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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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이야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에세이. 인류애를 우주적 차원에서 풀어내는 작가가 전하는 다정함이 한껏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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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의 미친 여자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박오복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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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부 - 6부 리뷰 



샬럿 브론테는 천국과 지옥, 천사와 괴물이라는 이분법에 대해 에밀리보다 더 모순된 모습을 보인다. <제인 에어>는 <천로역정>에 나오는 도덕적 교훈주의를 패러디하고, <셜리>는 여성의 '굶주림'의 기원에 대해, <빌레트>는 여성의 자아 거부의 비유와 엄격한 도덕적 설교라는 구조 안에 대안적 여성 미학을 담아 내고 있다. 


<제인 에어>는 그녀의 내적 현실과 그녀를 둘러싼 여성의 현실을 확실히 반영하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 평론가들은 <제인 에어>의 여자 주인공이 사회적 운명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데에 혼란스러워했고, 제인의 분노에 경악했다. 작가가 <제인 에어> 에서 짚어낸 내용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버사(로체스터의 아내)가 나타내는 모든 것(감금, 긂주림, 분노, 반항)은 제인이 가진 분노의 경험(억압)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제인과 버사 사이에 놓인 유사성은 여성의 범주를 넘어서고자 애쓰는 여성에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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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테는 <셜리>를 통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계급제도를 역사적으로 다루면서 역사적인 변화와는 아무 관련 없이 보이는 여자 주인공들의 외로운 투쟁과 역사적 변화 사이의 거리를 탐색하는 데 주력한다. 뿐만 아니라 영국 사회에서 성공적인 삶에서 배제되고 착취당한 이들에 대해 역설적인 장면으로 서술한다. 브론테는 노동자 착취를 여성 실업과 연결하면서 여성과 노동자를 소유물로 취급하며 그들을 경시하는 세태를 짚는다.


작가의 지적 중 인상적인 것은 소설 <셜리>에서 셜리, <제인 에어>에서 버사의 출현이 캐럴라인과 제인에게 탈출의 수단이 되어주었다는 점이다. 사실 소설 <셜리>를 읽지 않아 캐럴라인에 대해서 확인하기 어렵지만, 제인의 경우에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사가 아니었으면 제인은 영락없이 중혼의 피해자가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지점이, 억압이 아니라 자유롭게 제약받지 않은 자아 출현의 신호탄이라고 얘기한다. 


<빌레트>는 가부장적 문화의 미학적 관습이 왜, 어떻게 성차별적인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제도처럼 여자들을 감금시키는지 탐색한다. 이 소설 역시 브론테의 여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여자 주인공이 겪는 감금, 탈출, 배제 과정을 그린다. 브론테는 이 소설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을 희생시킨 독재적인 허구를 피하고, 여성에게 있어서 사랑의 끝은 삶의 끝이 아니며 동시에 남성의 낭만주의(모험하는 남성을 기다리는 순종적인 여성)의 기를 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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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의 여성 작가들은 순종(천사)과 자기주장(괴물)이라는 양가적 상황 가운데 남성 지배 문화에서 문제적인 여성 역할을 강조하면서 여성의 하위문화에 의식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조지 엘리엣,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에밀리 디킨스 등 이들 사이에 감지되는 유대를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여성의 하위문화다.  


조지 엘리엇은 습관적으로 자신을 불신했다고 한다. 이는 그녀가 부모로부터 경제적 유산과 부모 사랑의 주요 상속자가 아닌 차선이라는 느낌 때문에 괴로워했다는데, 이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언뜻 들었다. 작가는 <벗겨진 베일>에서 엘리엇이 비상과 추락에 대한 성적으로 젠더화된 두려움, 치명적인 것으로 묘사한 문학적 소외 때문에 사탄의 실패한 열망을 동일시한다고 얘기하는데, 엘리엇 이전부터 가졌던 자기비하와 전혀 무관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에 따르면 엘리엇이 자신을 여성으로서의 여성과 여성 혐오자 등 양가적 반응을 보임과 동시에 이러한 자기 분열을 <벗겨진 베일>에 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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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은 <성직 생활의 장면들>과 <벗겨진 베일>을 통해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초월적 남성과 내재적 여성 사이의 투쟁이고, 여성의 유일한 힘은 물리석 세계와 맺고 있는 계약에서 나오는 악마적 힘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에게 분노하지 않고, 증오를 자신에게 되돌려 스스로를 벌하는 체념적인 모습은 자기혐오를 보여주는 동시에 남성적 서계에서 여자가 처한 조건에 대한 엘리엇의 태도를 보여준다. 


