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귀환 - 누구나 아는,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제이슨 바커 지음, 이지원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뮌은 그대들을 의지하니, 그대들은 코뮌을 의지하라.
(파리 민중과 국민방위대에 고함) 



카를 마르크스의 생애와 자본론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이 소설에는 우리가 읽은 그 자본론의 어려움이 1도 없음과 마르크스의 허당기 충만한 코미디 요소가 가득한 소설임을 밝혀둔다.


소설에 나오는 마르크스는 우리가 아는 위대한 사상가의 모습이 아니다. 한 가지 생각에 빠지면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깜박하기 일쑤고, 가족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책을 쓰면서 주변에 사회주의 운동을 함께 하는 동지들에게도 몽상가라는 독설을 들으며 외면 받는다. 어디 그뿐인가. 돈 한 푼 벌어오지 못하는 쓸데없는 지식만 머리 속에 가득하다는 가정부의 구박까지 고스란히 들으며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가장이기에 제대로 화도 내지 못한다.


소설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혁명이 모두 좌절된 마르크스가 영국 런던으로 이주해 살게 된 1849년 11월부터 시작한다. 집세도 내지 못하는 형편에 귀족 집안 출신인 아내는 한가롭게 체스를 두고 아이들 음악 교육에 열을 올리며 젊고 부유한 장교와 일탈을 즐긴다. 얼마 안되는 가진 것들을 저당 잡히고, 두 아들은 병들어 죽어가지만 마르크스는 절친 엥겔스에게 손을 벌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영국에서 무국적자로 죽는 순간까지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었던 마르크스의 하루하루는 비루함을 견디며 생존을 위한 투쟁과 절대 놓칠 수 없었던 <자본>의 집필과 사상이 전부였다.


이 소설의 반전은 위와 같은 내용을 전혀 우울하거나 무겁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해학과 유머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엉뚱하고 어디 한 군데 나사가 살짝 헐거워진 듯 보이는 마르크스와 그러한 마르크스를 향해 팩폭을 날리며 쥐잡듯 잡는 가정부, 세상 걱정 없어 보이는 해맑은 그의 아내 예나 등 한 편의 사회파 코미디 영화를 보는 듯 하다.


그러면서도 노동의 분업, 소외된 노동의 민주적인 요구, 자본주의의 헛점, 자기주도적 노동 등 자본주의 안에서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 및 악순환에 대해서 무겁지 않게 짚고 있다. 도망가이자 혁명가이고 사상가였던  마르크스는 스스로를 정치적 난민라고 칭했다. 사회주의를 지향했고 <자본>을 집필한 그가 산업혁명의 중심이었던 영국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하다.


자본주의가 종말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견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때문에 다른 객체가 종말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철학자 필리프 판 파레이스는 저서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에서 기본소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두 체제가 모두 필요하다고 썼다. 우리는 돈이 그저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 세태는 과연 그럴까?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차별 살인법
저우둥 지음, 이연희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8월
평점 :
절판


대낮 피시방 화장실에서 어린아이가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손쉽게 검거한 범인 천원칭의 입에서 나온 범행동기는 평생 편하게 콩밥을 먹고 싶기 때문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대답을 한다. 심지어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한두명 더 죽였어야하는데, 그전에 붙잡힌 것을 아쉬워하기까지 한다.


심리연구가 중완칭은 변호사 윈즈에게 피시방 묻지마 살해범 천원칭의 변호를 의뢰한다. 윈즈는 무차별 살인으로 약혼녀를 잃은 피해자 가족으로서 중완칭의 의뢰를 거절하지만 그녀는 집요하게 그를 설득한다. 


97.
그 사람들의 진짜 범죄 동기가 뭔지 정확히 알고 싶지 않으세요? 


