장을 옮겨 적고 있다. 참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잘 쓴 글'은 대개 '이빨'일 때가 많고, 좋은 글은 거개가 '진실'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사유는 오목하고 문장 하나하나는 사려 깊다. 위험하긴 하지만 오로지 그의 글을 보고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존경하게 되었다. 여기에 옮겨 놓은 것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선생 나름의 입장이다. 하지만 이것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지침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것을 따른다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며, 더러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1. 시의 소용

시인이 제 몸을 상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저 대중 소비적 의 소구력과 성공에 비한다면, 새로운 감수성과 이미지의 생산이 목표인 본격적인 시의 수요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미미하다. 그러나 시가 생산하는 것은 어떤 방법과 경로를 거쳐서든 대중물들 속에 흡수되고 전파된다. 시는 낡았고 댄스 뮤직은 새롭다고 믿는가. 사실을 말한다면 시에서는 한참 낡은 것이 댄스 뮤직의 첨단을 이룬다.

프랑스 상징주의를 알고 중국의 제3세대 영화나 5세대 영화를 아는 사람들은 그 둘이 기이하게 닮았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것이다. 시의 열병을 심하게 앓았던 사람이 지금 동숭아트홀에서 상연하는 헤드윅본다면 거기에 랭보와 아폴리네르와 휘트먼이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가를 또한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은 시의 소용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선 거기에도 있다는 것이다(󰡔밤이 선생이다󰡕, 183~184).

 

2. 말과 말법, 글과 글법

그러나 이 마지막 진실이 항상 과격한 형식으로 드러날 때, 그것이 우리의 삶 자체를 불안하게 만들고, 말하는 사람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 함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 진실은 배타적인 진실일 경우가 많으며 해석의 여지를 쉽게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을 개혁한다는 것은 말들이 지니고 있는 힘의 질서를 바꾼다는 뜻도 된다. 개혁의 시대에는 열정을 지닌 개인의 과격한 언어들이 밑바닥 진실의 힘을 업고 관행의 언어들을 압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개혁 프로그램들이 한때 무기로 삼았던 과격한 말들에 스스로 발목이 잡혀 무산되고 말았던 예를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그래서 진실을 꿰뚫으면서도 해석의 여지와 반성의 겨를을 누리는 새로운 문체의 개발이 개혁의 성패를 가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함직도 하다(200~201).

 

3. 사실주의

사실은 공허하게, 움직일 수 없이 거기 있기에 다른 것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사실주의 예술의 뛰어난 미덕이다(163).

 

4. 사소함

사소하다는 것은 세상의 큰 목소리들과 엄밀한 이론체계들이 미처 알지 못했거나 감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소한 것들은 바로 그 때문에 독창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175).

 

5. 예술

사람의 꿈은 사람 속에서 피어나 사람과 동행하지만 반드시 사람과 같은 방향에 시선을 두는 것은 아니다. 이 겨울의 개는 우리가 흔히 예술이라고 부른 것의 정신이다(152).

 

6. 예술과 기억과 윤리

시는 기억술이라는 말이 있다. 비단 시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은 왕성했던 생명과 순결했던 마음을, 좌절과 패배와 분노의 감정을, 마음이 고양된 순간에 품었던 희망을, 내내 기억하고 현재의 순간에 용솟음쳐 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방법이다. 기억이 없으면 윤리도 없다고 예술은 말한다. 예술의 윤리는 규범을 만들고 권장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날의 희망과 좌절, 그리고 새롭게 얻어낸 희망을 세세연년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204).

 

7. 예술가로 산다는 것

오늘날 이 땅에 사는 대부분의 시인들, 더 넓게 말해서는 예술가들이 삶에 대해 지니고 있는 태도가 이와 같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헐렁하게 살며 동시에 엄숙하게 산다. 지금은 다른 세상 사람이 된 한 판화가는 자주 양말도 신지 않은 채 외출을 했지만 그가 목판에 새긴 칼자국 하나하나는 시대의 고뇌와 희망을 가득 충전되어 있다. 문학 수업에 너무 전념한 나머지 대학을 중퇴하고 뒤늦게 명예졸업을 해야 했던 어느 시인은 총장이 교무위원들을 대동하고 증서를 수여하는 자리에 월남치마를 입은 듯 헐렁하지만 형식이 그럴 뿐이며, 거기 표현되는 삶의 내용은 처절하고 엄수하다. 그들이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사람들이 가지 않는 가장 좁은 길까지 가보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자유로운 삶으로 그 엄숙함을 책임진다(215면).

