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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업 사회 -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
구도 게이.니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 펜타그램 / 2015년 12월
평점 :
2014년의 일이다.
대학생 기자단을 필두로 만들어진 미디어 <미스 핏츠>에 ‘최씨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가 소개 되었다. 나는 그 새로운 미디어에 사소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편지의 내용만은 20대로서 구구절절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월세, 취직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이 진하게 묻어나는 협박편지에 박수를 보냈더란다.
그러다 어느 날의 하교 길, 교정이 끝나는 곳에 깃발 같은 현수막을 들고 계신 아버님을 만났다. 현수막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써 있었고, 아버님은 당신을 향해 다가온 몇몇 대학생과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나는 가만히 서서 현수막 글씨를 읽어보았다. 그리고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아버지 세대와 나 사이의 거리감을 도대체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는지, 막막해졌다. 둘 다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더 그랬다.
아버지의 말씀은 간단했다. ‘너희는 노력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것을 처음부터 바라보고 있으니 취업이 힘든 게 아니냐. 우리 때는 그렇지 않았다. 불굴의 정신!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로서 너희를 응원하고 사랑한다.’ 그에 대한 우리 세대의 답변은 이랬다.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다.’
이제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났던가. 최근 인터넷 서점의 인문 란을 뒤져보면, 능력사회, 공부, 노력, 자기계발을 강조하는 사회가 가진 허구성을 강조하는 책이 많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의 인식은 그렇지 않다. 얼마 전 추석 때에도, 공장에는 사람이 없어 난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야 그렇겠지’했다.
이 나라에서 대부분의 청년은 대학을 나온다. 나는 지금 대학이라는 교육(?)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자의 수를 무시하는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지만, 내가 초중고를 나오면서 느낀 점은 어느 곳이든 ‘대학’이라는 이름을 단 곳에 대부분의 친구들이 진학한다는 거다. 우리나라 만큼 고등 교육을 많이 받는 나라는 찾기 힘들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경쟁하고 노력하는 이 풍토는 오바마가 언급했을 정도로 유명하다. 나는 솔직히 그 아버님의 글을 보며 화가 났는데, ‘공장에라도 가라’는 말 뒤에 숨겨진 그게 노력이고, 그게 치열한 삶이다, 라는 뉘앙스. 너희는 지금 너무 풍족한 시대에서 살아 맷집이 부족한 것뿐이라는 그 뉘앙스가 진저리나게 싫었기 때문이다.
누가 우리를 풍족하게 키웠는가? 우리는 풍족하게 크는 대가로 감내해야할 것이 정말 없었는가? 초-중-고-대학교를 필수적인 교육코스로 밟으며, 기성세대가 우리에게 가르친 건 ‘참고 공부하면 무언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그 희망의 끝이 공장인가? 나는 지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비하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당신들이 그토록 주창해온 노력을 우리는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해왔고, 그에 걸맞은 가치관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이렇게 공부했으니 어디는 가야지, 이렇게 공부했으니 뭔가는 해야지. 그러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 생각 때문에 더 괴로워하고, 더 미끄러진다. 노력했는데도 되지 않는다면 허탈해지고, 노력했음에도 비난받으면 허무해지며, 노력이란 말이 무서워진다.
그럴 땐 그냥 포기하는 편이 차라리 마음도 편하다. 노력이면 된다는 기치 아래에서 자라왔으니, ‘노력해도 안 된다.’는 현실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청년 백수 중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취업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들이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건 세간의 인식이요, 상황에 맞부딪히지 않은 누군가의 착각이다. 물론, 분명 어떤 경우 개인의 탓도 있을 테다. 개인의 특질이 사회적 구조와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개인의 경우요, 이토록 많은 청년 실업자 모두에게 대입해서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사설이 길었다. 나는 이런 개인적 생각을 배경으로 <무업사회>를 읽었다. 그리고 조금은 실망했다. <무업사회>가 나쁜 책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제목과 소개만 보고 너무 과도한 기대를 그 책에 불어넣은 게 문제였다.
<무업사회>는 일본의 젊은이들을 다루고, 니트족, 프리터로 사는 사람들의 통계적 숫자, 그들을 다시 취업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경위, 그리고 그들의 전반적인 속내를 얘기한다. 내가 바랐던 책이 조금 더 구조적인 문제에 치중하는 류 였다면(사실 일본에서 번역되어온 책이라는 부분에서부터 이 점을 포기해야했어야하는 것은 맞다. 한국과 일본의 풍토가 다를테니까), 이 책은 ‘청년 실업자’가 어떻게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가를 다루는 일종의 보고서 같은 느낌이었다. 책의 처음부터 이 청년 실업자가 발생하게 된 경위가 결코 세간의 인식처럼 ‘게으름’이나 ‘나태함’이 아님을 밝히는데, 이때 <무업사회>는 구조적 측면보다는 개인의 정신적 측면을 좀 더 강조한다. 말하자면, 청년 실업자 중 다수가 실패의 경험, 취업이라는 상황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인지, 사실 일반 사회과학 서적보다는 임영인 신부님의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세요>와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서울역 노숙자를 도우며 신부님이 쓰신 책인데, 노숙인들의 문제가 단순히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과 같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노숙인들 역시 노동의 현장에 있다가 한 순간에 튕겨나온 사람, 정신적으로 심한 트라우마가 있거나 실패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가 주로 적혀있는데, <무업사회> 역시 그랬다. 그래서인지 뒤쪽에 있는 수기를 보아도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고, 이런저런 공포증이 있었는데 잡트레이닝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 도움이 되었다는 류의 얘기가 많이 나온다.
<무업사회>는 이 사회를 ‘미끄럼틀 사회’라 부른다. 정규 루트에서 한번 이탈하고 나면 지속적으로 내려가게 되어 멈출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회에 대한 분석, 그리고 여기서 무업으로 이어지게 되는 현황 등이 궁금했는데 책 자체는 그보다 좀 더 ‘어떻게’ 이 이탈자들을 다시 사회로 북귀시킬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였다. 나쁘지 않고, 분명히 필요한 이야기이지만 뭐랄까. 해결책 부분은 매우 원론적인 이야기가 반복되었고 문제를 깊게 파헤치기보다는 프로젝트에 대한 보고서를 쓰는 데 치중한 느낌이 강했다. 무엇보다, 당연한 얘기이긴 하지만 노력의 끝은 또다시 노력이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읽고 나서 만족감이 오래 남지 않아 아쉬웠던 책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책에 대한 선입견을 가진 나머지 독서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이 고개를 들이민다. 곧 한국에도 프리터라는 실제적으로 용어가 도입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인데, 그때 즈음 다시 읽어보아도 좋을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