윈즈는 천원칭의 살인 동기 분석과 묻지 마 살인의 발생 원인 및 재발 방지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중완칭의 가해자 변호 의뢰를 수락하고 본격적으로 가해자 이력과 사건의 전반적인 사항을 조사하면서 천원칭이 어린시절 부모의 방치와 학대, 아버지의 폭력 및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교육을 받지 못하고 아동 노동에 시달려왔으며 살인을 저지른 그 즈음 연인과 헤어져 자살 충동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그와의 면담에서 정신 이상 및 대인 관계 미숙을 느끼던 차에 이와 관련한 전문 변호사 루이양의 조언을 받아들여 정신감정을 의뢰한 결과 그에게는 공감 능력 부재를 비롯한 정신 이상 소견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결과를 받아든다.


한편 청원칭의 사건을 묻지 마 살인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인 변호사가 맡았다는 사실을 이슈화하려는 기자 스융다가 윈즈를 집요하게 따라붙고, 윈즈는 그를 통해 비서 야란이 자신의 약혼녀를 지하철 승강장에서 떠밀은 가해자 주젠쭝의 이복동생임을 듣게 되지만, 그는 청원칭의 사건을 조사하면서 가해자 유가족이 감수해야 하는 심리적 피해를 이해하였기에 도리어 그녀를 위로한다.


청원칭 아동 살해 사건 2심, 윈즈는 가해자의 정신 감정서의 결과를 통해 1심의 분위기를 뒤집는다. 



■ ■ ■ ■ 



주택가 좁은 골목에서 총기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는 가족이 없고 소형 고물상을 생계로 하는 60대 노인 남성이다. 특별한 원한 관계도, 재력도 없는 듯 보이는 노인을 왜 죽였으며 무엇보다 총기 소지가 불법인 나라에서 범인은 도대체 총은 어떻게 구했을까? 놀라운 점은 탄환 감식 결과 작년에 발생한 총기 사건의 총기로 밝혀졌다는 사실과 그 사건은 30대 남성 뤄핀훙이 노숙자 여성을 살해한 후 바로 자살했고 총은 의문의 남성이 가져갔으며 같은 총으로 수 개월이 지난 지금 또 다른 범인이 독거 노인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사건은 오리무중이고, 6개월여가 지나 공원 화장실에서 노숙자를 대상으로 한 총기 사건이 다시 발생했다. CCTV를 확인한 결과 범인이 20대 청년 뤼야난임을 확인하고 주변을 수소문하면서 수사 범위를 좁혀가던 중 다시 총기 살해 범행을  하는 야난을 현장에서 추격하고 이 과정에서 윈즈의 비서 야린이 심각한 부상을 당하며 야난은 백화점 옥상에서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자살한다.


직접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가해자는 자살로써 죽음을 맞이했고, 아무런 잘못도 없는 피해자만 속출한 상황. 그런데 핀훙과 야난에게 총을 제공한 사람은 누구이며, 원칭과 피씨방에서 사형제도에 대해 토론을 했다는 의문의 남자는 누구일까? 


윈즈는 원칭으로부터 제대로 된 진술, 그에게 사형제도에 대해 말한 사람과 관련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처음 사건을 의뢰했던 심리연구가 중완칭에게 원칭을 함께 면회해 주기를 부탁한다. 그녀는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고 윈즈와 함께 면회를 하는데, 원칭은 자리를 뜨려는 중완칭을 향해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이에 윈즈는 그가 한번도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이상하게 여기며 중완칭에 대해서 면밀하게 짚어본다. 그러다가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한 헛점들. 윈즈는 목숨을 담보로 한 추적을 시작한다. 


누가 배후에서 무차별 살해의 살인자들을 조정하는 것일까? 



□ □ □ 



처음 만나는 대만 작가이다. 제목만으로 충분히 유추가 되는 소설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인 묻지마 살인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그러나 소설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의 범인을 수사하는 과정이 아닌 그들이 왜 가해자가 되었으며 현재 사회 안전망에 대한 부재와 모호한 기준들, 그로인한 피해자 속출과 재발 방지 대책 등에 더 무게를 싣고 있다.


