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로마사 3 - 한니발 전쟁기 리비우스 로마사 3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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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중 가장 역동적인 시대 중 하나인 한니발 전쟁기를 빼놓고 로마의 역사를 말할 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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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리커버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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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은 전작,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4년이 지난 후 지방자치 선거일로부터 시작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백지 투표의 원인은 독자들이 찾아야 한다.  
 
합법적으로 민주적 절차 안에서 이루어진 비밀 투표에서 백지 투표가 80퍼센트가 넘게 나왔다. 정부는 한 국가의 수도에서 발생한 이 사태를 현 정부의 도발로 받아들이고, 범죄자가 도망치듯 수도와 시민을 버리고 몰래 탈출한다. 거대한 도망자 행렬을 연상시키는 이들을 배웅하는 건 수도에 남겨진 시민들이 살고 있는 집의 창문 밖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이었다. 도망나온 대통령과 내각이 예상한 수도의 상황은 약탈과 폭력, 파괴가 일어나 정권을 도발했던 무리들의 자멸과 정부의 부재를 시민들이 뼈저리게 느끼며 테러리스트들을 고발하는 것이었으나 기대와 달리 시민들은 시민의식을 발휘해 자체적으로 위생과 치안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인다. 불안감을 느낀 정부는 수도의 전철역에 폭탄을 터트려 위기감을 조성하지만 시민들의 침착하고 안정적며 평화적인 대응에 별 효과를 보지 못한다. 이것도 모자라 수도를 빠져나오려고 하는 시민들에게 애국심을 강요하며 돌아가라고 위협하고, 증거를 조작해 사실을 왜곡시키고, 협조하지 않는 자들과 자신의 지위를 넘보는 자들을 협박하고 죽이기까지 하며 급기야 총리가 두세 개의 장관직을 겸임한다. 이것이 한 국가의 정부의 모습이다. 
 
이 소설에서 독자들이 던지게 되는 첫 번째 질문은 '백지 투표가 불법인가?'이다. 이 질문은 등장인물들이 경찰에게 반문하는 장문이 수차례 나온다. 불법도 아니고 누구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않은 백지 투표에 정부가 겁을 먹은 이유는 무엇일까? 정권 해체를 요구하는 어떠한 시위나 문건이 없었지만 그들은 백색 투표가 시민들이 가하는 위협이라고 여겼다. 대통령과 고위 정부 인사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모습은 위에 썼듯 흡사 도망자들처럼 느껴진다. 전작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처럼 도시에 고립된 것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시민들이지만, 탐욕과 권력에 눈이 멀어 폭력을 불사하는 정부 인사들의 모습은 4년 전 수용소를 지키며 시민을 방치했던 군인과 당시 정부, 수용소 내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던 이들의 모습과 같다. 국민이 아닌 개인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시민의 목숨을 담보로 사건을 조작하고, 언론을 이용해 가짜 뉴스를 배포하며,잊혀진 사건을 들춰내 왜곡시켜 문제의 본질을 전도할 뿐만 아니라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제거하는 권력자의 모습은 시대를 막론하고 유사하다.   
 
경정을 죽이는 내무부 장관과 자신의 권력을 넘보는 내무부 장관을 사임시키며 겸임을 하겠다는 총리의 탐욕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안과 의사는 경찰에 끌려가고 그 사이 부인은 저격수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소설은 상당히 비관적이다. 전작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결말이 의아해질 수 밖에 없다. 작가는 왜 이토록 암울하게 소설을 마쳤을까? 개인과 소수집단의 연대는 노력으로써 나아질 수 있다. 그러나 정부 즉 막강한 공권력의 비리와 독재는 일반 시민들이 해결하고 뛰어넘기에 장벽이 높다. 정부의 그릇된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소설에서는 시장, 문화부장관)이 사임하고, 죽음을 무릎쓰고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경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무부 장관이나 총리같은 사람은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 스스로 자정 능력을 키우고, 시민들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눈을 뜨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눈을 뜨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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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리스
라이 커티스 지음, 이수영 옮김 / 시공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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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8월 31일, 72세 클로리스 월드립은 남편과 함께 휴가를 보내기 위해 비터루트 산맥 위를 날아가던 중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를 당한다. 조종사와 남편은 사망하고 클로리스는 부서진 비행기 송신기 단추를 눌러 구조 요청을 한다.  
 
