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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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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최근 부커상을 수상한 작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한국에 가장 잘 알려졌을 작가, 줄리언 반스. 영국문학에서는 입지가 탄탄한 작가라고 하는데, 나는 <예감은~>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작가였다. 이번 작품이 내가 읽은 그의 두번째 작품이다.

나는 <예감은~>을 매우 재밌게 읽은 독자 중 한명인데, 그래서 앞으로도 아마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쭉- 찾아 읽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 이런 식으로 한 작품이 재미있으면 다음 작품을 읽고, 혹 그래서 실망하면 더 이상 그 작가의 소설은 읽지 않는 것이 내 못된 버릇인데, 다행히 줄리언 반스는 앞으로도 꾸준히 읽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단 <용감한 친구들>이 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다른 필명으로 추리 소설을 내는 작가이니 만큼, 줄리언 반스가 셜록 홈즈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의 생애와 조지의 삶을 다루기도 결정한 것은 놀랍지 않았다. 반스는 <예감은~>에서도 묘한 트릭을 계속해서 사용하면서 서사를 긴장감 있게 끌고 가는 미덕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용감한 친구들>은 사실 그 묘한 장르적 쾌감, 트릭과는 살짝 거리가 멀다. 이 소설은 분명 조지 에들지 사건을 다루지만, 그 사건이 중심이 아니라 홈즈와 조지의 삶이 중심이고, 거기 잠시 사건이 삽입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조지는 성실하고 올바른, 다소 고지식한 영국 성공회 목사의 아들이며, 홈즈는 어릴 적부터 기사도 정신과 어머니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을 지켜온 백인이다. 작품이 '용감한 친구들'이라는 제목을 취하고 있음에도, 이 둘은 1권이 끝날 때 즈음 되어서야 겨우 한 번 교차하고, 2권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만난다. 그나마도 대단한 우정을 나누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소개하면서 에들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란 굉장히 어려운데, 분명 일대기적 서사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그 사건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며, 그 사건을 논의하지 않고 정리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의 주인공 중 한명인 아서 코난 도일은 워낙 유명하지만, 또 다른 주인공 조지에 대해서는 간략한 설명이 필요할 듯 하다. 사실 나처럼 꼼꼼하지 못한 독자라면, 조지의 정체를 처음부터 단번에 알아차릴 수는 없다. 조지는 매우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씀, 교회의 말씀을 가장 옳은 것으로 내면화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가는 아이다. 그의 시점으로 서술된 부분부분에서 그는 언뜻 조금 이상한 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사교성이 없고, 긴장을 쉽게 한다. 무엇보다 주변에는 그를 빈정대는 아이들, 놀리는 친구들이 너무 많고, 그는 특별한 이유가 없이 외톨이인 것처럼 보인다. 서사가 진행되면서 차츰 독자는 그가 왜 외톨이인지 알게 된다. 그것도 조지의 발화를 통해서는 아니고, 조지가 서술하는 타인의 반응을 통해서 알게 되는 식이다. 이를테면, 조지를 놀리던 동료 중 하나는 햇볕 아래에서 탄 자신의 팔을 조지의 팔과 비교하며 이제 똑같아졌다는 식의 반응을 한다. 그에게 '진짜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이런 발화를 통해 독자는 천천히, 조지가 백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지는 인도계의 피가 섞인 영국인, 흔히 말하는 '튀기'다.

 

<용감한 친구들>은 이 조지가 그의 마을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 가축 살해 사건의 가해자라는 누명을 쓰게 되고, 3년 간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는 사건을 보여준다.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마을을 담당하는 경찰들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판결과 배심원 역시도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조지는 3년을 복역하다가 이유 모를 감면을 받아 출소하고, 조지의 사건을 알게 된 아서를 만나게 된다. 눈이 좋지 않은 조지와 달리 보는 것을 중요시 하는 아서는, 조지를 보자마자 "나는 당신이 무죄라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둘은 함께 사건에 대한 보상을 받아내기 위해 애쓴다.

