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5029~30

˝무서워하지 말아요. 당신이 만약 영원히 상실된다 해도, 나는 죽을 때까지 당신을 잊지 않을 거예요. 내 마음속에서 당신은 사라지지 않아요. 그거 하나는 꼭 잊지 말아요.˝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다. 그의 에세이 보다는 소설을, 단편보다는 장편을 좋아하는 팬이다. 같은 작품의 개정판이 나오면 사모으는 것도 좋아하는 팬이다. 하루키의 장편 시리즈는 2~5회 사이로 재독한 팬이다.


그 중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특히 의미있는 작품이다. 왜냐면 내가 대학교때 하루키의 첫 책으로 읽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사상사 구판(알라딘에서 검색도 되지 않는다...), 민음사 합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이렇게 세가지 버젼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애정이 많이 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핀볼>, <양을 쫓는 모험> 쥐 3부작 이후 나온 작품으로, 환상적인 모험을 보여주는 하루키 스타일이 시작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교훈? 감동? 그런건 잘 모르겠지만, 일단 스토리 자체가 정말 재미있고 구성도 탄탄하다. 게다가 하루키 주인공 특유의 쿨함이 잘 담겨 있어서 유쾌하고, 두꺼운 분량에 비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우편함에는 우편물이 한 통도 들어 있지 않았다. 전화기에도 녹음된 메시지는 없었다. 아무도 내게는 볼일이 없는 것 같았다. 상관없다. 나 역시 아무에게도 볼일이 없다.]  P.111(1부)




정직한 제목처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두개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는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가 닿을듯 말듯 하면서 평행하게 진행되나, 결국 닿지는 못한다. 왜냐면 ‘세계의 끝‘은 내 머리속에 존재하는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이고,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비정한 현실의 이야기니까.

[˝그게... 어떤 세계죠?˝ 나는 박사에게 물었다. ˝그 불사의 세계 말입니다.˝, ˝평온한 세계예요. 자네 자신이 만들어 낸 자네 자신의 세계이지. 자네는 그곳에서 자네 자신일 수 있어. 그곳에는 모든 것이 있고 또 모든 것이 없어. 자네는 그런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겠나?˝]  P.121(2부)




주인공인 ‘나‘가 비정한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살아가는 동시에 ‘나‘의 머리속에는 ‘나‘가 인지하지 못하는 또다른 자아인 ‘세계의 끝‘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후 ‘원더랜드‘의 ‘박사‘는 나에게 ‘셔플링‘이라는 것을 진행하고, 이 ‘셔플링‘에 의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인물들과 사건들이 미묘하게 이어진다. 그리고 ‘나‘에게 심어진 죽음의 스위치도 함께 켜진다.

[˝그러나 자네는 그 세계에서, 자네가 여기에서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자네가 잃어버린 것과 잃어 가고 있는 것들을.˝]  P.103(2부)




‘셔플링‘ 때문인지 ‘나‘는 ‘세계의 끝‘에서 ‘문지기‘에 의해 ‘그림자‘를 잃게 된다. ‘문지기‘는 ‘박사‘의 ‘셔플링‘효과를 의미하고, ‘그림자‘는 현실세계인 ‘원더랜드‘‘‘의 추억 또는 마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나‘는 더이상 현실세계를 살아갈 수 없다.

[˝두려워할 일은 없어. 이건 죽음이 아니야. 알겠나? 영원한 삶이지. 그리고 그곳에서 자네는 자네 자신이 되는 거야. 그에 비하면, 지금 이 세계는 겉보기만 그럴듯한 환영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걸 잊지 말게나.˝]  P.127(2부)




‘나‘에게 남은 시간은  단 하루,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현실인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의 죽음이냐, 아니면 내 머리속의 무의식인 ‘세계의 끝‘에서의 불멸 중 하나에서 말이다. 과연 ‘나‘의 마지막 선택은 무엇일까?

[˝그렇게 멋진 세계인지 어떤지는 나도 몰라.˝ 그림자가 말했다. ˝그러나 그곳은 적어도 우리가 살아야 할 세계야.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도 있고. 너는 그곳에서 태어났어. 그리고 거기에서 죽어. 네가 죽으면 나도 사라져.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야.˝]  P.308(2부)




오랜만에 다시 읽은 이 작품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즐거움 보다는 쓸쓸함이었다. 주인공인 ‘나‘는 쿨해 보이지만 사실은 소중한걸 잃어버린, 아니 소중한게 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소중한게 없는 사람에게 삶이라는게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현실인 ‘원더랜드‘에서는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행동한건지도 모른다. 그나마 ‘나‘의 자아의 세계인 ‘세계의 끝‘에서는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을 발견하는데, 그곳에서나마 ‘쿨함‘을 벗어 던지고 쓸쓸하지 않게 살아가길 바래본다.

[좀 더 젊었던 시절, 나는 그런 슬픔을 어떻게든 언어로 환치해 보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언어를 늘어놓아도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할 수는 없었고, 나 자신에게도 전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나의 언어를 닫고, 나의 마음을 닫았다. 깊은 슬픔이라는 것은 눈물이라는 형태조차 띨 수 없다.]  P.318(2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무언가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야 말로 비정한 세상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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