송신기에 대고 수백번 구조 요청을 했지만 응답은 없고, 비가 내리며, 조종사의 얼굴은 너구리에게 뜯겨 나갔다. 이튿날 굽이진 계곡 사이로 연기가 보였다. 클로리스는 결정을 해야했다. 물도 없고 누가 무전을 들었는지 알 도리가 없는 비행기 근처에서 계속 기다리려야 할까? 아니면 연기가 나는 곳까지 찾아가는 모험을 감행해야 할까? 운명의 결정을 한 클로리스는 죽어서 나무에 걸려있는 남편의 안경과 부츠 한 짝, 산속 기온차를 고려해 조종사의 울 코트를 비롯해 몇 가지를 챙겨 길을 떠났다.

세 시간여를 걸어 연기가 나던 숲속 작은 빈터에 도착했지만 아무것도 없었고 구름이 모여들어 사방이 어두워졌다. 곧 해가 떨어져 어둠이 찾아올 것이므로 클로리스는 불을 피우지만 이어서 비가 내리고 그 비에 지도는 찢어지고 만다. 다시 한 시간을 걸어 골짜기를 내려다볼 수 있는 바위에 도착해 아스팔트 도로가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한 것도 잠시, 다시 두 시간을 걸어 도착한 곳은 계곡이었다. 다시 어둠이 시작됐고 비가 내린 후라 불도 쉽사리 붙지 않았으며 짐승의 윤곽도 보였다. 배고픔, 진드기, 두려움. 마지막 성냥, 마지막 캐러멜.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비행기 사고로 조난을 당한 클로리스 월드립이 3개월여의 여정을 20년 후 아흔세 살의 나이에 쓴 회고록 양식의 서술과 산림 경비대원 데브라 루이스가 클로리스를 수색하면서 만나게 되는 인물들을 통해 삶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교차해 진행된다. 
 
모두 다 비슷한 인생을 산다고 여기며 살아왔던 칠십 평생, 비행기가 추락하고 살기 위해 산속을 걸으면서 클로리스는 지난 인생을 되짚는다. 부모, 이웃, 사랑했던 남편, 그리고 죽음까지. 당연하지 않은 것들도 당연하게 여기며, 아파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며 살아왔었다. 자식이 꼭 좋은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아이를 낳고 싶었다. 27살에 불임 판정을 받으며 온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할거라는 자책감에 죽고 싶었으나 살아냈다. 클로리스는 자연 안에서 오롯이 자신의 육체와 생명력에 집중하며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클로리스가 수색대에게 구조되기 직전, 오두막으로 발길을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처참한 죽음을 지켜보고, 수습하지 못할 남편의 시신을 목도하고, 남편없이 살아야하는 삶, 그리고 야생 속에서 온갖 경험을 하고도 달라지지 않을 남은 인생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녀에게 오두막은 치유의 공간이었고, 화재가 나지 않았다면 새로운 인생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콜의존증을 앓고 있는 서른일곱 살 데브라 루이스. 몇 달 전 남편의 이중 결혼이 밝혀지고 심지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남편에 의해 충격과 상처를 받은 루이스는 삶 전체가 흔들린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클로리스에게 인생의 길을 잃은 자신을 이입하며 그녀의 구조에 집착하는 루이스. 때마침 파견나온 수색대장 블루어의 딸 열여덟 살 질이 산림 경비대 자원봉사자로 오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이외에도 소설에는 자신의 길에서 이탈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클로리스에게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던 마스크맨 머베크는 소아성애자로 수배자가 되어 산속에서 도피 중이었다. 사회의 잣대로 본다면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일테지만 그가 없었다면 클로리스는 살아남지 못했을테고 오두막의 화염 속에서 그녀를 구하고 죽었다. 머베크는 죽음으로써 세상에서 잊혀졌지만 적어도 클로리스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고 그녀에게는 하나의 '존재'로 남겨졌다. 자신의 길조차 찾지 못해 알콜에 의존하는 루이스를 통해 치유가 됐다고 말하며 떠나는 산림 경비대 자원봉사자 리프와 지병으로 죽은 엄마를 잊어가는 아빠를 멀리했던 질. 그들은 자연과 미숙한 동료들을 통해 서로에게 위안을 받는다.