 

만약, 일반장르소설이나 청소년 성장소설이었다면, 아마도 이 둘, 서로 너무나도 다른 둘은 서로에게서 장단점을 배우고 성장하고, 둘도 없는 파트너가 되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줄리언 반스의 소설이다. 작가는 둘이 얼마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보여준다. 아서의 행동이 조지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조지의 행동이 아서에게 어떻게 해석되는지가 번번이 교차된다. 덕분에, 독자는 조금 객관적인 위치에서 둘을,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마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주인공과 그가 듣는 베로니카의 진술, 그리고 그가 보낸 과거의 기록물들이 나타나면서 주인공이 객관적으로 보이듯이 말이다. 줄리언 반스의 매력이라면 매력이고, 묘한 단점이라면 단점일텐데, 사실 그런 그의 태도 자체가 누구보다도 문학적이다. 계속해서 균열을 제시하는 그의 방식을 나는 좋아한다.

 

비록 두 책 밖에 읽지 않았지만, 하나의 말이 어떻게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는지, 같은 사건에서 누구는 무엇을 보았고 또 다른 누구는 무엇을 보았는지, 진실은 무엇인지,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우리의 요소들을 감안할 때, 역사라는 것, 기록이라는 것, 판결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지를 반스는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개인적으로는 <용감한 친구들> 보다는 <예감은~>을 더 즐겁게 읽었고, 그 책이 좀 더, 마치 논문 쓰듯이 책을 쓴다는 반스다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용감한 친구들>은 실제로 아서 도일의 편지와 실제 사건, 조지라는 인물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독서 전의 흥미는 <예감은~>보다 조금 더했던 것 같다. 영국이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홈즈라는 인물의 창조자, 아서 도일이 가진 인간적 특징들을 반스보다 객관적으로 제시해줄 작가를 찾기는 아마 힘들 것이다. 흥미로운 건, 비록 반스가 그토록 도일의 여러 면(이를테면 외도와 같은)을 숨기지 않으며 소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던' 코난 도일이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으로 느껴진다는 거다. 물론 조지가 보여주듯이, 그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사람 나름이겠지만.

 

아쉬웠던 점은, <예감은~>에 비해서 책장을 덮고 난 후에 온 전율이 덜했다는 것. 반스의 냉정한 시선이 때로는 조금 더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인종적 편견의 문제점이라던가, 여성 참정권에 대한 시대적 견해의 문제 등의 힘을 약하게 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독자가 조지의 문제에 공감하게 할 수 있었는데, 바깥에서 떠도는 관찰자에 멈춘 느낌이 없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반스의 시선인가 싶기도 한데, <예감은~>이 어떤 확정적 단언이었다면, <용감한 친구들>은 반스 스스로에게도 일종의 물음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하는, 작가 스스로에게도 풀리지 않는, (그리고 아마 사람이 독립적인 개체임을 감안한다면) 풀리지 않을 물음 자체를 던지는 작업이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그런 점이 여러모로 아쉽다. 반스의 작품을 조금 더 읽어보고 싶은데, 개중에서도 그가 무언가를 뜨겁게 외치는 작품, 혹은 아주 들끓지는 않더라도 무언가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하는 작품을 조금 보고 싶다. 이 정도로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무언가 외치는 힘을 함께 가지게 된다면 참 좋은 작품이 나올텐데,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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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요새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는지, 이것저것 자꾸 잊어버리고 만다. 이 젊은 나이에 벌써 이러면 안되는데, 싶다가도 진지하게 스마트폰과 노트북이 내게 조기치매를 유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 정도다. 아무튼, 신간평가단을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은 일 같은데, 어제 마지막 2015년 전반기 마지막 신간평가단 도서가 발송되어와서 매우 놀랐다! (이번 단 소설 분야 신간평가단으로서의 한마디 심경 고백: "행복한 고민;") 신간페이퍼도 이번달 상반기로는 마지막 ㅎ_ㅎ 그럼 5월에 나온 책을 한 번 살펴볼까.

