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렐류드 - 찬란한 추억의 정원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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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에 비견할 만큼 단편에 탁월한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선집이다.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든파티>와 미완의 <6년 뒤>를 포함한 열여섯 편이 실려 있다.









아버지를 두려워하지만 한편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 소녀, 부잣집 남자를 기대하며 고급 창부가 된 자신을 상상하는 바이올라, 잘생긴 용모를 가진 남자의 프러포즈를 꿈꾸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처한 현실에 파묻힌 기분으로 사는 베럴, 마차를 타고 집을 떠나는 상상을 하는 린다, 고령에도 주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딸의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 하는 페어필드 부인, 어머니를 여의고 낯선 할아버지 집으로 가기 위해 배에 몸을 싣는 어린 페넬레, 죽음을 통해 인생의 기적을 확인한 로라,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신데렐라가 되는 꿈을 꾸지만 눈을 뜨면 녹록치 않은 현실로 돌아오는 모자 가게 점원 로저벨, 일평생 아버지의 권위에 주눅들어 살았던 두 자매  등 각 소설들마다 가부장제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결혼을 통한 경제적 신분 상승 및 화려한 삶에 대한 욕구와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를 꿈꾸는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들, 그리고 새로운 삶 앞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극복해야만) 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딜 피클>에서 6년 만에 우연히 재회한 (한때 연이이었던) 두 남녀가 추억하는 어느 오후의 기억은 전혀 다르다. 그들이 공유한 기억의 파편에 실려 있는 감정도 다르다. 마지막 그 한마디! 기억의 진실 여부를 떠나서 이런 남자, 나도 별로일세... . 당시의 부부 관계와 결혼 생활을 비둘기 암컷과 수컷으로 비유하면서 압축적으로 명쾌하게 보여 준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이 있다면, <레지널드 피콕 씨의 하루>는 권태에 빠진 기혼 남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락가락 하는 마음>에서는 궁핍한 생활과 자괴감에 넌더리가 나 엉뚱한 생각을 하지만, 작은 소동으로 자신감을 얻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러나 잊지 마시라, 현실에서의 강간 위험은 그토록 쉽게 벗어날 수 없음을. 이외에도 일평생 아버지의 그늘에서 살다가 그의 죽음으로 마치 보호자를 잃은 어린애처럼 매사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매 등 우리가 주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사건과 인물들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그동안 <가든파티>를 가장 좋아했던 이유는 읽을 때마다 여러 생각이 복합적으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연코 표제작 <프렐류드>를 꼽는다. 이 소설에는 여성의 사회적 문제들을 다각적으로 고스란히 담고 있다. 제인 오스틴이나 버지니아 울프가 각각의 작품들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ㅡ가정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전무하고, 가사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임신을 강요 당하고 가정 내 결정권이 없는 등의 문제점들ㅡ를 한 작품에 여러 여성들을 통해 간결하게 녹여냈다. 남편의 실내 슬리퍼보다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딸들, 허약한 아내의 건강은 염두에 두지 않고 식탁에 미리 마련해둔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의 자리,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한 후 행복을 강요하는 가장.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귀결하는 바는 결국 여성에게 부재한 경제력이다. 오늘날 여성의 경제 활동 비율이 상승했다고는 하지만 전 연령대를 아울렀을 때 남성의 경제 활동에 비하면 현격히 낮은 수준이다. 하물며 19~20세기의 여성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나. 다방면으로 재주가 뛰어남에도 허영과 독립의 욕구를 오가며 타인을 하찮게 여기고 낮잡아 대하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올리려 드는 베럴의 낮은 자존감도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프렐류드>에서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페어필드 부인인데, 어쩌면 작가는 가장 나이어린 키지어부터 로티, 이저벨, 베럴, 린다까지 결국 이들이 도달하는 삶의 모습은 페어필드 부인이라고 말하고자 했던 건 아닐까. 물론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의 삶을 폄훼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삶이 여성 본인이 원했는지, 그전에 선택의 기회가 있었는지, 그러한 여건이 가능했는지를 따져봐야할 것이다. 어린 딸 키지어에게 알로에가 백 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말을 하면서 짓는 린다의 미소의 의미는 무엇이며, 곧 꽃을 피울 것 같은 알로에는 린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그들이 거울 안에서 발견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이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소설에서 행복한 사람은 가장 스탠리 뿐이고, 퍽퍽한 그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유일한 사람은 페어필드 부인이다.



짧게나마 <가든파티>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내용은 각설하고) 다른 가족들과 달리 로라가 가든파티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조문 바구니를 남은 음식으로 채우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이유는 사망한 가난한 젊은 마부와 그의 가족이 이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나마 셰리던 부인이 마지못해 조문 바구니를 만들자고 한 이유는 그저 불편한 감정을 씻어내기 위해서다. 조시는 조문을 갈 로라의 드레스가 망가질 것을 걱정하고, 셰리던 씨와 아들 로리는 그저 관망할 뿐이다. 하층민의 젊은 마부의 죽음은 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고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죽은 젊은이의 시신을 본 로라에게 잠을 자듯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 평화롭게 느껴졌다. 그녀는 같은 시각에 한쪽에서 요란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사이, 다른 한쪽에서는 죽음을 관통해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는 기적이 일어났음에 대해 생각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죽음을 통해 삶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혹은 어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가. 후반부에 나타나는 로라의 각성은 읽을 때마다 여러 생각이 들게 한다.



사실 이번 단편선집에 실린 작품들은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이 마음에 들어온다. 내가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 글들은 19세기를 전후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갈수록 교묘해지는 성폭력의 위험을 비롯해 현재 사회의 모습과 대입해서 읽어도 큰 괴리가 없다. 결코 가벼이 다룰 수 없는 시대성을 간결하면서도 위트있게 담아낸 작가가 단편의 대가라 불릴만한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사족
아주 짧지만 임팩있는 <독일인들과의 식사>. 그 테이블에 앉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피곤해.




257.
아무리 그렇더라도, 우울에 집착하거나 추억에 매달리려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삶이 더없이 슬프게 느껴진다는 것을 고백할게요.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어요. 질병이나 가난이나 죽음처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슬픔을 뜻하는 게 아니에요. 아니, 이건 달라요. 이것은 우리가 내쉬는 숨결처럼 어딘가 깊은, 아주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요, 아무리 열심히 일해서 몸을 피곤하게 해도 잠깐 움직임을 멈춘 순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것의 존재를 느껴요.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느끼는지 자주 궁금해요. 영영 알 수 없겠죠. 그렇지만 그 달콤하고 명랑한 노랫소리 아래 결국 이런 것이, 슬픔이 존재한다는 게 놀랍지 않나요? 아,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들은 그것은.
('카나리아'에서)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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