 

출처-내 블로그(http://blog.naver.com/mgenjie/22026974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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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아이링은 󰡔傳寄󰡕의 서문에 어서, 어서, 늦으면, 안 돼, 안 돼!”라고 썼다. 여기에서 그녀의 개인적 명예욕을 뚜렷이 읽어낼 수 있지만, 이 글에는 명예욕뿐만 아니라 어떤 고독감이 연결되어 있다. ‘시대는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변화하며 더 큰 파괴가 도래할 것이며,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한 예감이 그녀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녀는 중국 전통극 벙벙시를 본 후 미래의 황무지에서 건물과 담장의 폐허 속에서는 오로지 벙벙시의 여주인공 같은 여자만이 의연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어떤 시대, 어떤 사회든 그녀를 위한 집은 존재할 것이다.”라고 썼다. 이를 통해 장아이링의 지적 배경 속에서 전통과 근대성이 항상 서로 병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아이링의 음산하고 우울한 인물들이 그녀의 소설에 왜 등장할 수밖에 없는지를 조심스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녀는 벙벙시의 여성들을 현대 속으로 아니 그녀의 내면으로 옮겨와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음을, 어떤 식으로든 살아갈 수 있음을 보이고자 했을 것이다.

장아이링의 친구인 옌잉이 그린 󰡔전기󰡕의 표지는 퇴폐적인 대조를 잘 말해준다. 이 그림에서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이 앉아서 혼자 마작을 하고 있다. 그 옆에는 유모가 아이를 안고 앉아 있다. 그러나 난간 밖으로부터 침입해서 엿보고 있는, 불안정하게 위쪽이 더 여성의 토로소는 현대적 여성의 몸이다. 모던걸의 호기심 어린 응시는 지금까지 조용하던 규방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든다. 장아이링은 그것이 바로 내가 만들어 내고 싶었던 분위기라고 했다. 이 표지 그림은 전통과 현대, 역사와 소설, 당대(唐代)의 전기와 현대의 소설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장아이링의 반복된 고민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장아이링의 반복된 고민이란 서구문화를 중국문화보다 더 빨리 흡수하여 오히려 중국의 전통문화가 서양 사람보다 더 낯설게 느끼게 된 근대인들, 특히 그런 여성들, 남성중심의 전근대적 세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여성들, 그렇지만 몸은 여전히 전근대적 공간에 속박당해 있는 여성들, 혹은 그런 자신에 대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구여성은 난간을 등지고 앉아 아무런 동요의 빛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신여성의 마음은 그보다는 더 복잡했을 것이다. 그녀는 어떤 경험도 전범도 없는 현대적 삶으로 내몰리면서, 자신에게 닥친 일들을 오로지 자신에게서 답을 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구시대의 삶 속으로 머리를 디밀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여성은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지워져버렸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살아내야 하는 것, 아무런 표정 없이도 살아내야 하는 것, 아무런 감정도 표정도 없는데도 여전히 해소될 수 없는 과거와 온전히 근대적일 수 없는 경계인으로서의 신여성을 이 그림은 잘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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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 윤대녕 대표중단편선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1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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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라면 시를 통과한 소설’(신형철)이라 부를 만하다.

 

그럴 때마다 마루엔 괴괴한 적막이 빈 항아리처럼 도사리고 앉았다 사라지곤 한다(169).

 

빛 한 점 없는 새까만 내가 몹시도 서글펐던 것이다.(175)

 

하늘에서 신발이 매우매우 떨어져요?(192)

 

신발도 없이 밖에서 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194)

 

빛의 걸음걸이에서 따온 문장들이다. 이런 문장도 있다. “맞선을 본 자리에서 여동생은 꼭이 입양되는 아이처럼 결혼에 응했다고 한다.”(179)와 같은 문장은 여동생이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했는지를 단 한 문장으로 각인시킨다. 최소한의 언어로 어떤 사건 전체를 강렬하게 꿰뚫어버린다. 시가 함축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시의 무기인 이미지를 윤대녕은 시인만큼이나 잘 다룰 줄 안다. 사람이 태어날 때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입양되는 아이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아무런 선택권도 없는 고아처럼 동생은 결혼을 해버렸다. 아마도 지금보다 더 나빠질 리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동생이 가진 절망은 무엇인가, 어쩌다 그런 질량의 절망을 가지게 된 것일까. ''는 난데없이 빛 한 점 없는 새까만 내가 몹시도 서글펐”(175)다고 말하는 것일까? ''와 여동생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 말할 때 비로소 윤대녕의 소설은 아름답다에 그치지 않고 그 아름다움의 지향점까지도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빛의 걸음걸이는 빛이 응집된 하나의 사진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응축된 빛을 풀쳐내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 빛이 닿아 따사로운 자리와 그렇지 않은 어둡고 거친 과거까지를 '맨발'로 오간다제일 먼저 '' 찾은 곳은 해바라기밭이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어느 여름날 누나와 여동생과 자신을 한 줄로 세워놓고 사진을 찍은 일이 있다.