 

 

(1) 2015년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윤이형이 받았구나!!!! 한번 뭐가 있나 볼까, 하자마자 이 책이 튀어나오니 너무 반갑고도 좋다. 윤이형 특유의 sf적인 상상력과 그 차분한 문체, 분위기를 좋아한다. 이외 수상후보에 올랐던 작품들도 모두 쟁쟁해보이는데, 읽어보고 싶다. 사실 <이상문학상> <젊은 작가상> <문지문학상> 등등 여러가지 상이 있는데, <문지문학상>은 꼭 젊은작가상 만큼이나 젊은 느낌이 든다.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이런 쪽과는 좀 느낌이 다른데, 나는 좀 더 파릇파릇한 쪽이 좋다. 윤이형이 그 중 특히 좋은 이유는, 그녀가 우리를 향한 글을 쓰기 때문이다. 나는 소수를 위한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면 난 소수가 아니기 때문에.^_ㅜ

 

 

 

 

(2) 칠드런

현재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구병모라면, 중학교 시절 제일 좋아했던 작가는 이사카 코타로. <골든 슬럼버> <마왕> 등으로 유명한 작가이리라 생각되는데, 사실 대부분의 작품이 재미있다. (물론..모든 작가가 그렇듯...폭탄도 있다) 코타로의 작품은 전부 봐서 사실 이게 그건지 저게 그건지 좀 헷갈릴 수준인데, 아마 칠드런은 안 봤던 것 같다. 그가 보여주는 특유의 유머와 캐릭터, 서로 무관한 듯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로 이어지며 절묘한 반전을 드러내보이는 서사, 모두 좋아한다. 항간에서 b급소설이라 부르는 소설의 작가 중 하나지만, 무언가를 b라고 부를 때 상정하는 A에게는 없는 장점이 이 소설에 있고, 물론 A에게 없는 단점도 이 소설에 있다. 재밌고 경쾌하니 좋다!

 

 

 

 

(3) 한국이 싫어서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딱 하나. 제목이...요즘 나의 심정이다 ^_ㅜ

엄청난 작명센스...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 이 책...6월에 잘 팔리지 않을까...?

 

 

 

 

 

 

 

 

(4) 트렁크

 

 

새로나온 김려령의 신간. 학교에서 창비 10% 세일전을 하기에 살까말까살까말까살까말까 하다가 결국 사지 않고 돌아섰었는데, 이렇게 보니 또 가지고 싶다. 김려령의 글은 완득이 밖에 못 읽어봤는데, 완득이가 워낙 재미있었어서 기대가 된다. 확실히 나는 장편소설이 단편소설에 비해 훨씬 좋다. 재미있고. <트렁크>도 그런 의미에서 꽤 기대가 되는 소설. 김려령의 이름은 몰라도 아마 다들 <완득이>와 <우아한 거짓말>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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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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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벌써 1년 전 일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키워온 강아지가 작년 겨울 즈음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나는 13년 정도의 세월을 녀석과 함께 보내면서 참 해주지 못한 것이 많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그 애를 생각하면 생각보다 눈물이 먼저 줄줄 흐른다. 반려동물을 키워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면서도 어쩌면 이해하지 못 하는 감정이 항상 그 애를 생각할 때마다 솟아나는데, 아주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사실, 사람이나 강아지나 움직이는 단백질 덩어리다.(물론 나는 이 말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은 아주 냉정하고 '비'인간적으로 들린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어 분해될 단백질들의 커다란 결합인데, 우습게도 우리는 그 단백질의 결합에게 어떤 감정을 느낀다. 나는 배우가 아닌지라 의도적으로 감정을 연기할 수는 없지만, 이 감정을 순간적으로 생성해낼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알고 있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대상은 더 이상 대상 그 자체가 아니다. 그건 내 세계의 일부이고, 나의 파편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나와 우리 가족은 이미 떠나버린 녀석을 우리 가족의 일부로, 우리가 사랑하기에 어떤 유일성을 획득하게 된 일부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 애가 나의 동생이고, 부모님의 셋째 아이라고 의미화했다. 그래서 결별의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슬퍼졌지만, 사실 이 의미화가 없었더라면 우리와 그 애는 함께 살 수 없었을 거다. (사실 그 애는 문제 덩어리였다.)