브론테는 여자가 지적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저주하고, 자기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보여주며, 여성의 감금과 구속을 그려내면서 남자들이 소유한 권위 있는 자유를 부러워했다. 그에 반해 엘리엇은 지적인 결핍이 초래할 암울한 결과는 인정하지만 이 결핍 덕분에 여자에게는 감정적인 삶이 더 풍부해진다고 암시했고, 남성적 경쟁이 아닌 서로 돕는 동지애에 기초한 고유한 여성 문화의 미덕과 여성의 창의성을 칭송했으며, 남성들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권위 때문에 사실상 남자들이 육체적 심리적 진정성을 경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엘리엇은 여성의 특징을 타인에 대한 헌신, 공동체 의식, 자연에 대한 감사, 돌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꼽는다. (중략) 엘리엇은 일이 주는 명확함이 없는 여자들에게는 안정된 자아나 단일한 중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연극적 은유를 사용한다. 엘리엇의 여성 인물 중 분장을 두려워하는 인물들이 위험한 속박의 유혹에 치명적으로 이끌리는 이유는 공허에서 생겨난 존재론적인 불안 때문이다. 엘리엇의 여자 주인공들의 삶을 구조짓는 것은 타자성과 부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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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여성의 불안이나 적대감을 피하거나 쫓아낸다면, 시는 직접적인 화자로 등장하는 여성으로 하여금 실제 삶의 불안이나 적대감을 재연하게 만듦으로써 여성 작가들이 시보다는 소설에 더 가까워지게끔 한다. (중략) 자기희생과 순종이 미덕인 19세기 여성은 '체념'이라는 관에 스스로 들어가 못질을 했다. 


16장에서 문학의 고딕 장르가 여성에게 중요했다는 논평이 눈에 띈다. 19세기의 분열된 자아들이 빈번하게 빠질 수 밖에 없었던 혼란스러운 심리적 상태에 대한 은유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이다. 디킨슨은 참된 시적 강렬함을 지닌 삶은 소설적 허구보다 훨씬 더 극적이라고 확신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당시 여성들의 고뇌가 고딕적 공포보다 훨씬 더 심각했음을, 그리고 그에 대한 정도도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컸음을 알 수 있었다. 잠깐 벗어나 엘리자베스 개스켈과 더불어 우리나라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주인공이 다른 여성들의 자아에 빙의 되는 장면은 이 책에서 언급한 자아분열과 같은 맥락으로써 이에 대해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인 듯 하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여성의 전유물로 취급하는 바느질에 대해 얘기한다.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아리아드네, 페넬로페, 램지 부인(등대로), 댈레웨이 부인, 디킨슨 등 모든 여자들에게 바느질(뜨개질)은 그들 삶의 고통을 숨기기 위해, 그리고 방어적인 바느질이 필요하지 않을 세계에 대한 전망을 감추는 동시에 드러낸다. 



이 책에서 언급한 문학 작품들을 접하지 않았어도 읽는 데에 큰 무리는 없지만, 당연히 읽은 경험이 있다면 더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 샬럿 브론테의 <셜리>,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를 읽지 않아서 이 작품들에 대해 세부적인 얘기를 서술하는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았었다. 세 작품을 읽은 후 해당 부분만 다시 발췌독을 해볼 요량이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19세기 작품에는 감금, 스토커, 가스라이팅 등 현재 여성 범죄에서 보여지는 양상들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성은 여전히 현실적으로, 상징적으로 '자기만의 방'을 구현하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원에서 보이지 않는 순종을 강요 당하고 있다. 순종과 복종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이 자아를 각성하고 반기를 드는 순간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된다.