 

안 그래도 빛에 그을려 시커먼데다 렌즈에 익숙지 않아 저마다 찡그린 얼굴들을 하고 있어 우리는 마치 유엔식량가구에서 각국에 배포하기 위해 찍은 자료 사진처럼 나왔다(165~166).

 

그런데 이 사진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나나 여동생이 가져갔을 것인데 는 그 사람이 여동생임을 확신한다. “해바라기밭에서 찍은 사진도 네가 가지고 있다는 걸 난 알아.”(194) 동생은 그 사진을 가져가 자신의 사진첩에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 사진을 가져갔던 것일까? 동생은 와 어느 여름날 해바라기 푸른 대궁 사이에 숨어 겁 없이 입을 맞춘 일이 있었다. 그 불가해하며 불가능한 사랑을 여동생은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그 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다. ‘가 인도네시아의 수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끈 달린 하얀 신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얀 신은 자연스럽게 흰 운동화만 세 켤레인 좀처럼 말이 없는 아이였던여동생을 떠올리게 한다. 기실 가 좋아했던 것은 수전이 아니라 여동생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벗은 등 너머로 열대 장미와 야자수를 훔쳐보며 줄곧 동쪽 방의 내 연인을 생각하고 있었다.”와 같은 문장은 근친성애를 노골적으로 가시화한다.

윤대녕의 소설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치명적이다. 윤대녕 소설의 아름다움은 이런 파격적인 충격을 감추기 위한 장치인지도 모른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윤대녕의 소설은 아름답다, 라는 비평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윤대녕 소설이 아름답다 혹은 시와 같다, 라는 찬사는 어쩌면 윤대녕의 소설은 그 아름다움이 전부다, 와 같은 언술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좀처럼 잘못 읽기 어려운 작품(황현경)이란 이를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윤대녕의 소설은 잘못 읽힐필요가 있다. 반달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는 친구와 함께 새우잡이 배에서 며칠을 보내고 한가해진 어느 날 술을 마시게 된다. 열흘 만에 마시는 술도 술이려니와 그날 밤은 무섭도록 고요했다. 하늘에 떠 있는 반달과 바다에 떠 있는 배의 경계가 뒤섞여 마치 배가 아니라 반달에 드러누워 있는 느낌이 들만큼 고요했다.

 

하얀 달 위에 우리 둘만이 외롭게 남아 있군. 달은 원래 이렇게 적막한 세계인가보이. 안 그런가?”(71)

 

그런 친구의 말을 신호로 둘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성교를 하게 된다. 반달역시 불가해한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동성성애가 하나의 현상일 수도 있으니 이를 두고 불가해하다느니 불가능하다느니하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성교의 대상이 동성 친구이긴 하지만, 친구 대신 나의 어머니를 기입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왜냐하면 반달이 있던 밤은 어머니와 가 왕새우 소금구이를 먹기 위해 들렀던 한 마을에서 이미 체험했던 그런 풍경이 아니었던가.마을 사람들도 이 모자의 관계를 연인으로 오해하고 있지 않았던가.

근디 사내 쪽이 행결 젊구먼. 족히 이모뻘은 돼 보이지 않어.”(52)

윤대녕은 동성간의 성교를 넘어 모자간의 성교도 가능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다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윤대녕의 말을 빌리자면 우주의 순수한 허기때문이다이것이 그의 소설이 가진 비밀의 핵심일 것이다. 윤대녕은 아름다움을 밀어붙여 아름다움을 초과하는 지점까지 몰아간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차원에서 이해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다. 친여동생, 동성인 남자, 여기까진 그러려니 해도 친어머니와의 성교는 인간의 상식 수준을 초과한다. 아무리 불가능한 사랑은 없다고 하지만 인간일진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는 않다. 이것이 윤대녕의 전략일 것이다. 아름다움을 '불가해한 지점'까지, 그리하여 아름다움이 아닐 수도 있는 지점, 더 이상 아름다움이 아닌 지점까지 밀고나가 무엇이 아름다움인지를 되묻는 일, 이것이 윤대녕의 지향점일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윤대녕은 이러한 불가해한 신비에 매몰되는 법은 없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러한 비의를 풀려고 나아갔던 많은 예술가들은 다시 인간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채 낯선 곳에 부유하지 않았던가) “두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공허했던 밤에 어쩌면 우리는 거대한 우주의 순수한 허기를 견디지 못했던 게 아니었을까.”라고 적은 후 작가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그런데 그것이 정녕 사랑이었을까?”(72)라고 되묻고 있다. ‘정녕 사랑이라고 적긴 하였지만, 여기에는 인간의라는 말이 빠져 있을 것이다즉 윤대녕은 ‘인간의 사랑의 범주는 어디까지이며인간의 사랑은 어디까지 가능한가에 대해 묻고 있다. 윤대녕 소설은 이러한 물음을 집요하게 던져왔으며 여전히 던지고 있다.

