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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이야기들
발터 벤야민 지음, 파울 클레 그림, 김정아 옮김 / 엘리 / 2025년 4월
평점 :
마흔두 편의 노벨레, 설화, 서평, 비평, 에세이 등이 실려있다. 그중에는 사후 출간했거나 미완성작도 있다. 크게 3부로 나뉘는 이 책의 매력은 다양한 벤야민의 글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발터 벤야민은 독일 출신의 유대계 철학자이자 문예 비평가이고, 좌파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1부 꿈과 몽상>은 벤야민의 아포리즘 모음집 『일방통행로』를 떠올리게 한다. 「꿈」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이야기 속 화자가 꾼 꿈에 대한 이야기다. 나치를 피해 파리로 망명, 다시 나치에게 쫓겨 급기에 자살에 이른 벤야민에게 '꿈'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가 탐구했던 신비주의와 초현실주의가 꿈을 통해 보여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2부 여행>은 벤야민이 여행자로서 또는 이방인으로서의 시각에서 쓴 에세이가 다수다. 이 글을 통해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꼽아본다. 나의 심리적 태도와 내가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타자와의 거리 등이 관계의 양상에 미치는 영향. 열등감과 자기비하에 치여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고독한 현대인의 자화상. 꿈을 통해 드러나는 무의식 혹은 본능 등이었다. 벤야민의 글에는 사는 동안 수시로 찾아오는 위기와 막연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행복했던 기억과 그리움임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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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1」을 비롯한 1930년 이후에 집필한 글들은 당시 그가 처한 상황과 심경을 잘 보여준다. 특히 1933년 나치를 피해 파리로 망명한 벤야민이 쓴 글에는 전쟁과 폭력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벤야민은 인간이라는 존재와 인간이 만들어가는 사회와 문화에 대해 사유한다.
언어(혹은 언어적 행위)의 모호함.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 언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들어 「숨기고 있던 이야기」에서 짝사랑하는 여대생과 한 기차에 탄 남자 대학생. 그는 선뜻 아는 체를 하지 못하다가 그녀의 트렁크를 들어주는 차장의 손길에 질투심을 느껴 차장으로부터 그녀의 트렁크를 빼앗듯 낚아 채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 주었는데, 정작 여대생은 그를 짐꾼 취급이다. 여기서 알 수 없는 것은 남자가 여자한테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에 여자는 정말 그를 짐꾼으로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짐꾼이 아닌 줄 알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독자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어떤 비극적 순간에도 제 욕망에 충실한 인간의 원초적 성질.
문자가 인간의 삶에 남긴 흔적들.
거짓과 사실. 거짓은 발화發話됨으로써 존재하고, 거짓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신뢰는 상대적이다.
이처럼 세상, 세상 안에 있는 수많은 것들, 그리고 자아. 이들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깊은 고찰.
<3부 놀이와 교육론>에서는 벤야민의 비판이 유독 날카롭다.
그는 잘못된 교육 방식이 아이들의 재능을 사장시킨다고 말한다. 획일적이고 주입식 교육, 특히 특정 사상이나 이념의 강요는 아이들의 창의력에 가장 큰 독임을 지적하면서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놀이'임을 강조한다. 또한 동화를 비롯한 여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매체들이 폭력과 학대를 선善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식민주의식 사고와 물질우선주의를 미화하는 것에 우려를 표하며 독일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요소라고 일갈한다. 그는 철학적 농담과 언어 유희를 이용한 딜레마와 역설, 발명과 이름 붙이기, 유머 등 창의성 말살에 가까운 현대 사회의 교육을 향해 유니크하게 충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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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머리를 스친 생각은, 삶을 살아가는 혜안은 차곡차곡 쌓여진 경험과 성찰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벤야민이 이비사에서 만난 낚시꾼 오브라이언은 '매듭 짓기'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그물의 매듭이 아닌 인생의 매듭으로 읽혔다. 그리고 간혹 지나가듯 말하는 은섬 씨의 한 마디는 여느 철학자 못지 않다. 이 짧은 글들을 통해서 벤야민은 경험과 사유의 공유를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누구의 경험도, 어떤 이의 서사도 하찮은 것이 없음을, 그는 이야기하고 있다.
매 작품의 앞에 실린 파울 클레의 그림들은 마치 마스킹테이프처럼 글의 분위기를 더해주는데, 본문의 내용과 묘하게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특히 대분류로 나뉜 각 부의 제목에 실린 그림들( 1부의 「여자와 짐승」, 2부의 「힐터핑엔 지방」, 3부의 「춤추는 꼭두각시」)은 해당 하는 본문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느낌도 든다. 어느 분이 이 그림을 선별하고 각 단편마다 매칭시켰는지 알 수 없으나 칭찬드린다. 덕분에 파울 클레의 화집을 찾아보는 중이다.
※ 도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