벽돌책임에도 읽는 동안 지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두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19세기 여성들의 작품을 얼마나 읽고 또 읽었을까. 분량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도대체 이 책을 어떻게 쓸 수 있었는지 존경어린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완독 후 만세를 외칠만큼 흠없이 완벽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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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철학자 - 키르케고르 평전
클레어 칼라일 지음, 임규정 옮김 / 사월의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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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단독자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인간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키르케고르의 문제에서 발단한 이 책은 1843년 그의 귀향 여행으로 시작한다. 총 세 부로 나뉘어진 이 책은, 1부에서는 인간이 존재해야 하는 방식, 2부에서는 실존 문제에 대해 기존과는 다른 시각을 보여주면서 저작에 열정을 쏟는 그의 모습을, 3부에서는 죽음과 더불어 종결되는 세상과의 투쟁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키르케고르의 뒤를 따라간다. 이 평전의 특이점이라면 서른 살에서 처음 시작해 그의 중년과 유년 및 청년 시절을 거꾸로 되짚어간 후 마지막에 그의 말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마치 키르케고르를 마치 옆에서 지켜보듯 현재 시점으로 썼다는 점에서 더 현장감있는 글읽기였다.  


마지막 40여쪽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키르케고르의 사상과 저서(유고집을 포함한 원고)들이 어떻게 보존.기념되고 있는지 다루고 있는데, 분량은 적지만 이렇게 정리하는 것도 꽤 괜찮더라는.








절망에 빠진다는 것은 최악의 불행이자 고통이고, 자신의 참 자기를 상실한다는 차원에서 파멸이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에 빠지는 것을 정신적인 질병이라 칭하면서 보편적이라고 말한다. 이 복잡하고 혼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정신으로서 영원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키르케고르는 오로지 '자기에게 투명하게' 됨으로써, 절망을 감지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인간이 겪는 여러 종류의 절망을 진단했다면, <나에게로 오라>는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치유책을 제시한다. 어떻게 인간으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관한 키르케고르의 물음은 종교적 과제로 수렴되고 있다. 기독교인이 되는 키르케고르의 방식은 관습과 의무라는 전통적인 명령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내적 필요성'을 유지하기 위한 고군분투이며, 종교적 구조 안에서 '단독자'로 남아 균형을 잡는 행위이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이 행해야 하는 바와 행하기를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살고 죽을 수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심오한 이념과 진리를 찾고자 했다. 인간은 대개의 경우 존재자들 간의 차이를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고 질서를 부여한다. 그런 특징들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이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암묵적 논리다. 키르케고르의 논지는 그 누구든 자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철학을 추구하는 사람은 실존의 극도로 절박한 문제들을 외면하고 있다고 봤다. 즉 철학적 논리를 윤리적 삶에 적용하지 않는 학자(헤겔 등)들을 비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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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에게 있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해결하는 일은 그의 철학과 삶의 핵심에 놓여 있는 문제임과 동시에 영적인 과제로서, 어떻게 신과의 관계 안에서 살 것인가라는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는 플라톤의 철학에서는 '세상에 반대하는 논쟁'을, 기독교의 성서에서는 신성한 진리가 세상 안, 즉 인간의 육신 안에 구현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얻었다. 그는 학문적 기획 전체가 현실적 실존으로부터의 도피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지적 이탈을 지식의 상업화와 연결시켰다. 근대 대학들의 교수들은 상인들이 상품을 사고 파는 것처럼 사상을 사고 팔았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포장되어 매매되는 그 학문에는 참된 지혜를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을 저작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통해 지적한다. 


수년간의 연구를 통해 키르케고르는 어떻게 전통철학의 방법이 현상과 실재, 믿음과 앎, 필연과 자유 등의 개념들을 구별함으로써 진행되는가를 비틀어 삶 자체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종류의 사유를 전개하여 '어떻게 인간으로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를 끌어냈다. 그의 방법은 개념들을 구별하는 게 아니라, 실존의 영역들과 인간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구별하는 것이다. 물론 그에게 있어 그중 최고의 것은 종교적 영역으로서 신과의 관계라는 축을 중심으로 선회하며 그 지평과 깊이는 무한하다. 


