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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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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에서 일상을 공유하는, 그 중 특히 문화생활을 즐기는 사람 중 이른바 '교양인' 아닌 사람이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할 때, 나는 마치 다음과 같이 묻고 있는 기분이 든다. "현대인들 중 속물 아닌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글쎄, 여기서 말하는 '속물'을 정확히 무어라고 지칭해야 할까? 선한 척 하지만 사실 선하지 않고, 도덕적인 체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며, 심지어는 '도덕적'인 것 조차 자신의 특성과 명예가 되기 때문에 선택할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 혹은, 우리가 흔히 '속물'을 지칭할 때 말하듯 교양이 없고 식견이 좁고, 세속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

 

나는 소설을 좋아하면서도, 사실 어떤 소설을 읽을 때 그 이야기가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불편할 때가 종종 있다. 대중소설에서는 그런 경우가 많이 없는데, 그래서 그런 쪽의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기도 하다. 현실에 숨쉴 것 같은 속물, 나를 보는 것 같은 인물의 허영과 이중성을 밀고하는 듯한 글을 읽는 것보다, '캐릭터'의 완전하고 논리적인 세계를 보는 게 내 마음에 작은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앞면은 그렇게 두꺼워 보이지 않으나..>

 

하지만, <플래너리 오코너>는 결단코 그런 위안이 되는 소설은 아니다.

소설은 끈질기게 문학의 본분을 실현하려는 듯 독자를 붙잡는다. 약 30편에 달하는 단편을 묶어둔 단편집이니만큼 읽다보면 저자인 오코너 자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가 궁금해지기도 하고, 얼핏 이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내가 상상한 오코너는 이런 이미지였다.

 

얼굴 하얗고 창백한데 동그란 알이 달린 1900년대 지식인풍 안경을 쓰고 늘 책을 보는 머리 좋은 여자.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동의하지도, 그렇다고 동의하지도 않는 얼굴로 앉아 '그게 진짜 그런가?'하고 딴지 거는 사람. 세상이 아름답다고는 도통 믿을 수 없고, 사람의 미덕 역시 믿지 못하며,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낭만적 인간형 따위는 우습게 생각하는 여자.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글쎄, <플래너리 오코너>를 한 번 손에 들고 이 어마어마한 분량의 소설을 전부 읽어나가 본 사람으로서, 이 정도 평가조차도 후하다는 느낌이 든다.

오코너의 단편에는 몇몇 소재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시골-도시','검둥이','기독교','예수' 등이 단편적인 예시다. 오코너는 이런 소재를 다양하게 변주하여 활용하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주제의식을 전개시켜 나간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그녀는, 삶의 '예측 불가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알고 있다'는 인간의 자의식과 자신감을 가볍게 비웃는다. '선(善)'하면 복을 받는다는 순진한 권선징악 정신이나 '선' 혹은 "사랑"으로 누군가를 구원하리라는 생각 역시도 조소의 대상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읽어 내려가다보면, 오코너가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사랑이나 정의감으로 구원받는 얘기? 그건 소설 속에나 있는 거고."

 

그래서일까?

분명히 상징이 들어가 있고 부조리하게 느껴질 법한 상황으로 점철되어있는 소설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오코너의 글을 읽으면서 계속 소설이 아니라 현실의 단면을 읽어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두께가 어마어마하다. 한꺼번에 다 읽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 뿐 더러 좋은 글임에도 질리게 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사탕 아껴먹듯 읽어야 한다! ㅠㅠ>

 

그 어떤 단편에서도 지속적으로, 무언가가 일어나리라 '예상'하거나, 자신의 기준에 맞춰 타인을 재단하고 '상상'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기대며 예상은 모조리 배반당한다. 검둥이는 모두 아틀란타에서 왔다, 검둥이는 자신보다 아래다, 라고 생각한 노인은 옆집 이웃으로 뉴욕 출신 흑인을 만나게 되고, 자신은 우월하고 선량한 백인이라 생각하던 부인은 자신이 '백인쓰레기'라 평한 여자를 앞에 두고, 여대생에게 "지옥"으로 돌아가라는 외침을 듣는다. 플로리다에 범죄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플로리다 여행일정을 취소한 할머니는 자기 고집대로 가족들을 이끌고 가지만, 범죄자는 플로리다가 아니라 그녀의 가족 앞에 나타난다.