소설에서는 세 명의 가해자가 등장하는데,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핀훙의 유년 시절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재봉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넉너가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평범했으나 대학 진학 이후 어머니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면서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공사 현장에서 추락해 한쪽 팔을 못쓰게 됐으나 파견 계약직이었던 핀훙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노숙자로 전락한다.
야난은 조직폭력배 아버지와 우울증으로 자살한 어머니로 인해 일찍부터 제대로 된 보호를 받으며 자라지 못했다. 친척집을 전전했고 공갈과 절도 및 약물까지 손을 댔다. 세 사람은 유년시절부터 불우한 환경에 노출되었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다. 그러나 불우한 환경에서 성자한 모든 사람이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고, 모든 범죄자들의 범죄 원인이 성장 배경에 기인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아니 묻고자 하는 것일까?



치료가 우선인가? 처벌이 우선인가? 


피시방 살인 사건 가해자 원칭은 심리 검사의 결과에서 공감 능력 부재와 정신 이상 소견이 나온다. 실제로도 가해자의 변호인들이 가장 많이 주장해 구형을 줄이는 수법이 심신 미약이다. 그만큼 형량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기 떄문에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만일 진단이 핑계나 거짓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회복적 사법을 지지하는 변호사 루이양은 범죄자들에게 치료를 받게 해 회복한 후 자신의 범행을 깨닫고 피해자 혹은 유가족에게 진심어린 사죄와 보상을 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변호사 윈즈가 말도 안되는 범죄자의 변호를 결심하게 된 동기도 무차별 살해의 근본적인 원인과 재발 방지 연구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범죄자를 무조건 사형시킨다면 우후죽순으로 일어나는 직접적 동기불명 살인 사건의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빠른 판단과 빠르고 극단적인 처벌이 모방 범죄를 막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뚫린 댐을 주먹으로 막고 있는 꼴이다. 또한 과거 살인자였던 사람이 이웃으로 온다고 상상해 보라. 지역 주민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며, 그 공포는 또 다른 범죄를 불러올 소지가 충분하다. 사회 안전과 정신 의료, 함께 이뤄내야할 부분이다. 그런데 이쯤되면 또 다른 의문점이 튀어 나온다. 



정신감정에서 나온 정신질환 결과를 믿으십니까? 


소설에서 원칭은 심리 검사를 두 번 받는데, 결과가 상이하다. 실제로도 이러한 사례가 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발생할까? 환자의 심리 상태, 검사 시간(기간) 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겠지만 주이양이 짚어낸 바로는 원칙과 기준의 부재다.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고 정신질환을 초래하는 원인은 다앙하고 복합적이며 여러 검사를 한다고 해도 실재하는 원인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정신의학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상담.검사하는 의사의 주관적 판단이 결과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므로 이에 대한 규정된 기준을 명확하게 할 필요성이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거짓으로 정신 검사를 빠져나가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사회 구성원의 안전과 인권 및 사생활 침해,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할까? 


정신연구가 텐 교수는 빅데이터를 토대로 일부 위험 요소를 찾아내고 선별 기준을 만들어 각 지역 의료기관에 보급해 고위험 사례가 있으면 경찰 및 정부와 함께 대상을 추적 조사하는 방법을 제시하며 현재 무차별 살인범은 인격장애들이기 때문에 사법기관에서 개입해 강제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중완칭은 정신질환의 심각성과 범죄 가능성이 정비례하지 않으며 인권 문제와 사생활 침해 문제를 든다. 그리고 고위험 정신질환자는 매우 많지만 그중 범죄자가 되는 확률은 극미하므로 텐 교수가 본말을 전도한다고 말한다. 또한 범죄 예방을 논할 때 정신질환은 범죄 요소로 단정해도 되는 것이냐는 것과 정신질환과 범죄 사이에 인과 관계가 없음을 피력한다.


텐 교수, 중완칭 두 사람의 의견에 모두 일리가 있다. 우리는 '안전'과 '인권(사생활)' 사이에서 늘 딜레마에 빠진다. 우리가 어떠한 결정을 내릴 때 주로 사용하는 방식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언제라도 '소수'의 입장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한다면 이 딜레마에서 덜 헤매려나?