키르케고르는 저작 <반복>에서 지식의 차원이 아닌 사랑에 의한, 마음에 관한 진리를 탐구했다. 산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타인과 만나는 것이며, 변화하는 세상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존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하고 깨닫기를 반복한다. 키르케고르는 성경을 통해 이 세상 안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님과 그 자신의 마음에 충실할 수 있을까하는 실존의 딜레마를 탐구한다. 


키르케고르는 열린 마음을 '겸손한 용기'라고 부른다. 그는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얘기하는데,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게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인간 실존은 어쩔 수 없이 공적인 동시에 지극히 사적인 것이다. 우리 내면의 삶이 심오해질수록 이 모순 역시 더욱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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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는  당시 교회가 기독교적 이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세속적인 것에 기울어져 있다고 여겼고, 기독교가 유럽 그 어느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역설한다. 즉 더 이상 진정한 기독교는 없다면서 19세기 기독교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투쟁은 그의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피폐하게 했으며, 결국 병까지 얻게 만들었


키르케고르는 전 생애에 걸처 세상에서 어떻게 인간으로 존재할 것인가 하는 실존의 문제에 매달렸다. 그는 누구도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타인의 종말론적 전망에 관한 성찰을 시작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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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키르케고르의 철학 사상에 영향을 미친 인물과 사조 및 시대적 배경까지 서술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독선적인 아버지의 영향과 타고난 성정(외골수이고 호전적이고 논쟁적이고, 예민한)으로 인해 대중들에게 적지 않은 비난을 감수하면서 한편으로는 반항적인 성격이 갈수록 굳어져갔던 키르케고르가 불안감이 컸던 이유를 내 나름으로 납득할 수 있었다.


소설같은 구도와 매끄러운 문체가 평전임에도 읽기에 상당히 부드러웠다. 인간의 고유한 본성, 부재와 현존 등 실존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 끊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열정적으로 파고들며 노력한 키르케고르의 순수한 앎을 향한 철학적 열망과 동시에 저작자로서의 야망, 그리고 학자이기 이전에 인간 키르케고르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미래는 미지의 심연이다. 인간은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며 불안에 싸여 눈에 보이는 유한한 것들을 아무것이나 붙들고 늘어진다. 그것이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 혹은 우리 자신들에게 좋은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제쳐 놓은 채로. 키르케고르는 인간은 타고나기를 불안한 존재이고, 이 세상에서는 온전히 편하지 못하며,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안식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마지막에서 저자는 키르케고르의 생애를 통해 삶의 신비한 의미와 놀라움을 느꼈다고 썼다. 나는 삶의 신비함보다 키르케고르의 다양한 모습에 놀라움을 느꼈다고 해야할 것 같다. 레기네에 대한 감정과 태도, 윤리적 철학에 대한 강박, 신앙과 종교를 분리하면서 추적하는 과정, 끊임없는 글쓰기에 대한 순수한 욕망과 저술가로서 갖는 명예에 대한 집착 등 하나의 명제로만 단정하기 어려운 그의 삶을 보면서 스스로를 이토록 닥달했으니 정신적으로 어지간히 고단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 인간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사랑했다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의 말을 통해 삶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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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의 미친 여자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박오복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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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 3부 리뷰 


메리 셜리, 에밀리 디킨스, 조지 엘리엣, 샬럿 퍼킨스 길먼, 실비아 플라스, 제인 오스틴 등 19세기 여성 작가와 작품을 통해 여성이 왜 가부장적이며 폐쇄적인 동굴 안에 갇혀 있어야만 했는지, 세부적으로 분석해 설명한다. 








'펜을 드는 여자'는 건방지고 '주제넘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구제 불능인 존재다. 이 문장에서 읽히듯 문학에서의 부권 은유는 여성이 문학에 관여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여성은 문학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관능의 대상으로 남성의 행위를 받아들이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가부장제가 딛고 서 있는 여성 혐오를 반영한다. 