 

인간은 그런 동물이다. 우리는 의미를 부여한다. 물리적 세계와 구분되는 이 의미의 세계가 곧 인간, 언어, 문명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살며, 의미가 없으면 죽는다. 인간은 그런 의미에서 참 신기한 동물이다. "왜 사는가?"하고 묻기 때문이다.

덧붙여, 무언가를 의미화해야한다면, 내게 소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수록 더 극적으로, 더 영향력 있게, 더 거대한 무엇으로 의미화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사실 어떤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을 끌어들여 인간은 '그 무엇'으로 만든다.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수도 있는 것에 인간은 이름을 붙인다.

 

오에 겐자부로의 『익사』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사실 이야기할 것들은 너무나 많다. 소설을 잘 이해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잘 이해하지 못한 탓일 테고, 아마도 오독으로 범벅된 독서의 시간을 보낸 탓일 테다. 기본적으로, 『익사』는 사소설적 성격을 가진다. 사실 읽는 내내, 이게 소설인가 오에의 수필인가가 헷갈릴 정도다. 소설 안에 등장하는 주인공 노인은 오에 그 자신이다. 소설은 어떤 사건을 상정하고 그걸 중심으로 기-승-전-결 화 되어 구성되어있지 않다. 보다 정확히, 아마 그렇게 구성되어 있을 테지만 독자에게 진정한 '메인'사건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내보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소설 제목이 『익사』인데, 정작 『익사』소설은 소설의 중반부 정도에 포기 된다. 그리고 새로운 일들이 점차점차 서로 아귀를 맞추어 가면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처음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떠올랐다. 여러가지 형태로 제시되는 온갖 기법들의 콜라주처럼 보였고(극, 일기, 일반 서술, 마치 '다들 알지?'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엘리엇이며 자신의 옛 작품을 제시하는 방법 등), 소설 자체가 『익사』소설이라는 소설을 쓰는(어쩌면 쓰지 않음으로써 쓰는, 그리고 실제로도 바로 그러한) 방식에 대한 일종의 메타 픽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이야기였고, 마치 의식의 흐름과 주변의 신변잡기적인 일이 맞물려 돌아가며, 수핗처럼 느껴지는 일이 잦았다. 한국 소설가 정영문의 『어떤 작위의 세계』가 가끔 이게 소설인지, 작가의 잡담인지 헷갈릴 때가 있는데 꼭 그런 그느낌이었다.

 