소설의 마지막 클로리스와 질의 짧은 만남이 뭉클함을 전한다. 클로리스 월드립의 생명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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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투자 기본도 모르고 할 뻔했다 - 주식 투자할 때 간과하기 쉬운 투자요령
박병창 지음 / 북오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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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투자를 그만둔지 10여년지 지났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 읽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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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저널리스트 : 조지 오웰 더 저널리스트 2
조지 오웰 지음, 김영진 엮음 / 한빛비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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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지 오웰이 저널리스트로서 작성한 기사와 기고문, 칼럼들 중에서 일부를 엮은 문집이다. 평등, 진실, 전쟁, 미래, 삶, 표현의 자유 등 6개의 주제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 주제에 대한 오웰의 관점이 아주 잘 드러난 글들이 실려있다.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 쓰여있는 "이런 시대에 살면서 전체주의나 민주적 사회주의에 관한 글을 쓰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는 문장처럼 '오늘'을 써내려갔던 조지 오웰. 전체주의와 자본주의를 경계하고 자신이 지지했었던 사회주의와 자국 제국주의를 성찰함과 동시에 가장 낮은 곳에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 글을 썼던 오웰은 죽기 전까지 체념이란 없었다. 그는 사회의 어둡고 이기적이며 폭력적인 부분을 들춰내 비판하면서도 더 나아질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오웰은 애국주의와 국수주의를 구분할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며 소속 집단의 이익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를 비판했다. 그리고 제국국의 국민으로 살았음에도 식민지의 국민과 유색인종, 소외 계층의 고통을 잊지 않고 드러내며 힘있는 국가가 자국 국민의 이익을 명분으로 정의와 신념을 저버리는 행위를 성토했다. 또한 수면 아래에 있는 진실과 대중에게 보여지는 진실이 다르고, 소설 <1984>에 나타난 것처럼 역사가 진실을 기반해 쓰여지지 않는 것을 저항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을 우려했다.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인종차별과 난민 문제, 역사 왜곡 등을 떠올려 보면 오웰의 우려가 지금까지도 유효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이어야만 할까? 혹은 정치를 가까이해야 할까? 오웰이라면 이러한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가 그토록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노동과 (사회)민주주의는 보통의 국민이 정치적 시선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실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빈부 격차, 교육, 주택, 저출산, 고령화 등 평화로운 삶을 위한 사회적 혁명이 모두 정치를 통해 제안하고 결정할 수 있다. 우리가 절대로 정치를 외면하면 안되는 이유다. 오웰은 2차 대전 이후 상시적 전쟁을 예측했다. 앞으로 두세 개의 '초국가'가 분열하고, 초국가들 사이에서 상시적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역사와 교육의 왜곡으로 사상의 자유는 억압받는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2차 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 돌입함으로써 오웰의 예측은 상당수 일치했다. 또한 글로벌 시대에 신자유주의 시장인  현재를 들여다볼때, 총 대신 돈으로 상시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금, 오웰의 진단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오웰은 사회의 원동력은 노동자에 기반하고 있으며 평범한 노동자는 막대한 힘을 가진 중요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대다수 사람들은 '노동'이라는 단어를 경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IMF 이후 정규직 개념이 거의 사라진 현재, 노동의 제도화는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부분이다. 지구에서 그 어떤 나라보다 신자유주의에 입각해 있는 대한민국에서 노동의 불안정은 삶 전체를 흔들어 놓는다. 외환 위기가 극복됐다고 한지 십수 년이 지났다. 그런데 대다수의 서민은 여전히 IMF 시대를 살고 있다. 오웰은 퇴출이 명백해진 자본주의의 빈자리를 과두제가 대신할지, 진정한 민주주의가 대신할지 질문한다. 그런데 오웰의 예측은 안타깝게도 틀렸다.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더욱 강력해졌으며 각 국가 내, 그리고 각 국가별 빈부의 격차는 극단적으로 커지고 있다. 이대로 괜찮을까? 1946년에 던진 오웰의 질문을 지금이야말로 다시 물어야한다. 오웰은 진정한 악은 상대가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행위라고 썼다. '악'을 자처하는 자, 누구일까?

사회 부조리와 불평등을 몸소 겪었던 조지 오웰. 그의 시선은 매일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고, 펜 끝은 억압하는 자들을 가리켰다. 그는 '언론 재벌'로 일컬어지는 대형 언론에만 국영화를 실시하고, 소규모 독립 언론은 그냥 남겨두라는 제안을 한다. 그런데 정경유착과 기업의 광고에 기생하는 언론이 거의 대부분인 한국에서 가능할지 의문이다. 오웰이 생각하는 진정한 언론의 자유란 소수 의견을 인쇄하고 배포하는 행위가 쉽게 이루어지고 불법으로 규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다양하고 진정성 있는 저널리즘을 지향하는 소규모 언론이 생기기를 바라며, 거대 정당이 양분하지 않는 다수의 소수 정당이 국회에 자리하기를, 나 역시 바람한다.  
 
조지 오웰이란 사람의 글을 한 달 이상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그와 밀착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당분간은 오웰의 글에서 멀어지겠지만, 삶을 열망했던 그의 에너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받아서 감사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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