여성은 자기를 '살해해' 예술에 가두어놓았던 미학적 이상인 천사 뿐만 아니라 대립적인 괴물도 죽여야 한다. 울프가 행한 이러한 방식의 시작은 기존에 뿌리내려진 여성의 이미지의 기원과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시학을 수립하고자 한다면 우선 분석부터 해야하는데, 천사와 괴물 이미지는 남성이 쓴 문학 전반에 퍼져 있을 뿐 아니라 여성문학에도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남자를 즐겁게 해주는 기술은 천사의 특징, 즉 숙녀에게 가장 적절한 행위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최고의 교사인 세라 엘리스 부인은, '숙녀는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또는 존경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같은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올바른 여성이라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품이 되든 성녀가 되든 아름다운 천사-여자의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 즉 자아를 포기함으로써 고귀해지는 것이다. 여성은 부여된 위치에서 벗어나고자하면(그래봐야 고작 도망가는 수준에 불과한) 저주나 복수의 대상이 된다. 문학 작품에서, 가부장제 내에서 갈등의 원인 제공은 남성이 하고 있으나 선악의 대립 구조를 두 여성에게 부여함으로써 서로를 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앤 피치, 에밀리 브론테, 에밀리 디킨스 등 여성들이 남성 작가의 텍스트에서 벗어났을 때 오랜 침묵은 깨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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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작가도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대다수 여성들처럼 가부장제 여성들을 열등하게 취급하는 대체 심리학의 희생자다. 따라서 여성 예술가의 고독, 여성 작가 간의 갈등, 남성 작가들로부터의 소외감과 반감에 대한 두려움, 예술의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두려움, 여성 창조의 부적절함에 대한 불안 등 이 모든 '열등화' 현상은 여성 작가가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정립하려는 분투의 표식이다.  


18세기~19세기, 자신의 문학적인 노력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여자들은 미친 사람 내지 괴물 취급을 받았다. '성을 벗어났기' 때문에 타락했다는, 즉 여성의 지적 야망은 탈선과 동의어였던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말에 따르면, 당시의 여성 문인은 '단지 여자'일 뿐임을 인정하거나 '남자만큼 훌륭하다'고 저항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중의 속박에 갇혀 있었다.  


제인 오스틴 뿐만 아니라 샬럿 퍼킨스 길먼, 실비아 플라스 같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묘사하는 악은 각각의 결이 다른 공포다. 여성이 위험에 대한 감각을 무시해야 하고,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인식과 모순되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았을 때 생기는 공포와 자기혐오다.  


제인 오스틴의 경우 초기작은 남성 작가의 문학적 인습을 노골적으로 패러디함으로써 여성을 지속적으로 세뇌하는 문화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 것 말고는 타당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전통적인 생각에 대중적인 로맨스 소설이 어떻게 기여했으며, 여성에 대한 이런 억측이 '여성성'에 어떤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는가이다. 오스틴은 모든 여성이 세상을 향해 자기주장을 하고 싶은 욕망과 가정이라는 안전한 곳으로 숨고 싶은 대립되는 욕망으로 분열해 있을지라도 이런 심리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작품마다 암시한다. 여성에게는 개인적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의 관계가 매우 문제적이지만, 새로운 자아는 이중의 비전을 견지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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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의 시에는 남성 우월주의와 가부장적 사상, 여성 혐오가 깊게 뿌리내려 있다. 천사=남성, 사탄(괴물)=여성이라는 공식을 기본적 토대로 삼는다. 작가는 <프랑켄슈타인>을 성과 독서에 대한 여성의 환상소설로, 이른바 성서 발생론에 대한 메리 셸리의 인식을 반영한 고딕적인 심리 드라마로서 <실락원>이 내포한 여성 혐오 이야기의 또 다른 판본이라는 작가의 정의가 눈에 띤다.  


<프랑켄슈타인>과 <폭풍의 언덕>의 유사성을 보자면 둘 다 수수께끼 같고 당혹스러우며, 어떤 의미에서 총체적으로 문제적이라는 점이다. 두 대중소설은 많은 독자들에게 표면적 이야기가 복잡한 존재론적인 심오함, 정교한 비유의 구조, 모호하지만 강렬한 도덕적 야망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한다. <프랑켄슈타인>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호성이나 유동성처럼 <폭풍의 언덕>의 핵심 요소 중 하나가 존재론적 불안정성이다.  