그런데 계속 읽으면서, 이 소설은 형식적으로 그러한 방식을 취하고 있을지 언정 사실 의미에 대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물론 이 '의미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은 사실 모든 소설에 적용되는 이야기이겠지만.) 소설에 나오는 다이오씨, 코기토 자신, 그리고 우나이코 및 다른 사람들 모두 계속해서 무언가를 규정해야한다. 아버지의 죽음에서 자기자신까지도. 그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판단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고,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힘을 잃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코기토는 익사소설을 통해 사실 규정해야한다. 그때 나는 무슨 일을 했는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리고 당연히, 그는 그것을 극적으로 만들고 싶다. 무언가 좀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인간이라면 그렇다. 후반부 다이오씨가 보여주는 모습 역시 비슷하다. 그는 그 자신에 대해 나는 어떤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다' '나는 ~한 인간이다'라는 자기 규정이 부재하거나 무너졌을 때, 인간은 휘청거린다. 『익사』에 나오는 모든 인간은 계속해서 해나가기 위해 이러한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매우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진 연극을 하면서 무언가를 '재현'하고 무언가를 보이려 하며, 그게 무엇이었는지(이를테면 우나이코와 큰아버지의 관계에 대한 양 쪽의 시각처럼)를 계속해서 확실하게 하려는 행위로 『익사』는 가득 차 있다. 나로서는 노년의 소설가가 아직까지 이런 물음을 던지고 치열하게 탐구할 수 있다는 게 놀랍게 느껴지는데, 소설 곳곳에서 보이는 노인의 심경에 대한 묘사가 이런 놀라움을 좀 더 강하게 만든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나이의 사람도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물어야 하는 구나, 싶은 마음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소설은 그 자체로 오에가 '나는 누구인가?'를 돌아보고, 의미화하려고 쓴 소설처럼 느껴진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뒤에 서서 재현하고 그려보면서 '그것은 무엇이었는가'를 묻는 과정의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안타까운 점은, 그런 방식으로 소설을 썼다보니 접근성이 지나치게 떨어진다는 데 있다. 일본소설을 번역한 것이라 더욱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이를테면 쇼와정신, 메이지 정신 등등의 단어는 확실하게 알아듣는 데 어려움이 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일본에서 만연해있던 분위기, 그 때 사람들의 반응 역시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물론, 그 상상하기 어려운 것을 체험 시키는게 세계문학의 묘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정리하면서도, 사실 이게 오독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할 정도로 어려운 책이었다. 지난한 독서의 과정이었다고 말해도 과장이 없을 것 같다. 일부러 뒤에 붙어있던 해설은 읽지 않았다. 아마 그것을 읽는다고 해도, 내가 직접 읽고 이것이라고 규정한 생각과 다르다면 내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 식으로 읽은 『익사』는 참 어딘가 쓸쓸하다.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헤매는 사람들의 몸부림 같은 기분이 든다. 최근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꽁치의 맛>을 보며 느꼈던 쓸쓸함과 좀 비슷한 맛이 나는 것 같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넘어 모든 인간에게 통용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일본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신기한 일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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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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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개인의 취향이라는 것이 얼마나 한결같고 강력한 것인지를 종종 느끼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내게는 너무 좋은 나머지 옳아보이기까지 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종류의 선호일 수 있고, 그 역도 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이성과 감정이 도통 쉬이 일치하지 못 하는 탓에 늘 내가 좋아하는 걸 남이 좋아하지 않으면 그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고, 아, 그건 아니지, 하고 반박하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주 삐쳐버리는 시간을 꽤 많이 겪었다. 어떤 친구든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됐다. 아, 이 친구는 이걸 좋아하겠구나, 이건 좋아하지 않겠구나.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어떤 친구든 좋아하지 않을 만한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에 이르렀는데, 그 결과 내가 주변에 널리 알리지 못한 비운의 작가 중 한 사람이 바로 '구병모'다...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 내 지인 중 나와 책에 대해 이야기 해본 사람이라면 내가 구병모 작가를 좋아한다는 걸 누구나 다 안다. 남들이야 좋아하건 말건, 일단 한국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항상 내가 구병모의 책을 추천했으며, 간간히 sns로 그녀를 향한 사랑을 고백한 탓이다.

 

사설이 길었는데, 조금 더 사설을 이어가보자면, 그런 까닭에 나는 구병모의 작품을 거진 다 읽었다. 2009년 창비 청소년 문학상 <위저드 베이커리>로 등단한 이후, 구병모는 주로 장편 소설을 많이 집필했다. <아가미>, <피그말리온 아이들>, <방주로 오세요>, <파과> 등등이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이 장편소설군 때문에 구병모를 좋아했던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위저드 베이커리> 이후 구병모의 장편소설은 하향세였다. <피그말리온 아이들>과 <방주로 오세요>는 물론이요, 최근작 <파과> 역시 <위저드 베이커리>가 주었던 그 느낌을 전달하지 못 했다. <아가미>는 신선했으나, 그 역시 특출나지 않았다. <위저드 베이커리> 역시 5번-6번 정도 읽었는데, 사실 서사, 사건적 측면 보다는 그 결말과 소설 속에 숨은 시니컬함에 미덕이 있는 그 소설은 '앞으로의' 전망을 기대하게 하는 것이었지 그 자체로 역작은 아니었다, 라고 조심스레 생각한다. (물론 나는 <위저드 베이커리>를 정말 좋아하지만 말이다.)