 

뿐만인가?

'사랑'으로 뛰어난 아이에게 기회를 주려 했던 선생은 아이의 비웃음과 조롱을 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이와의 커넥션 마저 잃어버린다. '추방자'를 데려와 농장의 일원으로 삼자 도리어 농장에서 누군가는 추방되고, 추방자만 추방시키면 다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리라 생각했건만, 추방자의 추방과 함께 모든 것의 몰락이 찾아온다. 오코너의 소설 대부분은 이런 식이다. 삶의 아이러니, 사람들의 이중성, 그리고 완고한 기독교적 믿음이 가진 허상성을 가감없이 다룬 오코너의 언어 하나하나가 신랄하고, 그걸 읽어나가다보면 뭐랄까 좀, 씁쓸해진다. "사람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걸까?" 이 질문이 절로 나오게 하는 힘이 소설 안에 있다.

 

오코너의 소설은 당연하게도,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하는 글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처럼, 힘들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대안이 있음을 말하는 소설이 있는 반면, 오코너의 소설은 대안이 아니라 그저 후벼파고, 이면을 바라보게 하고, 문명 안에서 "푸줏간"과 "경찰관"의 존재 덕에 유지되는 이 거대한 인간사회라는 실험관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뺨을 내리치는 소설에 가깝다.(물론 푸줏간과 경찰관은 콘레드의 소설에 나오는 것이지만.)

 

단점이 있다면, 수록된 단편의 수가 많다보니 한꺼번에 읽으면 약간 버거워지고, 세상이 싫어지고, 그냥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가 몰려오게 된다는 점! 하나하나 따로따로 보는 미덕이 필요하다. 나는 하루에 6-7편씩 읽었더니 나중에는 어으어...이런 상태가 되어서 무슨 괴기 독서몬 처럼 책을 읽고 있었다.

 

특히 재미있게 읽었던 단편들을 몇 가지 언급하자면,

 

<좋은 사람은 드물다> <불 속의 원> <인조 검둥이> <추방자> <좋은 시골 사람들> <절름발이는 먼저 올 것이다> <계시>

 

특히 <좋은 사람은 드물다>와 <절름발이는 먼저 올 것이다>가 가장 인상 깊었다. 인간의 이성, 사회에 팽배한 믿음, 사람에 대해 문명이 전제하는 것들을 모두 비웃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당연히 응당 사람이라면~해야지! 하는 생각을 뒤집는 솜씨도 일품. 기독교에 대한 부분도 그렇고, 사람에 대한 부분 자체에도 공감 가는 구석이 많았다. <추방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사람들이 미국에 일꾼으로 오게 된 상황을 다뤘는데, 인간의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겹의 사람(이 개념을 뭐라 해야할지. 서벌턴이라고 말하기는 적절치 않은데..), 그 층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던 소설이다. <계시>도 마찬가지.

 

읽으면서 계속 함께 생각났던 다른 작품들이 꽤 있는데,

먼저 <케빈에 대하여>와 <다섯번째 아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이 그저 존재하는 '악'과 같은 아이와 사회화된 사람 사이를 다룬 두 명작이 계속 떠올랐고,

조지프 콘레드의 <어둠의 심연>(영화화한 <지옥의 묵시록>도) 역시 간간히 생각이 났던 것 같다. 