<폭풍의 언덕>에서는 '밀턴'이나 '실락원'이 전혀 언급되지 않지만 종교적(천국과 지옥)이고 악마적인 요소가 드러나 있다. 작가는 <폭풍의 언덕>이 밀턴이 묘사한 지옥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반항적이고, 착한 딸이지 못했던 캐서린은 아버지의 죽음이 가부장적 규제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아닌 또다른 남성의 권력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그나마 부분적으로 독자적이었던 캐서린(여성)의 세계가 분열된다. 이처럼 여성의 자주권 박탈과 억압은 가해 당사자를 바꾸어 가면서 더 교묘한 형태로 강화 지속된다.  


작가는 캐서린이 숙녀가 되는 것을 추락이라고 표현하면서 동시에 캐서린 본인도 여자처럼 되기가 타락임을 알고 있었다고 썼다. 이는 밀턴의 이브가 타락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 있는 선택도 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 있음을 얘기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히스클리프가 외형적으로 남성성이지만 그의 괴물적 속성, 사탄적인 추방자의 방식으로 여성적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메리 셸리의 뒤를 이어 브론테처럼 19세기 여성 작가들은 밀턴의 여성 혐오를 전복시키기 위해 분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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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흥미로운 독서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읽으면서 도대체 무릎을 몇 번이나 내려쳤는지. 인상적인 부분들이 상당히 많고 재미지게 읽고 있으나 광범위한 내용을 정리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딱 절반을 읽었는데, 5부에 기대하고 있는 조지 엘리엇 편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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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의 나라 - 문화의 경계에 놓인 한 아이에 관한 기록
앤 패디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반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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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부부는 1975년 라오스가 공산 세력에 완전히 장악되면서 살던 땅을 떠나게 된 15만 몽족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태국의 난민 캠프를 시작으로 하와이, 미국 포틀랜드를 거쳐 캘리포니아 머세드에 정착했다. 이들의 열네 번째 아이 리아는 1982년 7월 19일에 머세드에서 태어났다.  








 
이 책은 생후 3개월에 뇌전증이 발병해 문화의 경계에서 치료의 방향을 잃고 고통받았던 리아 리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 난민, 의료, 복지 등 사회 시스템 전반과 강대국이 관여한 전쟁의 폐해를 다루고 있다.  


일단 작가가 몽족에 대한 생활방식, 문화와 관습, 무속신앙, 역사, 그리고 미국 정착기 등을 설명해 낯설은 몽족에 대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사실 난민 문제 해결에 있어서 그들의 전통과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를 간과하지 않은 저자의 배려가 좋았다(책을 끝까지 읽으면 배려 이상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몽족이 난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국제 정세의 배경 설명까지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넓은 시야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책의 전반부에서 몽족을 표현하는 문장 중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조국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노예가 되어 본 적도 없다', '몽족은 문자와 종교라는 구심력도 없고 생김새도 상당히 다양하다는 점에서 더욱 대단하다'. 뒤의 문장은 호주의 인류학자 게디스가 자신의 저작에서 쓴 내용인데, 몽족이 이민족들에게 둘러싸야 방대한 지역으로 흩어졌음에도 오랫동안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쓴 글이다. 