무차별 살인을 막는 뚜렷한 대안은 현재로써는 없는 상황에서 분명한 것은 불우한 환경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다만 소설 속 윈즈의 말처럼 개인과 가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지만, 개인이 사회에 나와 구성원으로서 공동체 일원이 되었을 때, 사회와 행정기관은 개인의 존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사회가 진정한 발전으로 가는 길이다.


아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선생님과 복지사들은 그 이유를 알아야 하고, 아동 노동 혹은 불법 미성년 갈취 현장을 알게 되면 조치를 취해야 하며, 일자리를 잃어 굶주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가장 기본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사회 안전망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회가, 정부가 존재하는 것이다. 남들보다 더 잘 살아야한다는 초경쟁 시대에서 뒤쳐질 수 있다는, 실패한다는, 실패가 패배라는 공포가 언제든 무차별 살인을 불러올 것이다. 이러한 공포를 조장하는 이는 다름아닌 우리 자신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 소설은 불우한 환경을 들어 가해자를 옹호하거나 가해자 인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차별 살해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현대 사회의 근본적인 원인이 사회 구조와 안전망 부재에 있으며 이를 순차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가해자가, 혹은 피해자도 될 수 있음을 일갈한다.


처음 만나는 작가가, 나에게 무거운 숙제를 던져 놓았다. 일독을 권한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계간 미스터리 2020 봄.여름 특별호 - 67호
한국추리작가협회 지음 / 나비클럽 / 2020년 8월
평점 :
절판


서미애 작가의 인터뷰와 신인상을 수상한 백색살의 기대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캉탕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7
이승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서양에 닿아 있는 작은 항구도시 캉탕에서는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바다의 신을 달래기 위해 바다 한가운데 사람을 빠뜨리는 제사 풍습이 남아 있었다. 배의 돛대 꼭대기 끝에서 희생자는 눈을 가린 채 뛰어내렸다. 이 사람들은 '뽑힌 자'라는 뜻에서 '파다'라고 불린다. 이 의식은 폐지되었고 현재는 누구나 방파제에 만들어진 돛대 모양의 높은 탑 위에 올라가 바다로 뛰어내릴 수 있다. 인습은 놀이가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해서 그 위에 올라가지만, 뽑힌 자로 거기서 떨어진다.










한중수는 정신과 의사이자 친구인 J의 조언ㅡ보려고 걷지 말 것. 쓸 것이 없으면 쓰지 말 것. 그저 걸을 것. 걷는다는 의식도 하지 말고 걸을 것ㅡ을 받아들며 서둘러 집을 나선다. J가 한중수의 손에 쥐어준 쪽지에는 '모비 딕'에 홀려 고래잡이 배를 탔다가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세상 끝 작은 항구 마을 캉탕에서 정착한 그의 외삼촌 핍의 주소가 적혀 있다.


한중수가 J를 통해 상상한 핍은 활달하고 자유롭고 밝고 천진한 노인이었으나 그의 앞에 있는 핍은 음침하고 침울한, 밤에도 불을 켜지 않는, 흡사 겨울잠을 자는 짐승처럼 보였다. 조카 J를 언급해도 시큰둥해하며 원한다면 남는 방에서 묵든 말든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는 핍은 아픈 나야를 돌보기 위해 병원에 간다.


한중수는 핍이 한때 운영했던 피쿼드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한 남자. 선교사였던 그는 자신과 자신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아주 먼 과거에서 부터 날아온 해임 통지서로 인해 선교사에서 해임되었고, 그때문에 글을 쓰고 있으나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어느날 피쿼드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쇼크를 일으켜 캉탕병원에 실려온 한중수. 그를 병원에 데려간  이는 해임된 선교사 타나엘이다.


컨설팅 강사인 한중수는 머리에서 사이렌 소리가 맹렬히 울려 더이상 강의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스트레스와 과로가 원인이라고 했지만 물리적인 치료와 투약을 해야하는 병은 아니었다. 스물한 살에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빚과 우울증 환자 어머니였다. 그는 미친 것처럼 필사적이고 전투적으로 살면서 한순간도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죽기 직전에, 캉탕으로 온 것이다.