 

최근 읽었던 한국 단편 소설로는 김영하 작가의 <아이를 찾습니다>를 같이 읽어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그러고보니 김연수 작가가 이 오코너의 소설 중 <좋은 사람은 드물다>를 추천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음, 확실히 읽어봄직 한 소설. 내가 느끼기로는 현대소설 중 오코너의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작품은 정말 많은 것 같다. 다만 오코너처럼 표현하는 작품은 오코너의 것일 뿐. 그리고 그건 어떤 작품 간의 우열의 문제는 아닐테다.

 

벅찼던 독서량에 부지런한 독서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준 책에 감사를 표한다. 흑.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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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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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가 있다. 또렷한 것도, 희미한 것도 아닌데 그저 어떤 감각, 느낌으로 남아있는 기억들이 머리 속에 도시의 밤안개처럼 올라오는 순간. 무슨 말을 했는지, 왜 그렇게 되었던 건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초가 사라져도 그런 기억들은 감각으로 남는다. 그때는 좋았지, 그땐 불쾌했지, 그땐 그랬지. 그런 기억의 순간순간들이 '왜' 그러한 방식으로 남게 되었는지, 왜 그렇게 이루어졌는지를 논리적으로 완전하게 설명하는 일이 가능할까? 혹은 필요할까?

 

신간평가단의 첫번째 도서,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트릭 모디아노의 지평은 이러한 질문을 천천히 탐색해 나가는 소설이다. 당연히, 추리소설처럼 모든 일이 깔끔하게 해결되거나 이성적으로 이해되도록 설명되지 않는다. 사실 그때 그의 마음은 이러했어, 저러했어, 그녀와 그 사이에는 이런 일이 있었어. 모디아노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건너뛰고, 생략하고, 단지 그나 그녀가 그때 어떻게 '느꼈'는지를 말한다. 부아야발을 대하는 마르가레트에 대해 얘기하는 것처럼.

 

마르가레트가 그토록 부아야발을 두려워할만한 충분한 이유는 소설에 제시되지 않는다. 도리어 마르가레트의 기억 속 부아야발은 어딘가 좀 순박한 양아치 청년처럼 보인다. 그래서 부아야발과 마르가레트, 그리고 바게리안이 펼치는 삼중주같은 장면에서, 그는 한 인물이라기 보다 일종의 상징, 원형처럼 느껴진다. 밤기차 같은 삶을 사는 마르가레트를 늘 쫓아다니는 불안 그 자체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아야발은 그 시대, 단절적이고 불안한 삶을 살던 사람들에게 늘 붙어있던 불안 그 자체를 보여주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삶을 계속 뒤쫓아오던 특정한 불안은 상대방을 '잊어' 버린다. 부아야발이 그의 그녀를 잊어버리듯이. 모디아노는 사라진 기억, 불안정한 기억과 하나의 가능성이던 과거의 순간순간을 다룬다. 모호하게, 그러나 매력적으로. 알 수 없는 과거와 미래의 불안정성이 그에게는 하나의 지평 그 자체인 듯 하다. 실제로, 보스망스는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더 알려하지 않는 편이 낫다. 적어도 의혹이 있는 한 아직 일종의 희망이, 먼 지평을 향한 탈주로가 남은 것이다. 세월이 아직 파괴의 작업을 다 마치지 않은 모양이니 만남은 또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p.153)

 

그래서 일까. 마르가레트를 찾아가는 보스망스의 여정이 과연 성공할까, 의문이 드는 것은. 무엇보다, 호텔에 어떤 울림을 남기고 간 그의 그녀가 보여주는 서사에 '보스망스'는 별 비중이 없다. 바게리안과 부아야발만이 선명할 뿐이다. 마르가레트를 찾아갔을 때, 부아야발이 그랬듯이 그녀가 "기억이 안나는군요."할 확률이 아주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기억이 한 개개인의 것이라는 점은 이럴 때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이런 기억의 문제와 더불어, <지평>의 탁월한 점은 불안정한 청춘의 내면을 덤덤하게 묘사하는 데서 드러난다. 마르가레트의 삶이 특히 그렇다. 항상 짐을 쌀 준비를 하고 어딘가에 잠시 체류하다가 떠나는 삶을 살아가는 그녀. 보스망스 역시 그녀와 비슷한 삶의 맥락을 공유하지만, 그는 머물며 떠도는 사람이고, 그녀는 정말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 둘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사회의 중산층 및 교육받은 자들 앞에서의 열등감, 묘한 원죄의식, 그리고 단절감 그 자체다.

