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있는 리플리 리플리 5부작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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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살 톰 리플리에게는 재능만 있는 게 아니라 운도 있었다. 너무나 술술 풀리는 톰의 운발이 억지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 초판이 1950년대 중반에 출간됐음을 기억하시라.  


십수 년 전에 읽을 때에는 스토리에 무게를 두고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에 읽으면서 유독 눈에 들어온 부분은 '톰 리플리'라는 캐릭터와 소설 속에서 보여지는 그의 심리였다.  








사기와 공문서 위조 등 시시콜콜한 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톰은 소설 시작부터 경찰에 쫓기는 인물로 그려진다. 유년 시절 이모의 가정학대로 시작해 두 번의 가출, 그리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국세청 물품 보관소에서의 일을 끝으로 무직 상태다. 하는 짓을 보면 양아치가 따로 없는데 생긴 건 멀끔하고 훤칠하며, 머리까지 좋아서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 남을 흉내내거나 성대모사 같은 잔재주는 말할 것도 없고 회계, 언어, 예술 등 배우는대로 흡수한다.  


잔인하게 사람을 쳐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다가도 한없이 여린 모습을 보이는 톰은 반사회적인격장애라고 하기에도 묘한 경계선에 있다. 분노를 터뜨리다가도 죄책감을 느끼고, 좋아하는 사람을 속이는 것에 괴로워하고, 타인을 향한 동정심을 가지며, 자기연민과 이상이 뒤섞여 동경하는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렇듯 작가는 독자가 '톰 리플리'를 한껏 미워할 수도, 응원할 수도 없는 인물로 만들어버렸는데, 독자의 이러한 감정이 소설에서 내내 흐르는 톰의 감정선과 흡사하다. 그렇다보니 독자는 시종일관 톰의 관점에서 소설을 읽게 된다(나만 그런가...?).


톰은 능수능란하게 디키와 톰을 오가면서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다. 심지어 디키의 아버지 앞에서 디키의 절친 행세도 마다하지 않는다. 소설 초반에 톰은 '뉴욕이라는 도시가 마치 거대한 쇼를 하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 동시에 '어느 순간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은 세트장'같다고 표현한다.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쾌감과 언젠가는 모두 들통날 거라는 불안감이 수시로 교차한다. 상대의 무정함에 쉽게 상처받고 외로운 게 싫었다는 톰이, 죽을 때까지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도 없고 방심하는 순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위험한 줄타기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시간이 흐르고, 거짓이 더 크고 넓어질수록 그 이유와 원인은 무의미해졌겠지만.  


어쩌면 톰이 뉴욕을 떠나는 배 안에서 그린리프 부부의 과일바구니를 보고 흐느낀 그때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그 장면이 기억에 내내 남았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톰이 생각하는 인생의 새 출발점은 '헌팅캡'이었는데, 헌팅캡은 톰을 상류층 명문대 출신의 고소득자로 변모시킨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을 먹게 한 헌팅캡. '새로운 인생'을 생각하는 독자와 톰의 괴리는 이렇게 크다.   



톰 리플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장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톰은 항해 중에 그린리프 부부 앞으로 편지를 쓰는데, 과일바구니에 대한 감사의 인사와 순항 중이라는 내용을 넘어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상상해서 써내려간다. 아직 만나지도 않은 디키와의 일상, 마지라는 여성에 대한 의견 등 그 분량이 무려 여덟 장에 달한다. 또한 도티 이모에게 보내는 편지는 자신이 마치 해외에 출장이라도 떠나는 사람마냥 예의를 다해서 쓴다(이모와 톰은 예의를 갖추는 관계가 아니다). 자신이 배에서 연기하고 있는 상류층 명문대 출신의 진지한 청년 역할에 충실하게. 이후 톰은 드문드문 이모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이것 역시 상당히 의외의 모습이다.  


소설 곳곳에는 리플리가 정작 기대하고 바랐던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화목한 가정, 격려를 아끼지 않는 부모, 다정하고 친근한 형제, 스스럼없이 우정을 교환할 친구. 톰으로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모르는 디키가 더 괘씸했는지도 모르겠다. 톰이 저지른 모든 범죄는 우발적이지 않았다. 어쩌면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모두 너희들'이라는 톰의 삐뚤어진 복수심이 터져버린 것은 아니었을지.


어느 때부터 디키의 걸음새, 세세한 몸짓과 말투, 음성의 높낮이까지 따라하고, '집'을 갖고 싶어하며, 하찮은 존재가 되는 게 싫어 다시 토머스 리플리로 돌아가기 싫은 톰. '리처드 그린리프'를 연기하는 것도 모자라 종단에는 '톰 리플리'까지 연기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앞으로의 삶에 '나'가 아닌 '연기자'로 살아야만 하는 남자. 배우가 되고 싶었던 그가, 배우가 되지 못해 제 인생 전체를 허구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물론 톰이라면, '너나 잘하세요'라고 했을듯 하다만.)



최고의 범죄 소설가이자 심리소설의 대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를 가장 분명하게 증명해주는 작품이다. 범죄소설이지만 범인을 추적하는, 쫓고 쫓기는 줄다리기를 떠나서 오직 톰 리플리에만 집중해도 충분히 풍성한 소설이다. 범인凡人인 나로서는 이 똑똑하고 명민한 남자의 심리를 유추하는 것만으로도 읽는 동안 내내 흥미로웠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리플리의 감정과 생각을 가늠할 수 있는 몇몇의 상징적인 단어와 장면들을 던져놓는데, 그것들을 따라가다보면 리플리가 얼마나 다중적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화려한 쾌락을 탐닉하며, 지독하게 세속적인, 그러면서도 저속하지 않은, 이 남자의 뒤를 계속 따라가봐야만 할 것 같다.  





※ 출판사 지원도서
   

이런 생각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두어 번 든 적이 있었다. 화가 나고 실망할 때면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다가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서 수치심만 남았다. (...) 디키에게 우정이며 동료애며 존경심까지 줄 수 있는 건 모조 주었다. 그런데도 디키가 배은망덕으로 갚는 것도 모자라 이젠 적의까지 품다니. 디키가 매정하게 날 내치다니. (...)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디키 그린리프가 되자. - P87

방에 혼자 있을 때도, 로마 거리를 거닐 때도 톰에게는 매 순간이 기쁨이었다. 관광을 겸해서 아파트를 보러 다니면서도 톰 리플리가 디키 그린리프로 변신한 이상, 절대로 외롭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 P105

그는 톰이면서도 톰이 아니었다. 떳떳하고 자유로웠지만 자신의 일구수일투족을 의식적으로 조종하고 있었다. (...) 이제는 침대에서 일어나 이를 닦으러 가는 순간부터 톰은 디키가 되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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