 

이런 판단을 내린 나를 확, 그녀의 세계로 끌어간 건 구병모의 첫 단편집 <고의는 아니지만> 이었다. 많이 알려진 책은 아니지만 그 책 속 단편들 하나하나가 내보인 그녀의 서늘하고도 다정한 시선은 굉장히 인상깊었다. 그 이후 문예지에 실린 '학문의 힘'이나 문지문학상 수상후보에 올랐던 '이창' 역시 찾아 읽었고, 그녀가 내뱉는 단편의 호흡이 나와 굉장히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구병모의 두번째 단편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애타게 기다렸던 건 그 이유가 크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총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있고, 끝 부분에 윤경희 평론가의 평론이 더해져있다. 단편집이 으레 그러하듯, 이 단편집의 구성마저도 사실 '문학적'인데, 첫 단편과 끝 단편의 제목만 보아도 그 사실은 쉽게 유추되어질 수 있다. 처음을 여는 작품의 제목은 이렇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그리고 마지막 작품의 제목은 '어디까지를 묻다'다. 처음에는 어디론가 계속 올라가고 싶어하던 친구의 장례식장에 간 화자를 세워 책을 열고, 점차 이기적인 사람들의 행태와 속내를 보여주는가 싶더니, 뒤로 가면 갈수록 그 어조에 묘한 힘과 동정, 의지 비스무리한 것이 실린다. (사실 이것을 '의지'라고 말하기는 참 그렇다.) 조금씩 작가의 어조가 따뜻해지는데, 그 마저도 아주 직접적이지는 않다.

 

구병모는 <고의는 아니지만>에서부터, 그리고 그녀의 장편 내내 그래왔듯 묘하게 환상적이고 장르적인 소재를 잘 사용한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특히 이 소재를 고대, 혹은 원형적 소재와 잘 겹쳐 이용하는 듯 하다. <파르마코스>나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이 특히 그렇다. 고대 그리스에서 나온 희생양, '파르마코스'라는 개념을 일종의 신데렐라 이야기와 겹쳐 만들어낸 전자도 그렇지만, 사실 이 단편집 전체를 통틀어 내가 가장 재미있게 봤던 소설은 <덩굴손 증후군의 내력>이다. 인면수라는 소재는 나 자신도 습작을 하며 썼던 것이고, 이토 준지의 만화에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나 구병모가 이 단편 소설을 통해 보여주는 인간 나무에 대한 시선은 꽤 독특하며 다정하다. 결국, 내몰리고 내몰리고 참고 참던 사람들이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일상 속에서 덩굴이 된다. 아주 소수만이 그들을 돕는다. 그들을 베어내는 하청 업자들마저도 결국엔 그들이 되지만, 거대한 자본은 여전하다. 백화점은 망하지 않는다.

 

소설집은 뒤로 갈수록 점점 몰입도가 더해져 가는데, <덩굴손>, <어디까지~>를 보면 사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가 앞에서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치 한강의 <소년이 온다> 후반부 같은 느낌? 작가의 열정, 그로테스크한 광경 속에 묻어둔 인간적 온기와 의지가 돋보이는 대목들이다. 요 근래 워낙 세상이 뒤숭숭해서 인지, 마음에 콕콕 박혀와서 나를 돌이켜보게 하는 구절이 꽤 많다. 몇 군데 인용해보자면 이렇다. 해고 되고 실직 당한 사람들의 몸에서 덩굴이 자라나 도시를 뒤덮는다는 <덩굴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보기에 좀 불편해 그렇지, 못 본 척하고 가만있으면 지낼 만은 합니다."

되도록 고개를 들지 않고, 저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면, 거기에 비도 내리지 않는다면, 뜻있는 누군가가 매일같이 수백여 톤의 물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시들어 떨어지므로. (중략) 윗선에서는 겨울이 찾아와 메마른 강풍이 세상을 덮치고 눈이 쌓이면 소강상태로 접어들리라 기대하는 모양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으로, 궁극적으로는 이 도시에 그리 변할 마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는 날일 터다. 이유가 제 발로 사라져 줄리는 없으니, 사라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유를 품은 사람이어야 한다.

