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으로부터 멀리, 낮으로부터 더 멀리
박대겸 지음 / 호밀밭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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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SF, 호러, 미스터리, 오컬트, (소위)순문학 등 다양한 장르가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 한 사람이 썼다는 게 의아할 정도로 다채로운 색깔과 정서를 보여주는 소설들은 단행본을 읽듯 각각의 작품마다 다른 매력이 있다.  



우리가 온전히 목마름과 추위를 동반한 고립과 단절에 처했을때 가장 바라는 건 의외로 서로 체온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다. 소설에서 보자면, 극단적인 외로움을 넘어 일상에서 늘 따라오는 반복되는 공포와 두려움은 극심한 난시로 안경이 없으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승호(부러진 안경), 이러나 저러나 결국 총을 맞게 되는 남자(글록17)로 대변된다. 또한 사회 안에서 존재감이 점점 사라져가는 현대인의 외로움은 <호세 알프레도를 찾아서>를 비롯해 작품 전반에 드러난다. 


집단 내 괴롭힘, 성소수자 등 우리 사회에서 자행되는 차별과 편견 속에서 갖는 외로움뿐 아니라 당면한 삶을 주어진대로 살아오다가 어느 순간 길을 잃거나 반복되는 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 우리에게 고독은 늘 곁에 있다.  







 
소설에는 서술자 시점이 있다. 대부분 1인칭과 3인칭으로 쓰여지는데 사실 2인칭 시점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2인칭 소설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적어도 내가 읽은 2인칭 소설은 다른 서술자 시점보다 독자의 긴장감이 길게 이어진다. 이 책에 실린 <빛의 암호> 역시 그렇다. 특히 독자가 등장인물의 '수첩'과 '죽음'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다고 자신했을 때 그 수첩을 '너'에게 건넨 이유가 따로 있음을, 그리고 그의 죽음에 다른 이유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너'라고 불리는 2인칭 시점 장치는 읽고 있는 내 마음을 더 묵직하게 눌렀다. 마치 나에게 하는 말인 것처럼. 


그런데 책에 실린 각각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외부에서 가해지는 두려움이나 고통에 그대로 노출되어있음에도 도망가지 않고 대면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글록17>의 주인공이다. 부조리한 선택을 강요받으면서도 이를 거부하지 못하는 모습도, 막상 도망갈 기회가 주어져도 차마 도망가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매순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희망적이다가도 비관스럽고, 한편으로는 무위와 체념이 오가는 소설들은 우리가 살면서 처하고 느꼈을, 적어도 한두 번은 겪었을 법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과 감정들을 실제적으로 그리고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나비의 속도>에서 말하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공간 이동이 가능한 세상에서 택시를 타는 사람들. 발열이 우리 몸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이듯 쉼에  대한 욕구 역시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DNA에 새겨진 생존본능 중 하나가 아닐까.  



소설에서 좋았던 부분 중 하나는 거리에 대한 서술이다. 몇몇 작품('부러진 안경' '그날 있었던 일' '시간의 유속' 등)에서 인물들이 자신의 현 위치와 이동하면서 보이는 거리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마치 독자가 인물과 함께 그곳에 있다는 현장감을 주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특히 우리나라 소설이다보니 알고 있는 지역이나 지명이 나오면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때때로 카프카적이고, 때때로 카를로스 푸엔테스 같은 느낌.  




오랜만에 눈에 훅 들어오는 우리나라 작가의 단편을 읽었다.
종종 근래에 나온 한국 단편들 중에는 소재나 전달하는 메시지, 심지어 정서적인 부분까지 너무 흡사해 읽고난 후에는 누구의 작품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뒤표지에 보면 '소설이 가진 힘을 믿는 새로운 정직성의 출현'이라는 문구가 있다. 동의하는 바다. 단편임에도 장편같은 힘을 가진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 출판사 지원도서

싸우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생명체들. 먹기 위해 싸우고,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 싸우고, 때론 자연과 싸울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그곳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싸우기도 하고, 어떨 때는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살고 싶어서 싸우기도 하지. 그도 아니면 그저 싸우고 싶어서 싸우기도 하고. - P17

이 남자는 왜 내 대답 같은 건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걸까.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상태로 계속 이 사람이 하고 있는 말을 듣고 있어야 하나. 아니면 내가 그냥 이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까.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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