병원에서 나오면서 핍을 발견한 한중수는 그를 뒤따라가 아픈 아내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에 가슴에 무언가 꽉 차는 느낌을 받는다. 글이 써지지 않는 타나엘은 한중수를 대상으로 말을 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타나엘의 젊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선교사가 된, 그리고 선교사에서 해임된 까닭을 이야기한다.


어느날 나야의 생일 파티를 위해 장을 보고 집을 정리하고 한중수를 초대하는 핍은 밝고 들떴다. 다음날 한중수의 기대와는 달리 집은 여느날과 다름없이 지나치게 고요하고, 다시 하루가 지나 한중수는 마을에서 멀찍이 떨어진 해안에 앉아 있는 핍을 본다. 그는 캉탕 축제의 마지막날, 나야는 3년 전에 죽어 해안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묻혀있음을 알게 된다.


축제의 마지막, 파다가 물에 뛰어든다. 바다에 뛰어든 파다는 모두 서른세 명, 그들 가운데 타나엘이 포함 되었다. 그러나 타나엘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  □  □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등장인물들이 안주하지 못하고 떠다닌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과거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자만의 방식으로 몸무림치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학교에 다닐 수 없을만큼 가난해 열여섯 살에 남의 집 머슴으로 들어가 열아홉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을 나온 핍. 그에게 삶의 의욕을 키워준 유일한 행위는 독서였고 '모비 딕'에 홀려 바다로 나가 세이렌(나야)의 노래소리에  끌려 캉탕에 몸을 던진 최기남 핍. J가 기억하는 (생서조림을 하고 보쌈을 만들어 내며 활달한) 핍은 나야가 죽으면서 사라졌다. 파다가 되어 캉탕에 몸을 던져 구원되었지만, 나야의 죽음으로 육신만 살아남은 최기남은, '모비 딕'에서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된 후 정신이 온전하지 않게 된 핍과 같은 선상에 있다. 


190.
"나는 죽은 사람이야. 죽은 사람은 움직일 수 없지. 나는 여기서만 산 사람이야. 여기는 죽은 내가 사는 곳이야."



젊은 시절 고향에서 한 여인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떠나온 후 오랜 세월이 지나 그녀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유력한 살해 용의자가 되어 선교사에서 해임된 타나엘은 캉탕에서 소명서를 쓰는 중이다. 그러나 비록 그녀를 직접 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가했던 잘못이 떠오르면서 글을 쓰지 못한다. 대신 그가 찾은 방식은 한중수에게 말로써 글을 쓰는 것인데, 기록으로 남는 글이 아닌 언어는 휘발된다는 사실에 선택했지만 이는 타나엘에게 고해성사처럼 되어버리고 오히려 자신의 '죄'에 대면하게 된다. 이는 희생자로 뽑힌 파다가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구원자가 되는 것처럼 타나엘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파다가 된다. 



타나엘의 고백을 들으면서 내면 가장 아래에 깔려있던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마주하는 한중수. 노름꾼 아버지를 인간 이하로 여겼던 것, 칼에 찔려 죽어가는 아버지를 방치한 것, 그 누구에게도ㅡJ에게도ㅡ말하지 않았던, 그래서 자신을 노려보는 아버지의 시선을 느껴왔던 것을 직시한다. 그 또한 파다가 되어 캉탕으로 흘러든 것이다. 


65.
캉탕은 익숙한 언어로부터 자기를 숨기기 위해 핍이 택한 장소가 아니었을까. 그 질문은 곧바로 그 자신을 겨냥하고 날아왔다. 핍이 자기를 마뜩잖아 한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죄'와 '구원'의 근원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정도의 차이일 뿐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고, 구원받고자 한다. 철학이, 문학이,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이 명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고 완벽한 해법이 없기 때문일테다. 이러한 반복된 과정을 통해 인류는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까? 


214.
바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고백들이 저 견고한 침묵 속에 묻혀 있는 것일까. 바다가 저렇게 검푸르고 탕탕하고 깊고 아득한 것은 그 많은 사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차별 살인법
저우둥 지음, 이연희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8월
평점 :
절판


처음 접하는 대만 작가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책소개에 기대가 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