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예찬 - 타자 윤리의 서사 예찬 시리즈
왕은철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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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누구이든 무엇이든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환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환대는 어떤 것이 존재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거나 알지 못해 고마움을 모를 뿐이다.

책머리에

 

 

환대의 정의는 국어사전에 의하면 '반갑게 맞아 후하게 대접함'이다, 저자는 환대가 우리의 본성인 것만큼이나 타자를 두려워하고 배격하는 것도 우리의 본성이며, 두 개의 상반된 본성이 빚어내는 현상과 그것의 윤리성에 주목한다고 했다.

저자는 철학자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환대'에 대한 개념을 바탕으로 삼아 성경의 '창세기'와 '판관기',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흰',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 권정생 선생의 '몽실 언니', 석가모니가 들려주는 '수대나태자경'을 통한 보시, 디아스포라, 이스라엘ㅡ팔레스타인 문제, 도스토옙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영화 '타인의 삶', 오에 겐자부로 선생, 소설가 최은영의 '신짜오 신짜오', 그 외에도 소설 해바라기, 나의 미카엘, 가시선인장, 야만인을 기다리며, 필경사 바틀비,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밤비 등의 문헌을 통해서 진정한 환대의 의미, 이론과 실천의 괴리, 실천적 행동으로 보여지는 환대, 환대와 애도, 환대와 용서 등 현 사회에서 보여지는  타자성의 존중 즉 환대에 대해 짚어본다. 

 

<환대의 전통 윤리와 폭력의 경계>

자신의 집에 들인 손님을 폭력배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딸과 손님의 아내를 제물로 내놓는 것이 과연 환대인가? 맹세한 보시를 지키기 위해 왕자의 신분으로 적국에 자국의 중요한 보물을 주고, 아내와 아이까지 타자가 원한다고 해서 건네주는 것은? '창세기'의 롯과 '판관기'의 노인, '수대나태자경'의 왕자는 모르는 남에게는 끝없는 환대와 보시를 베풀었을지언정, 정작 가족에게는 폭압을 행사한 모순이 따른다. 이는 가족에 대해서는 타자화 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이에게 환대를 베푼다는 관점에서는 성립되기 힘들다. 

위의 내용을 통해서 환대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윤리다. 하지만 그 윤리 안에 가부장적 관습을 기반한 여성폭력을 통반한다면 이를 윤리적으로 볼 수 있을까? 역사 안에서 실현된 환대와 폭력의 경계를 생각해 볼 일이다.  

 

진정한 환대에는 때로 희생과 고통이 따르고, 하나의 윤리를 위해서 다른 하나의 윤리를 저버리기도 한다. 환대는 끝없이 내놓어야 하는 것. 그렇다면 환대에는 완성형이 있을 수 없다. 결국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자꾸만 뒤로 미뤄지는 그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데 목적이 있다(p64)'고 저자는 말한다.

 

 

<겸손, 인정, 사랑, 용서의 환대, 그리고 실천의 괴리>

우리는 종종 섣부른 공감과 이해로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자신의 기준에 맞춘 배려는 무리에 동화시키려는 전체주의와 다름하지 않다. 환대할 수 없는 대상을 환대하는 것, 타인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 타자의 슬픔을 재단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상대를 위로하고 같이 울어주는 것이 진정한 환대다.   

타자성을 존중하며 '나와 당신'의 관계를 놓지 않는 것이 가지는 힘. 그러나 실천은 녹록치 않다. 소설 '신짜오 신짜오'에서 투이의 엄마와 화자의 엄마가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은 현실에서 보기 어렵다. 이는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었다면 최소한으로 가져야할 윤리다. '상처와 고통 앞에서 논리는 아무런 소용도 없고, 논리를 통한 자기합리화는 비정하고 폭력적(p219)'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신을 타자에 앞세우는 존재론은 폭력적일 수밖에(p231)' 없다. 어떤 대상을 위해서 하는 행동이 자기 만족에 불과하다면 보이는 결과와 상관없이 이는 환대라고 볼 수 없다. 쉬운 예를 들어 기부를 하는 행위가 환대로 보여지겠지만, 기업의 이미지 홍보나 개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환대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월의식까지 내포하고 있다.

타자성을 존중하며 '나와 당신'의 관계를 놓지 않는 환대가 필요하다.

  

 

<실천적 행동으로 보여주는 환대>

영화 '타인의 삶'에서는 비즐러는 이득은 커녕 그로인해 자신의 안위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 도청 대상에게 도움을 준다. 소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에서 브루노가 슈무엘에게 주는 따뜻한 음식과 마음도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환대의 실천적 행위다.

이처럼 환대는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위태로운 모험을 감수하며 그냥 주는 것이다. 환대는 것이다. 머리나 이성이 아닌 마음이 움직여야만 가능하다. 논리와 이성이 먼저 움직이는 순간, 이미 환대는 끝났다.

  

 

<배제하지 않는 환대>

저자는 레비나스의 인간중심적인 환대이론보다 데리다의 확장적인 환대이론이 더 윤리적이며, 환대의 본질에 가까다고 말한다. 동화 '밤비'의 내용을 빌어 동물은 인간의 마음대로 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전한다. 인간이 지구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는 망가질 뿐이다. 수많은 사회학자, 자연과학자들이 탈 인간중심을 외치고 있는데, 이것이 환대라니, 우리는 환대에 대해서 만큼은 아주 기본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나 보다. 

 

 

환대는 댓가나 교환 개념이 개입하지 않은 조건 없는 순수한 선물이다. 그리고 진정한 환대는 타자가 타자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또한 상대를 배려하지 않은 환대는 의미를 잃는다. 무조건적인 환대는 인간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다. 개인주의를 선호하는 현대사회에서 환대는 부재 중일 때가 더 많다. 그래서 지구 곳곳에 흐르는 눈물은 마를 날이 없다. 

 

 

애정하는 수많은 소설들을 번역한 왕은철 님이 쓴 환대에 대한 에세이다. 오랜만에 집중해서 깊이 빠져 읽은 산문이다. 어느 틈엔가 놓아버린 것들에 대한 상념ㅡ다수 혹은 개인, 소소한 신념, 나와의 약속, 허울뿐인 배려, 흔들리는 이해와 공감ㅡ들에 에 빠져 읽었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환대가 어렵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한 적극적 이해를 통한 공감을 위한 노력은 계속 할 것이다.

이 뼈있는 글들을 일일이 옮겨 적을 수 없지만, 본문에 있는 박완서 선생의 말씀으로 대신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알려고 하고, 그것을 함께 하고, 나누어 가지려는 사람의 선의처럼 소중한 것은 없다. 그러나 누가 감히 타인의 고통을 참으로 알았다고 할 수 있으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참으로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두려운 오만은 없을 것 같다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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