 

 

모디아노는 이런 인간상들의 내면을 지나치게 격렬하지도, 지나치게 건조하지도 않게 그려낸다. 변호사 집안의 아이를 돌보면서 생겼던 일, 부아야발에 대한 마르가레트의 태도, 보스망스의 독백 등에서 이 내면들이 간간히 드러날 때면 눈길에 찍힌 발자국 처럼 이상하게 바라보게 되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중 압권은 단연코 다음과 같은 비유였다.

 

인생의 다른 시절에 비해 우연과 허무가 더욱 크게 작용하는 짧은 만남들, 밤기차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처럼 내일이 없는 만남들, 그가 젊었을 적 탄 밤기차에서는 승객들 사이에 일종의 친교가 이루어지는 일이 잦았다. 그래, 우리는, 마르가레트와 나는 끊임없이 밤기차를 탔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그 시절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혼란스러웠고, 서로 아무런 연관 없는 무수한 짧은 장면들로 뚝뚝 끊겼다......(p.162)

 비단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의 삶 뿐만이 아니라, 현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 느껴봤을 법한 정서.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친해지는 척하고, 그러다보면 어딘가 공허하고, 내 외양, 내가 꾸며내는 모습만을 나눠주게 되고... 그러다가 '산다는 게' 하게 되는 마음이 고스란히 여기 담겨 있는 것 같다. 이 밤기차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면 마음을 뺏기지 않았을 텐데, 탁월한 문장은 그토록 힘이 세다.

 

뒷부분의 짧은 평을 읽어보자니 모디아노 소설 중 '지평'처럼 밝은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이 별로 없다고 한다. 집에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있는데, 아직 읽지 못했다. 비슷한 작품일지, 또 비슷한 듯 아주 다른 작품일지 기대가 크다.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번역에 있어서 너무 옛날 말 같은 느낌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외국정서가 가끔씩 뚝뚝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금지옥엽, 사면초가, 궁륭 같은 표현을 조금 더 풀어서 써주면 좋을 것 같다.

 

같이 읽으면 좋을 법한 책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분위기도, 주제의식도 조금씩은 다르지만 이상하게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던 작품이다. <지평>보다는 대중적이면서도 주제의식을 놓지 않는 치밀한 소설. 자세한 개인 리뷰는 http://hen2003.blog.me/220230326385에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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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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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내가 폭력에 무뎌진 것을 느낀다.

 

타자를 향한 어마어마한 폭력에 무뎌지고, 나를 향한 사소한 폭력에 날이 갈수고 예민해지는 것을 느낄 때마다, '놀란'다고 표현하고 싶은데, 그마저도 거짓말이다. 이제 나는 무뎌진 나에 대해 무뎌진다. 20대, 무뎌지기엔 너무 이른 나이인데도.

 

무뎌진다는 건 내 밖으로 견고한 성을 쌓는 것과 같아서, 그 어떤 충격적인 일도 그 밖에 놓고, 내 마음이 요동치려고 하면 붙잡고, 붙잡고, 아예 허물어질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는 묘한 옹고집이 되어가는 느낌을 들게 한다.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건, 때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허물어지고 싶은 나에게 침투해올 수 있는 것이 문학, 이야기, 말이기 때문이다.

솜씨 좋은 사람이 전하는 폭력의 폭력성 앞에서, '무뎌졌다'는 감각은 때로 씻은 듯 사라진다. 언제나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뒤로 숨기 바쁜 나같은 소시민을 밖으로 나서게 하는 힘이 문학에, 소설에, 이야기에 있다고 나는 '문학의 종언'이 온 이 시대에도 끝끝내 항변하고 싶다.