-<덩굴손증후군의 내력>p. 239

 

 

언뜻 시니컬한 현실비판처럼 읽히는 이 뒤로, 방금 전까지 함께 얘기하던 사람이 덩굴이 된 것을 본 주인공 U, 본인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진 그녀가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

 

 

어떤 선명한 연민이나 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람이 거기 있기 떄문에 U는 무심결에 그리로 손을 들어 올린다. 이어서 닿는 순간 손가락에 감겨 오는 줄기들의 감촉을 느끼지만 그는 잡아채지 않고 그대로 버티어 선다. 그들이 건네고 싶어하는 말은 기껏해야 한 장짜리 고막의 떨림이 아닌 온몸을 써서만 들을 수 있는 그 무엇 같다.

-<덩굴손증후군의 내력> p.240

 

구병모의 이 은근한 시선, 이 묘한 따뜻함이 앞서 나온 모든 그로테스크한 광경 속에 묻어있다. 섬뜩하면서도 어딘가 '섬뜩하므로' 다정한 구석이 그녀의 매력이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아마도 <고의는 아니지만> 이후 내가 가장 아끼는 구병모의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데, 흔히 판타지 세대라고 불리는 현재 20대가 은근히 이 작가를 잘 모른다는 점이 항상 참 아쉽다. <파과>의 뒷면, 평에는 구병모가 항상 '새롭다'라고 적혀있다. 적확하다. 그녀의 스타일은 유지되지만, 글은 항상 조금씩 바뀐다. 여기 저기를 넘나드는 솜씨가 수려하다. 그 탓에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 역시 명확하지만, 그녀가 내는 장편소설을 보면 스스로도 그런 점을 조금씩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점점 글이 좋아져서 뗄 수 없는 작가, 언젠가 '구병모' 하면 모두 '아~'하고 알게 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언제나 응원한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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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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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류.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선정도서 소식과 함께 와서 반가웠던 마음도 잠시, 책을 받아보기 전까지는 걱정이 앞섰다. 나는 사실 일본 소설을 많이 읽지 않고, 그 중에서도 일본 본격문학작가라고 할 수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 오에 겐자부로(하루키와 그를 병렬로 배치하면 그가 화를 낼까..?)의 소설은 정말 거의 읽어본 적이 없다. 오죽하면 나는 근 10년간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외국작가라는 하루키의 작품 중 당당하게 '읽었다'라고 말할 만한 작품이 없는데, 너무 어릴 적에 읽어서이기도 하고, 나이가 들자 괜히 피하게 되어서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라카미 류'를 알고 있었다.

 

그를 알게 된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인 삼촌을 통해서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에게 삼촌은 당신의 서재를 아낌없이 개방해주셨는데, 그 서재 한 구석에 꽂혀있던 책이 무라카미 류의 '이비사'였다. 지금에야 이비사(=이비자)가 뭔지 알지만, 당시만해도 나는 그 말이 주는 왠지 모르게 하늘하늘한 어감과 하얀 날개가 그려져 있는 책의 표지를 보며, 아 이건 어떤 부드러운 소설일까 생각했더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삼촌 당신께서도 그 책을 무라카미 하루키와 혼동한 탓에 가지고 계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하루키의 책이 아님을 알고 읽지 않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데), 왜냐하면 내가 그 책을 가져가는 것을 방기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라카미 류의 장편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의 소설은 매우 난폭하다. 사실, 그 텍스트 자체에 어떤 문학성이 깃들어있는가,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떠나 나는 이비자를 나에게 '레즈비언 섹스' '게이 섹스(강간)' '쓰리썸' '레즈비언 쓰리썸+코카인' 등등의 여러가지 조합이 가능함을 알려준 소설로 기억하고 있다.

 

서론이 길었는데, 아무튼 이런 어릴 적 기억 탓에, 아 대체 '55세부터 헬로라이프'라는 이 명랑한 제목을 달고 이 작가가 또 무슨 섹스와 퇴폐의 향연을 선보일까 생각했었는데, 생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펼쳐져서 놀랐다.