로렌스(L.H. Lawrence)의 후기 소설이 비의적인 아름다움과 신비에 빠져 다시는 인간의 세계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과 달리, 윤대녕은 비인간적 차원의 아름다움으로까지 소설을 끌고 가지만 결코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다시 인간에게로 돌아와 인간을 살아가게 만들고 있다. 아무리 절망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시간의 압력에도 윤대녕이 소설이 여전히 읽힐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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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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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읽는다는 건 설레는 일이다.

잠을 몰아가며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니체의 선언 이후 현대인이 봉착한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니체의 선언 전에 이미 신은 죽었다.

다만 그는 신의 죽음을 최종 통보했을 뿐이다.

신이 죽은 이후 우리에게 모든 일이 허락되었다.

자유롭게 되었고, 뭐든 가능하게 되었다.

심지어 신이 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 좋은 일일까, 해도 되는 일일까, 그런 것들을 물어볼 곳이 사라졌다.

신이 있을 땐 신에게 물어보면 되었는데, 물어보아야 할 곳을 잃어버렸다.

다른 행동이 아닌 바로 이 행동을 선택해야 할근거를 잃어버렸다.

일은 하고 있는데 그 일의 가치나 의미나 목적을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의욕이 나지 않는다.

자꾸만 무기력해지고 허무해진다.

(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허락될 줄 알았더니, 젠장! 오히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도출된 말이긴 하지만 라깡은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금지된다, 라고 말하고 지젝은 심지어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고 말한다. 신이 죽었고 모든 것이 허락되었으나 우리는 허무해졌다.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라깡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신은 죽었고, 우리는 모든 것이 허락되었지만 허무해졌다.

이러한 허무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이 책은 여기에 답하고 있다.

이런 답이 무엇인지는 직접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대신 사소하고 평이한 문장들이 간직한 놀라운 사유를 소개하는 것이 더 낫겠다.

이런 식이다.

SNS에 중독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새로운 포스팅을 보고 댓글을 남기고, 자신의 포스팅을 없데이트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계속 부추기는 욕망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가 없다.

 

 

^^ 이 당연한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고자 했었나보다.

SNS를 떠돌았던 숱한 시간들이여, 숱한 날들이여...

 

 

자기 행동의 원천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힘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것, 그러면서도 그 힘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무엇을 뜻할까? 자기 행동의 원천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힘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것, 그러면서도 그 힘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사실 우리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그렇지 이런 행동의 가벼운 사례는 일상에 흔하다. 아침에 버스로 출근을 하다가 갑자기 어떻게 버스에 탔는지 아무런 기억도 없다는 걸 떠올리는 경우 중략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에 절어 터벅거리며 집에 돌아온 노동자가 갑자기 가장 좋아하는 의자에 자신이 앉아 있는 걸 깨닫고는 거기 앉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없다는 걸 기억해내는 경우(26).

 

 

의식하지 않고도 정확히 어떤 행동을 정확히 완성해내는 일, 이것은 습관이기도 하지만, 영웅적인 행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글을 읽으며 보들레르가 어떻게 공장노동자나 도박꾼에서 영웅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되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중세 전체를 놀라울 정도로 분명하고 명확하게 그러면서도 간단히 요약하고 있다.

 

 

[모든 것이 신의 섭리라는 중세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온전한 삶의 방식이었다. 중략중세 세계에서 이런 문화적 참여는 곧 신의 신성한 계획을 자각한다는 의미였기에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선택하는 근거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선택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35, 35).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에 대한 저자의 시각은 참신하다.

 

 

 

중세 시대였다면 데카르트적 기획은 그 자체로 오만한 행위로 여겨졌을 것이다. 신이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는 점을 우리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은, 신이 우리를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배경 전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전제는 신을 처음부터 신성하고 자비로운 우주의 건축자로 이해하는 세상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44). 

 

 

 

! 그러면 다음 부분은 당신이 직접 찾아보시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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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시간 2008-2013
이명박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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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댓글 다는 것 같애... 노이즈 마케팅으로 대박 나는 거 아닌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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