 

 

 

광주 5-18 민주화항쟁을 다루고 있는 <소년이 온다>는 바로 그런 책이다.

폭력에 익숙해지지 않기를, 폭력을 목도하고 체념하는 데 익숙해지지 않기를, 그리고 폭력이 계속해서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기를 요구한다.

 

 

책의 뒷 부분, 평론가 신형철은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소재는 그것을 택하는 일 자체가 작가 자신의 표현 역량을 시험대에 올리는 일일 수 있다. 한국문학사에서 80년 5월 광주는 여전히 그러할 뿐 아니라 가장 그러한 소재다. 다만 이제 더 절실한 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응징과 복권의 서사이기보다는 상처의 구조에 대한 투시와 천착의 서사일 것인데, 이를 통해 한국문학의 인간학적 깊이가 심화될 여지는 아직 많다. <소년이 온다>는 한강이 쓴 광주 이야기라면 읽는 쪽에서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고 각오한 사람조차 휘청거리게 만든다."​

신형철은 이 추천사가 흔한 주례사비평처럼 들릴까 염려했다. 요즘 어떤 책이든 뒷 편에는 어마어마한 추천사가 붙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염려는 지당하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를 읽은 후, 독자는 신형철의 말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견의 측면이 아니라 가치의 측면에서 그렇다.)

 

-한강 작가님은 어째서 글씨체마저 이다지도 한강스러운가. 홍대여신 한희정과 함께 했던 <소년이 온다> 북콘서트에서 받은 싸인.

 

 

굳이 따지자면 <소년이 온다>의 소년은 당시 중학생이던 동호다. 소설은 시종일관 동호와 동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도, 화자를 동호로 세우는 법은 없다. 가장 먼저 나오던 1장에서, 화자는 언뜻 동호인 듯 하나 동호를 '너'라고 지칭함으로써 동호를 관찰하는 시선을 만들어낸다. 그 이후 2장에서 동호가 찾아다니던 동호의 친구 정대의 시점이 나오고, 계속해서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의 시점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에필로그는 이 모든 것을 정리해 광주 피해자들의 사후 심리분석을 하고 있는 한 학자의 시점이 된다. 그 모든 시점들이 광주가 특정 개개인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그 폭력성의 진한 흔적을 보여준다.

 

단순히 한국 근대사의 비극이라 할 수 있는 광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후로 이어지는 폭력의 기나긴 연결고리들, 그것이 사라지게 한 사람들의 앳된 얼굴이며 버릇을 하나하나 짚어내는 시선을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이미 없어진 것들을 허구적으로라도 복원해내며 끊임없이 독자를 자극하고, 고통스러움에도 생각하게 만들게 하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런 생각을 들게 하는 세세하고 아름다운 글이 이어진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26년처럼 전두환을 단죄한다는 서사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화려한 휴가>처럼 그 당시의 정황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지도 않는다. <소년이 온다>에서 대부분의 이야기는 마치 인물이 직접 과거를 회상하며 말하는 것처럼 진행된다. 혹은, 이미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이야기로 진행이 된다. 당시 그 시각에 서 있던 인물을 묘사하는 것은 1장이 유일하고, 이후에는 전부 기억의 서사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기억은 아직도 현실처럼 생생해서, 결국 인물들의 현재 이야기가 된다. 5.18의 기억이 마치 체르노빌처럼 지속적인 영향을 피해자들에게 미치고 있다던 작품 속 인물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 폭력은 단발성이 아니다. 피폭처럼 이어지고, 때로는 삶을 지배하고, 때로는 삶을 포기하게 한다.

 

작품 내내  광주의 기억과 흔적은 누군가의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책을 읽는 일반 독자들이 까먹고 있음에도, 광주는 누군가에게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삶이다. 비단 광주 만이 아니다. 가해자들이 잊어버린, 혹은 타인들이 잠시 보고 넘긴 폭력은 누군가에게는 현재형의 삶, 현재까지 지속되는 시간의 흔적이다.