참고로, 1980년대 당시 미국 군립병원은 20년 내내 고질적인 재정적인 문제에 시달렸다. 환자 중에 민간보험을 든 사람은 20퍼센트에 불과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연방정부의 공공 의료보험 보조를 받았으며 일부는 그조차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1970년대 말부터 동남아 난민들이 머세드로 대거 이주해오기 시작하면서 전체 인구 6만여 명 중 몽족 인구가 1만 2천 명이 넘는다. 머세드 시민 다섯 중 하나가 몽족이란 뜻이다. 몽족 환자들은 다른 극빈층 환자들보다 훨씬 비용이 많이 든다. 워낙 수가 많으며 대체로 많은 관심과 시간을 요하고, 병원에서 환자아 의사소통을 위해 양쪽 언어를 다 구사하는 직원을 채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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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3개월에 첫 발작을 일으켜 머세드 군립병원  MCMC 응급실에 간 것을 시작으로 리아는 지속적으로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 열일곱 번을 입원하고, 백 번도 넘게 이 병원의 응급실 문턱을 드나들었지만 매번 의료진과 리 부부는 서로 다른 의견과 언어 장벽으로 인해 충돌한다. 리아가 병원을 드나들었던 상황들을 살펴보면 뇌전증 발작 뿐만 아니라 호흡 정지, 폐렴 등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를 벌이는 과정이 잦은데, 이때마다 병원을 불신하면서도 딸을 그들의 손에 맡겨야하는 리 부부의 불안과 두려움이 어땠을지 짐작이 된다(거기다 딸의 몸에 주렁주렁 달린 기구들은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그러나 의료진 입장에서는 응급실로 달려온 리아를 안정시켜 놓으면 고맙다는 말은 커녕 원망 섞인 눈초리와 비협조적인 태도에 낙담하게 된다. 더구나 수 백 시간 치료를 지속하면서도 리 부부는 단 한 번도 치료비를 지불한 적이 없으면서 이에 대한 고마움도 표시한 적이 없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상태에서 불신과 부정적인 감정이 쌓여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닫고 만다. 그런데 언어장벽과 몽족의 전통적인 관습이 맞물려 치료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사례는 리아의 경우 뿐만이 아니다. 



작가는 몽족의 사례처럼 단순히 언어장벽으로 인한 소통의 부재에서만 문제점을 찾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의료관, 그리고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시각의 차이를 언급한다. 과학적인 의료 체계 하에서 효율성과 편리함, 신속함을 우선으로 두는 시스템은 그들만의 신앙과 관습을 기다려줄 여력이 없다. 여기에서 오는 사소한 오해와 충돌은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리아의 주치의 닐이 리 부부를 신고한 이유는 어떤 나쁜 의도와 오해 없이 오로지 자신이 처방한 약이 리아에게 제대로 복용되기를 바랐을 뿐이다. 다만 리아가 부모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리아가 낫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이 그들이라는 사실을 염두하지 않았을 뿐이다. 


닐이 리 부부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 계기는 그의 아들이 백혈병에 걸렸을 때다. 리 부부가 리아를 방치한 게 아닌 그들의 방식대로 아이를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긴 시간 동안 리아를 지켜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이는 리 부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닐 역시 의사로서 그가 리아에게 최선의 방법을 찾고자 했음을 비로소 늦게나마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정서적 소통이 진즉에 이루어졌다면 리아의 치료 방향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지. 


그렇다면 의료진이 몽족의 관습을 고려해 리아에게 다른 아이가 받을 수 있는 최선의 처치를 받지 못하게 되더라도 리아의 가족이 따르기 좋은 방식으로 치료를 단순화해야 했을까? 리아 문제는 리 부부의 말처럼 과도한 투약이었다. 물론 선천적 뇌전증을 앓는 리아가 리오스에서 계속 살았다면 리 부부의 예상과는 다르게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작가의 말처럼 미국 의학은 리아를 살렸지만 한편으로 위태롭게 만들었다. 어떤 선택을 해도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고, 관점에 따라 차별적인 행동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선택에 있어서 우선해야할 전제는 무엇일까? 



작가는 리아의 삶이 망가진 건 패혈성 쇼크나 부모의 불이행 때문이 아니라 타문화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이는 비단 의료 현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언어 장벽, 의사소통 부재, 그로인한 보이지 않는 박탈된 자유, 경제적 의존, 종교와 인종주의에 의한 차별과 편견 등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난민 문제들이다. 그런데 난민 안에서도 몽족처럼 소수자에 해당하는 민족들은 그 안에서조차 더욱 외면당한다.  

전쟁, 기후 변화 등 굳이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민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난민 수용의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대안을 찾는 게 훨씬 현실적인 해결 방법이 아닐까. '동화'가 아닌 '조화'를 바탕으로 말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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