 

소설은 총 5가지 중편, <결혼상담소>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 <캠핑카> <펫로스> <여행도우미>로 이루어져 있다. 제목에 충실하게, 각각은 중/장년 나잇대의 주인공들을 다룬다. 그들은 각각 그들의 나이에 일어날 법한 문제로 곤경에 처해있다. 이를테면 <결혼상담소>의 주인공은 남편과의 황혼이혼 후 결혼정보업체에 다니고,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주인공은 퇴직 이후의 삶이 막막한 순간, 노숙자로 전락한 과거의 동창을 만난다. 5가지 작품 모두 주로 '황혼의 사랑'과 '퇴직 이후의 삶'에 방점이 찍혀 있는데, 아무래도 그 두 가지가 중장년층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여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최근 개봉한 <장수상회>도 그렇고 요 근래는 노년층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한국이 초고령화사회로의 진입을 앞두고 있다는 점이 자꾸 상기되다보니 그런 노년층의 이야기, 은퇴 이후의 이야기들에 자꾸 마음이 쏠린다. 그 이후의 삶을 상상하기가 어려운 건 아마도 육체적인 한계와 함께 온 '삶' 이후의 생활 때문 아닐까. <55세부터 헬로라이프>에는 이 지점을 짚어내는 구절이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시간을 투자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안간힘을 다해 정리한 끝에 돌아온 업무가 빌딩경비나 청소라는 건 슬프지 않아?"

"꿈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캠핑카> 中

 

꼭 이런 느낌이다. 열심히 뛰라고 해서 열심히 뛰어왔는데, 어떤 결실도 없이 낙하한 것 같은 느낌. 뛰라고 해서 뛰었더니 단물은 다 빨리고 퉤 버려진 느낌. 그런데 나는 여전히 내가 뛰었던 그 레일에서 뛰고 싶은 거다. 왜 거기서 내가 뛸 수 없지? 물으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몸이 먼저 말을 해준다. 말하자면, 현대사회의 중장년층은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지만 과실을 얻지 못한 사람들 같다. 정서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55세부터 헬로라이프>는 그런 현실과 5-60대 인물상들을 나름대로 '희망'차게 그려낸 글이다.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이런 세상에 희망이라는 건 사실 누군가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5편 모두에서 모든 상황은 부정적이고 암울하지만, 어떤 경험을 통해 인물들은 앞으로의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발견한다. 사실 이 지점이 <55세부터 헬로라이프>에 대해 묘한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지점이다.

 

사실, 이 중편집을 읽으면서 몇 번 의심을 했더란다. 이게 무라카미 류가 '지금' 쓴 게 맞나? 마지막 작품을 보면 방사능 얘기가 나오니까 최근작은 맞는 것 같은데, 이게 정말 일본의 중견작가가 쓴 소설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도리어 이 분위기는 한때 붐을 일으켰던 일본 여류작가 몇몇과 굉장히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읽었던 '무라카미 류'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더 이질감이 컸는지는 모를 일이다.

 

혹은, 이게 일본소설의 풍일지도 모르겠다.(내가 좋아하는 일본소설 작가는 이사카 코타로 정도인데, 그가 워낙 이 풍에서 저 풍으로 날아다니는 데다가, 최근에는 또 읽지 않아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확실히 그가 주제를 있는 그대로 내뱉는다는 점이, 그리고 이를 거의 온전히 주인공의 내면으로 풀어낸다는 점이 나는 좀 낯설게 느껴졌다. 그림 속에 숨겨져 있었더라면 조금 더 은근했을 것을 끄집어 내어 보여주자 흥이 식어버린 느낌이 들었달까? 아마도 곧 한국의 미래가 될(그리고 사실 지금 한국의 현재이기도 한) 중장년층 문제를 상당히 온유하게 다루고 있어 쉽게 다가갈 수 있었고, 가독성도 높았다. 공감되는 부분도 물론 많았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직설적이라는 점이 이 소설과 나를 조금 멀어지게 한다. 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라고 뒤에 적혀있던데, 어쩌면 신문연재소설의 특성상 무라카미 류가 작가로서의 자기 자신을 조금 굽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소설도 좋지만, 소설은 때로 공감과 설득이 아니라 낯설게 함으로써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쉬웠던 책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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