 

 

당신의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p.99)

소설이 시종일관 집중하는 인물들은 모두 동호의 죽음에, 정미의 죽음에, 종대의 죽음에, 결국 누군가의 죽음에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누군가 말한다 한들,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그 감정이 사라질리 없다. 김밥을 먹고 집에 가라고 했으면 동호가 살았을지, 그때 가서 억지로라도 끌고 와야 했던 것인지, 총을 맞고 쓰러진 친구를 보고서도 달려가지 못한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광주 이후 이런 것을 내내 삶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책 속의 인물들이다.

한강의 인물들은, 영혼은 유리 같은 것일까, 하고 묻는다. 영혼이 유리라면 그때 그 순간에 깨어졌다고 말한다. 그런 자들은 계속해서 깨어진 유리​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광주를 겪은 사람들의 삶의 모든 순간에, 광주는 끼어있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들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p.207)

<소년이 온다>의 광주는 곧 '힘으로 눌린 모든 것'이다. 그래서 비단 5.18뿐만이 아니라 힘으로 눌려 으깨진 것들, 폭력에 압사당한 것들 모두가 곧 광주가 된다. 그 광주를 만드는 것은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다.​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원시적인 폭력은, 박정희에게 내뱉었다는 차지철의 말에도, 전두환의 행보에도, 광주에 내려온 계엄군에게도 숨어있다.

 

 

<그리고 책은 묻는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중략)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하지만 이렇게 묻는 동시에, <소년이 온다>는 말한다. 그 중에 우리에게는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으며, 희생자로 분류되지 말아야할 사람들이 있다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마주해, 한강이, <소년이 온다>가 내는 목소리는 다음과 같다.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p.213)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한강이 '존엄하지 못한' 인간을 직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작가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지 않는 존재에 대해 이런 글을 쓰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도 <소년이 온다>에서는 그런 내음이 난다.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 냄새 같은 것, 어릴 때 안고 자던 엄마 옷처럼 따뜻한 것, 품어주는 것, 그런 냄새. 그 서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말이다. 나는 그 '이렇게 하자'라는 <소년이 온다>의 제안과, 그 제안 뒤에 숨어있는 듯한 따뜻함이 좋았다. 내가 이전까지 한강의 책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책을 읽으며 많이 울었다. 특히 6장 <꽃 핀 쪽으로>는 계속 울며 봤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후에 알게 된 건데, 언제 읽어도 울게 되고, 심지어 가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불현듯 나이드신 어머님들을 보며 떠올려도 울게되는 대목이다. 광주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 나오는 장에서는 인간의 잔혹성에 놀라고, 광주가 남긴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아직 '생각'이었지 '공감'에 이르지 못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6장은 내내 마음으로 읽었다. 그때 데리고 왔더라면, 그때 그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그때 하숙생을 받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랬더라면, 하는 후회와 죄책감이 얼마나 짙게 평생을 따라다녔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런 생각과 함께 어두운 쪽을 걷고 있던 엄마를 밝은 쪽으로 이끌어주는 동호의 환영을 보며 더욱 더.

생각했다. 광주는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하지만, 광주에 버금가는 폭력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내 생에 직접 닿는 일이 아니라고 해서 내가 외면하고 있던 광주가 어쩌면 이미 내가 살던 세계를 몇번이나 건드리고, 건드리고 갔을 것이다. 그런 폭력에 대해 '응시한다'는 행위가 적절할까 생각하면서도, 응시하기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설핏 든다. 나는 세상의 모든 광주를 볼 수 있을 만한 사람일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으면서도 무섭다.

 

이 글을 쓰는 순간, 알라딘의 메인에는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올라와있다. 세월호와 광주는 다르게 분류되어야 할텐데, 내 마음 속에서는 엉켜 쉬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책을 읽고 난 후 가장 많이 떠오르던 구절과 함께 글을 마친다.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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